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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터뷰] 파도에 미친 당신…이번 주말 양양을 가신다면

서핑계의 '세리언니'…롱보드 국가대표 문리나씨
"후배들 운동만 집중했으면…실업팀 창단, 유소년 양성 목표"

(양양=뉴스1) 조재현 기자 | 2021-04-28 07:26 송고
편집자주 주변을 돌아보면 자기만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이 정한 기준점을 의식하지 않고, 행복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그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한국 여자 골프 역사는 박세리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프로골퍼라는 직업조차 생소한 시절, 그가 미국 프로 무대에 진출해 보여준 열정과 투혼은 수많은 '박세리 키즈'를 낳았고, 한국 여자골프는 세계 최강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여기 서핑계의 '세리언니'를 꿈꾸는 이가 있다. 서핑 여자 '롱보드' 부문 1호 국가대표인 문리나(35)씨다. 10여 년 전 서핑 장비조차 빌리기 어려웠던 시절 운동하던 자신과 달리 후배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자신의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길라잡이가 되겠다는 것이다.

나아가 박세리가 여자 골프 국가대표팀을 맡아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고, 사업가로 변신해 유망주 육성에 힘을 쏟듯 리나씨 역시 국내 첫 실업팀 창단과 유소년 교육 시스템 등을 확립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지난해 12월 포항에서 열린 '2021 서핑 국가대표 선발전' 당시의 경기 모습. (사진제공=문리나씨) © 뉴스1
지난해 12월 포항에서 열린 '2021 서핑 국가대표 선발전' 당시의 경기 모습. (사진제공=문리나씨) © 뉴스1

지난 23일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남애리에서 그를 만났다. 약혼자와 함께 운영하는 서핑숍에서다. 리나씨는 지난해 12월 대한서핑협회가 주최한 '2021 국가대표 선발전' 여자 롱보드 부문에서 1위에 올라 태극마크를 안았다. 일반적으로 서핑은 큰 파도에서 역동적인 라이딩을 선보이는 '숏보드', 부드러운 파도에서 우아한 라이딩을 할 수 있는 '롱보드' 부문으로 나뉘는데, 몇 해 전 국가대표팀이 꾸려진 숏보드와 달리 롱보드 부문은 이번에 처음 결성됐다.

현재 한국 서핑 대표팀은 숏보드 6명, 롱보드 4명, 패들보드(SUP) 4명을 포함해 총 14명으로 구성됐다. 롱보드 및 패들보드 선수들은 이달 초 중국 하이난성 싼야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제6회 아시아비치게임대회 참가 자격을 얻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대회는 연기된 상태다.

◆ '서핑앓이' 시작은 영화 '폭풍속으로'…대학까지 버킷리스트 1호는 '서핑'  

리나씨는 초등학생 시절 우연히 본 영화 '폭풍속으로'의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고 했다. (※1991년 개봉한 이 영화는 FBI 요원인 조니 유타(키아누 리브스)가 은행 강도단인 서퍼를 검거하기 위해 서퍼로 위장 잠입하는 내용인데, 강도단을 이끌던 보디(패트릭 스웨이지)와의 치열한 대립 구도가 인상적이다.) 

지금의 '국가대표 문리나'를 만든 것은 이 영화 덕분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 영화를 본 후 그의 첫 번째 버킷리스트는 언제나 서핑이었다고 한다. 리나씨는 "영화에 파도가 만들어주는 터널인 '배럴'을 타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 장면을 보고 설레어 잠을 못 이뤘다. 당시에는 그게 서핑인지도 몰랐지만, 대학생 때까지 일기장에 '그것(서핑)을 하고 싶다'고 늘 적었던 기억이 난다"며 웃어 보였다.

그토록 원했던 첫 파도타기는 22살쯤으로 기억하고 있다. 중국 하이난에서 스킨스쿠버를 하던 중이었는데, 서핑하는 무리를 보고 도전장을 내밀었다. 경험이 없었던 탓에 서핑의 맛만 볼 수 있는 입문용 보드를 받아들었음에도 파도에 몸을 맡겼던 그 짜릿함을 쉽사리 잊을 수 없었다.

그는 국내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서핑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서 서핑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서핑을 가르치는 곳도, 장비를 빌려주는 곳도 드물었다.

'2021 서핑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한 후 기념촬영 중인 모습. (사진제공=문리나씨) © 뉴스1
'2021 서핑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한 후 기념촬영 중인 모습. (사진제공=문리나씨) © 뉴스1

◆파도에 미치다…요가강사 대신 선택한 바다

당시 대구에서 요가강사로 일하던 리나씨는 부산 송정해수욕장에 문을 연 서핑숍을 알게 된 이후 매일 같이 부산으로 달려갔다. 가는 데만 3시간이 걸렸지만, 나날이 늘어나는 실력에 1년 내내 대구와 부산을 왕복하는 게 즐거웠다고 회상했다.

서핑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수록 남모를 고민도 커졌다. 그때만 해도 서핑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건 상상하기조차 힘든 시기였다. 생업을 포기하고 서핑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송정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요가강사로서 꽤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기에 나름 안정적인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지만,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커져만 가는 서핑에 대한 열정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리나씨는 4년간 부산에서 지냈다. 특기인 요가가 있어 다행히 생계유지는 가능했다. 하지만 살면서 '미쳤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은 시기였다며 크게 웃었다. 그는 "동틀 무렵 가장 먼저 바다에 들어가, 마지막에 나오기를 반복했다. 남들이 밥을 먹을 때도 파도가 좋아 서핑에 몰두했다"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서핑에 빠져 지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그러다 보니 선수로서의 길도 보였다. 그는 2014년 국내 한 서핑 대회에 경험 삼아 출전했다가 입상에 실패하자, 욕심이 샘 솟았다고 했다. 이후 훈련에 매진한 결과 이듬해부터 크고 작은 국내 대회에서 상을 받기 시작했다. 2017년부터는 주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태국 등 해외 무대에서 활약했다. 이후 해외와 국내를 오가며 프로 서퍼란 명성도 얻게 됐다.

2019년 해외 대회를 준비하던 리나씨는 남애3리 파도에 매료돼 양양에 정착했다. 훈련을 위해 잠시 머물렀으나 외국 주요 서핑 명소와 비교해도 파도 컨디션은 손색이 없었다. 급기야 계획에 없었던 서핑숍도 인수했고, 서핑 국가대표 선발전까지 참여하게 됐다.

2019년 포르투갈에서 열린 글라이딩 바나클스 국제대회에 유일한 한국인 초청 선수 자격으로 출전했을 당시 문리나씨. (오른쪽에서 2번째) (사진제공=문리나씨) © 뉴스1
2019년 포르투갈에서 열린 글라이딩 바나클스 국제대회에 유일한 한국인 초청 선수 자격으로 출전했을 당시 문리나씨. (오른쪽에서 2번째) (사진제공=문리나씨) © 뉴스1

◆ 불안한 청춘, 바다로 도망가봐야 갈증만 커져…진정한 행복은 '균형'

1호 국가대표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었으나 뒤돌아보면 순탄한 과정만은 아니었다.

리나씨 역시 고민과 불안으로 점철된 이 시대 청춘과 다를 바 없는 20대를 보냈다. 바다에 나가면 행복했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불안정한 현실과 마주해야만 했다. "바다는 현실의 고민과 근심을 잠시 잊게 해주는 일종의 도피처에 불과했다"고 리나씨는 털어놨다.

리나씨는 "나 역시 또래들과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았다. 특히 서핑을 시작하게 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다. 육지에서는 모든 게 고민이었는데, 바다에 나가면 깨끗하게 정리됐다"며 "힘든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고 바다로 달려 나갔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커지듯 바다로 나가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눈앞에 현실은 리나씨를 옥죄어왔다. 생계에 대한 고민도 더 커졌다. 현실을 눈감고 외면한다고 해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문제는 리나씨가 양양에 정착하면서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서핑숍 운영을 통해 고정적인 수입이 생겼다. 서핑에 빠져 게을리했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차근차근 쌓아 올렸다. 그는 이를 통해 새로운 행복이 찾아왔다고 했다.

그는 '삶의 균형'에 대해 깊이 고민했고, 그 결과물을 자기 등에 새겼다. 리나씨는 "등에 천칭자리가 들어간 타투가 있는데, 천칭자리 의미는 '균형'이다. 물에서만 행복하다고 해서 내 인생 전체가 행복한 게 아니라는 것을 느꼈고, 바다 밖에서의 삶과 균형을 맞춰야 진정한 행복이 찾아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 제2의 세리언니 꿈꾼다…운동 전념할 수 있는 실업팀 만들고파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태극마크를 달고 나갈 수 있는 국제대회의 개최 여부는 불투명하다. 어쩌면 생애 한 번뿐인 기회를 날려버릴 우려도 있으나 그는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서핑숍에 찾아오는 손님에게 서핑을 가르치고, 그들이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는 게 행복한데다 새롭게 도전할 일도 생겨서다. 리나씨는 "선수로서는 정점을 찍었기에 이젠 후배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파하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그는 최근 양양군과 서핑 실업팀 창단을 비롯한 유소년 육성 방안 등을 놓고 논의를 시작했다고 했다. 아직 초기 단계로 공감대만 형성된 수준이라 넘어야 할 관문은 산더미지만, 리나씨의 의지는 엿볼 수 있었다. 

그는 "해외 대회에 나갈 때마다 우리나라의 부족한 인프라가 늘 아쉬웠고,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모든 것을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배울 수밖에 없었다"며 "후배들은 나처럼 힘든 길을 가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다. 내가 닦아놓은 길을 후배들에게 알려줘 편하게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일이 정부로부터 어떠한 지원을 받거나 본인의 안정적인 삶을 위한 것이 아님을 재차 강조했다. 리나씨는 "직업으로서 서핑 선수를 꿈꾸는 유소년들이 흔들리지 않게 꿈을 심어주고 싶다. 방과 후 수업 개설 등 여건만 갖춰진다면 무료로 가르칠 의사도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26일 자신의 서핑숍에서 강습생에게 이론 교육 중인 문리나씨. (사진제공=문리나씨)© 뉴스1
지난 26일 자신의 서핑숍에서 강습생에게 이론 교육 중인 문리나씨. (사진제공=문리나씨)© 뉴스1

◆"꿈이라는 씨앗을 잊지말고 들여다보자"

리나씨는 국가대표로 선발된 이후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자리를 잡아가던 강습 프로그램은 최근 신청자가 크게 늘었고, 최근엔 지상파의 한 예능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인터뷰 도중에도 손님은 계속 찾아왔다. 

그런데도 인터뷰에 응한 이유도 바로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싶어서란다. 그는 꿈에 대해 수차례 강조했다. 젊은 시절 고민하며 찾은 해답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리나씨는 "내가 걸어온 길이 누군가에게 '나도 할 수 있겠구나', '나도 꿈을 이룰 수 있겠구나' 하는 메시지로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청춘들을 향해 "꿈이라는 씨앗을 방치하지 말고 계속 키워가라"고 응원했다. 리나씨는 "어쩌면 싹이 내가 기대한 모습이 아닐 수도 있고, 내가 원하는 만큼 키가 자라지 않을 수도 있으나 씨앗을 잊지않고 키워나가 싹을 틔우는 그 희열을 맛 보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폭풍속으로를 다시 찾아봤다. 영화 초반부엔 이런 대사가 나왔다. 키아누 리브스가 위장 수사를 위해 처음 서핑숍을 찾았을 때 안내 데스크에 앉아있던 한 꼬마가 했던 말이다.  "서핑이 아저씨 인생을 바꿀 거에요"


cho84@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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