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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⑳ 백두산·칠보산지역의 역사유적

조선 후기부터 유학자와 관료들의 유람기에 본격 등장
백두산-칠보산 연계 관광 모색

(서울=뉴스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 2021-03-06 08:00 송고
편집자주 북한은 200개가 넘는 역사유적을 국보유적으로, 1700개 이상의 유적을 보존유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상 북측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고려시기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75년간 분단이 계속되면서 북한 내 민족문화유산을 직접 접하기 어려웠다. 특히 10년 넘게 남북교류가 단절되면서 간헐적으로 이뤄졌던 남북 공동 발굴과 조사, 전시 등도 완전히 중단됐다. 남북의 공동자산인 북한 내 문화유산을 누구나 직접 가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최근 사진을 중심으로 북한의 주요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고려, 조선시기에 백두산은 한반도 산천의 조종산(祖宗山)으로 불렸다. 백두산은 과거 숙신(肅愼)과 옥저(沃沮)의 땅이었다가 고구려-발해의 영역으로 귀속됐다. 발행 멸망 후 백두산은 여진(女眞)족의 활동영역이었지만 고려 때도 "아국은 백두산에서 시작해서 지리산에서 끝난다"는 산악숭배신앙이 존재했다.
조선 세종 때 김종서(金宗瑞)가 두만강지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 등에 6진(鎭)을 설치하고 남쪽의 백성을 이주시켜 살게 했다. 1712년(숙종 38)에는 청나라와 국경을 확정하는 백두산 정계비(定界碑)가 세워졌다.

그후 영조는 청나라가 백두산(장백산)을 여진족의 발상지로 내세우는 것을 견제하고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백두산을 조선 왕조의 발상지로 높이고, 백두산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허항령(1,402m) 동쪽 대홍단군에서 바라다 본 백두산.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허항령(1,402m) 동쪽 대홍단군에서 바라다 본 백두산.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국경이 확정되고 조종지산(祖宗之山)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으면서 백두산을 직접 답사하고 기행문을 남기는 유학자와 관리들도 늘어났다.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 때 백두산에 오르려면 함경도 갑산이나 무산을 거쳤다.

1776년(영조 42) 6월 10일부터 17일가지 조엄(趙曮)과 함께 백두산을 오른 서명응(徐命膺)은 갑산-허항령-삼지연을 거쳐 백두산 정상에 올랐다. 서명응의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에 따르면, 1766년 갑산(甲山)으로 유배된 그는 삼수(三水)로 유배된 조엄과 함께 백두산에 올랐다.
동아일보에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를 연재한 언론인이자 사학자인 최남선(崔南善)도 갑산을 거쳐 백두산에 올랐다. 그는 1926년 7월 24일 기차로 서울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원산선과 함경선을 갈아타고 속후(당시 함경선의 종점으로 현재 함경남도 신포시)에 도착, 거기에서 다시 자동차를 타고 북청, 풍산, 갑산 등을 거쳐 혜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7월 29일부터 걸어서 혜산을 떠나 허항령을 넘어 무두봉에 도착하고, 8월 3일 백두산의 정상 장군봉에 올랐다.

반면 1930년 조선일보에 백두산등척기(白頭山登陟記)를 연재한 사학자이자 정치가인 안재홍(安在鴻)은 원산, 청진, 부령, 무산(茂山), 두만강 기슭을 거쳐, 백두산 정상에 오른 후 허항령, 혜산, 풍산을 거쳐 북청(北靑) 해안가에 들렀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현재는 량강도의 도소재지이자 중국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국경도시인 혜산이 백두산 답사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육로로 가려면 평양에서 길주까지 기차로 간 후 다시 백두산청년선(길주-혜산 103.4㎞)으로 갈아타고 혜산에 도착하거나, 평양에서 만포까지 간 후 혜산-만포청년선(204.15㎞)을 통해 혜산에 간다. 2019년 10월 북한은 백두산 답사와 관광을 위해 혜산시와 삼지연시을 연결하는 철도를 새로 완성했다.

새롭게 개발되고 있는 삼지연시 전경. 뒤쪽으로 북포태산이 솟아 있고, 사진의 왼쪽 제일 위의 붉은 지붕 건물이 새로 건설된 삼지연청년역이다. 혜산-삼지연 철도는 2015년에 착공돼 2019년 10월에 완공됐다. 2021.03.06.© 뉴스1
새롭게 개발되고 있는 삼지연시 전경. 뒤쪽으로 북포태산이 솟아 있고, 사진의 왼쪽 제일 위의 붉은 지붕 건물이 새로 건설된 삼지연청년역이다. 혜산-삼지연 철도는 2015년에 착공돼 2019년 10월에 완공됐다. 2021.03.06.© 뉴스1

전근대시기에 백두산은 접근이 어려운 오지였기 때문에 역사유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북한은 이 지역을 항일혁명전적지로 복원해 놓았다. 그런데 최근 북한은 장군봉과 천지 인근에서 잇달아 종교유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2000년대에 천지 근처에서 발굴된 용신비각(龍神碑閣)은 국보유적 193호로 지정됐다. 용신비각은 현재 향도봉 '백두산사적비' 옆으로 옮겨져 있다. 

백두산 향도봉으로 옮겨져 있는 용신비각(龍神碑閣) 전경. 뒤쪽으로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이 보인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백두산 향도봉으로 옮겨져 있는 용신비각(龍神碑閣) 전경. 뒤쪽으로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이 보인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백두산 향도봉으로 옮겨져 있는 용신비각(龍神碑閣)의 앞면(왼쪽)과 뒷면. '천화도인'이 20세기 초에 세운 비석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백두산 향도봉으로 옮겨져 있는 용신비각(龍神碑閣)의 앞면(왼쪽)과 뒷면. '천화도인'이 20세기 초에 세운 비석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용신비각은 20세기 초에 '천화도인'이 백두산의 '용왕용신'에게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구원하여줄 것을 기원하며 세운 비석이다. 비석의 높이는 약 1m정도다. 앞면에는 "대태백(大太白) 대택수(大澤守) 용신비각"이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대태백'은 백두산을, '대택'은 천지를 뜻한다.
  
뒷면에는 '지궁(地宮)'이라는 글자 아래 "용왕용신비각 청정(淸淨) 대태백 대택수중비각 래래무량안정(無量安定) 천화도인"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천지의 용신이 이 나라 사람들을 무궁토록 안정하게 해줄 것을 바란다는 내용이다. 북한은 '천화도인'을 대종교나 천불교 관계인물인 것으로 추정한다.

1909년 개창된 대종교는 백두산을 '배달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추앙했고, 장군봉이나 천지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실제로 북한은 지난해 장군봉에서 대종교의 기본경전인 천부경을 새겨놓은 옥돌판을 발견해 공개했다.

또한 2018년 천지 인근에서 제단유적도 발견됐다. 이 제단은 밑면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36m정도라고 한다. 여기에는 2개의 금석문도 발굴됐는데, 그 중 하나에는 '조선왕조 초기에 이곳에서 힘을 비는 제를 지냈다'는 내용의 20여 자의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백두산 향도봉 아래 천지 인근에 있는 제단유적. 2018년에 발견된 것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백두산 향도봉 아래 천지 인근에 있는 제단유적. 2018년에 발견된 것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용신비각을 세운 '천화도인'을 북한이 천불교 관계인물일 수도 있다고 추정하는 이유는 1906년에 천지 인근에 세워진 종덕사(宗德寺)와 관련이 있다. 종덕사는 장백폭포 너머 천지의 북쪽 끝인 달문 인근에 있다가 해방 후 사라진 뒤 터만 남아 있는 종교건물이다.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백두산 천지 중국 쪽 달문 근처에 있는 종덕사(宗德寺) 전경.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2021.03.06.© 뉴스1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백두산 천지 중국 쪽 달문 근처에 있는 종덕사(宗德寺) 전경.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2021.03.06.© 뉴스1

1930년대 기록에 따르면 종덕사에는 "병오년(1906년) 6월 6일"이라는 준공 날자와 도목수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고, '대원당(大元堂)', '백두산 대택수 종덕사(白頭山大澤水宗德寺)'라고 쓴 현판이 있었다고 한다. 내당에는 《옥황상제천불위》(玉皇上帝天佛位)라고 쓴 위패도 있었다. 종덕사 건물은 모두 나무로 지었는데 무려 99칸이나 됐다고 한다.

절간의 기본건물의 제일 가운데에는 내당이 있었고 그 둘레로 8칸, 16칸, 32칸 즉 2배씩 늘어나게 배치된 방들이 있었다. 1933년 9월 4일 종덕사 사진을 실은 동아일보는 향토인(鄕土人)의 말을 빌어 종덕사가 "조선 말기 태극교도들이 창건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 안도현 내두산에 있는 조선인 마을에 '천불사'란 절이 있었고, 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천불교 신자였으며, 이들이 백두산 천지 가에 '덩덕궁'(종덕사)이라는 99칸짜리 절간을 지어 일 년에 두 번씩 찾아가 기도를 드렸다라고 주장한다.

종덕사에서 의식을 할 때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고구려 사람들처럼 머리를 우로 틀어 올리고 울긋불긋한 옷차림을 하고 꽹과리와 제금을 치며 북과 목탁을 두드렸는데 덩덕궁 덩덕궁하는 소리가 아주 장엄해 천불교를 '덩덕궁교'이라고 불렀다 한다.

현재로서는 '천화도인'이나 종덕사가 대종교, 태극교, 천불교 중 어느 종파와 관련이 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조선후기에 들어서 백두산과 함께 주목을 받은 산이 명천군에 있는 칠보산(七寶山, 906m)이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마천령산맥이 대정봉, 대연지봉, 간백산, 소백산, 남포태산, 북포태산, 두류산 등 2000m 이상의 높은 봉우리로 이어지고, 두류산에서 남동쪽으로 점차 낮아져 김책시(옛 성진시) 해안에서 끝나는데, 두류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나온 한 줄기가 칠보산으로 연결된다. 금, 은, 진주, 산호, 산삼을 비롯한 7개의 보물이 묻혀 있다 해서 칠보산이란 이름이 붙였다. 내칠보, 외칠보, 해칠보로 나뉘는 칠보산은 그 영역이 대단히 넓다.

함경북도 명천군에 있는 칠보산의 모습. 괴암기봉으로 이뤄진 풍경이 이색적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함경북도 명천군에 있는 칠보산의 모습. 괴암기봉으로 이뤄진 풍경이 이색적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조선시대 때 유학자나 관료들의 칠보산 유람문화의 서막을 연 것은 함경도 회령의 판관으로 임명된 임형수(林亨秀)였다. 그는 1542년(중종47) 3년간의 함경도 생활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오면서 4일간 칠보산을 유람한 뒤 <유칠보산기(遊七寶山記)>를 지었다. 여기서 그는 "금강산의 돌 하나와 지리산의 봉우리 하나하나마다 그 이름을 다 가지고 있거늘 어찌 기이한 봉우리와 뛰어난 바위가 이 산에서 홀로 이름 불리지를 못하는가"라며 칠보산을  금강산, 지리산에 견주었다. 1664년에는 한시각의 칠보산도 네 폭이 그려지기도 했다.

그후 17세기에 4년간 함경도 감사를 지낸 남구만(南九萬)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함흥십경'과 칠보산을 포함한 '북관십경'을 선정하고 문장을 곁들인 형식의 '함흥십경도', '북관십경도'를 제작했다. 이 그림들은 중앙의 문사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고, 19세기까지 적지 않은 '칠보산도(七寶山圖)'가 꾸준히 제작됐다.

조선후기 칠보산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칠보산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3.06.© 뉴스1
조선후기 칠보산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칠보산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3.06.© 뉴스1

칠보산에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발해의 사찰인 개심사(開心寺, 국보유적 제120호)가 있다. 826년(발해 선왕 9) 대원(大圓)이 창건한 사찰로, 1377년(우왕 3) 나옹(懶翁)이 중건했고 그 뒤 수차례 보수됐다. 대웅전은 1784년(조선 정조 8) 중건돼 1853년(철종 4) 대대적으로 보수된 건물이다. 현재 대웅전 외에 응향각, 관음전, 심검당, 산신각이 남아 있고, 절 입구에 3개의 부도와 3개의 부도비가 있다.

칠보산 기슭에 있는 발해의 사찰 개심사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칠보산 기슭에 있는 발해의 사찰 개심사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칠보산 기슭에 있는 개심사 대웅전 안 전경. 대웅전 안에는 조선 시기 불상인 금동11면 관음보살입상, 금동9면 관음보살입상, 비로자나불상 등이 안치되어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칠보산 기슭에 있는 개심사 대웅전 안 전경. 대웅전 안에는 조선 시기 불상인 금동11면 관음보살입상, 금동9면 관음보살입상, 비로자나불상 등이 안치되어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발해의 유적으로는 개심사 외에 함경남도 북청군에 남아 있는 청해토성(국보유적 제187호)이 있다. 이 토성은 남북 길이가 340m, 동서 길이가 500m, 둘레는 약 1,289m에 이른다. 신라와의 접경지대에 세워진 중요한 전초기지의 성으로, 현재 남벽·서벽·북벽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북한은 이 유적을 근거로 발행의 5경(京) 중 하나인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가 이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발해의 유적인 함경남도 북청군의 청해토성. 남벽·서벽·북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발해의 유적인 함경남도 북청군의 청해토성. 남벽·서벽·북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칠보산 북쪽에 인접해 있는 화성군에는 조선 초기의 사찰인 쌍계사(雙溪寺)가 남아 있다. 1395(태조 4)년에 창건돼 1480년(성종 11)에 중수된 절로, 현재 대웅전을 비롯해 애월루, 심검당, 산신각 등의 건물이 보존돼 있다.

함경북도 화성군에 있는 조선 초기 사찰 쌍계사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함경북도 화성군에 있는 조선 초기 사찰 쌍계사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세종 때 여진족을 몰아내고 6진을 설치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백두산과 칠보산 주변지역에는  북방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산성과 읍성이 많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운두산성(雲頭山城, 보존유적 제 476호)이다. 회령의 두만강 강변에 솟은 운두산의 험한 산세를 이용해 고구려 때 처음 쌓은 운두산성은 조선시대 때도 군사적 요충지였다.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는 약 6km이다.

읍성 중에는 명천군과 청진시 사이에 있는 경성읍성(국보유적 제118호)이 가장 잘 보존돼 있다. 이 성은 북방의 방위를 위해 1107년(고려 예종 2)에 흙으로 쌓았는데 조선 광해군 때 성의 규모를 넓혀 고쳐쌓았다. 둘레는 2260m, 성벽 높이는 9.6m이다. 네 면의 중심부에 대문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고 지금은 남문(국보유적 제119호)만이 원상태로 남아 있다. 수성문(守城門)이라고 불린 경성읍성 남문은 조선 중기에 축조됐고, 1756년(영조 32) 성벽 사이에 홍예문을 내고 그 위에 2층 문루를 세웠다.

함경북도 경성에 남아 있는 경성읍성 성곽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함경북도 경성에 남아 있는 경성읍성 성곽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함경북도 경성에 남아 있는 경성읍성 남문과 문루. 조선 영조 때 세워진 건축물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함경북도 경성에 남아 있는 경성읍성 남문과 문루. 조선 영조 때 세워진 건축물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경성에는 고려 때 이 지역을 개척한 윤관(尹瓘)과 조선시대 4군6진을 개척한 김종서를 비롯한 4명의 장군들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정북사(靖北祠, 보존유적 제437호)가 남아 있다. 이 사당은 조선 세종 때 세워진 것으로 처음에는 노당(盧堂)이라 했고, 여러 차례 보수와 중수를 거듭하다가 1845년(헌종 11)에 중건하면서 정북사로 개칭됐다. 

1664년(현종 5)에 실시된 과거시험인 북관별시를 묘사한 '북관별과도(北關別科圖)'에 포함돼 있는 길주성과 관아의 모습. 위쪽에 장백산(백두산)과 마천령산맥이 묘사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3.06.© 뉴스1
1664년(현종 5)에 실시된 과거시험인 북관별시를 묘사한 '북관별과도(北關別科圖)'에 포함돼 있는 길주성과 관아의 모습. 위쪽에 장백산(백두산)과 마천령산맥이 묘사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3.06.© 뉴스1

경성읍성 외에도 고려 때 처음 쌓은 길주읍성(보존유적 제451호), 조선 초에 쌓은 혜산진성(보존유적 제1514호) 등 현재 68개의 성곽 유적이 보존 관리되고 있다. 특히 혜산진성(현재 혜산)의 남문은 외적들을 제압하여 복속시킨다는 의미에서 복융대(伏戎臺)라고 하다가 17세기에 고쳐지으면서 괘궁정(掛弓亭)으로 개칭했는데, '북관십경도'에도 포함돼 있다. 조선시대 때 혜산진은 갑산부에 속했다. 갑산읍성의 남문(진북루)은 현재 국보유적 제157호로 지정돼 있는데 6·25전쟁 때 불에 타버렸던 것을 1980년에 복원한 것이다.

'관북십경도' 중의 '갑산 괘궁정' 그림에 묘사된 혜산진성과 백두산 천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3.06.© 뉴스1
'관북십경도' 중의 '갑산 괘궁정' 그림에 묘사된 혜산진성과 백두산 천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3.06.© 뉴스1


갑산읍성의 남문인 진북루 전경. 현재 건물은 1980년에 복원한 것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갑산읍성의 남문인 진북루 전경. 현재 건물은 1980년에 복원한 것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또한 함경북도의 최북단 온성군에 있는 종성읍성의 장대로 세워진 수항루(受降樓, 제436호)는 북한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3층 목조건물이다. 1608년(선조 41)에 성을 개축하면서 세워졌고, 여진족을 물리치고 우두머리를 잡아 이곳에서 항복을 받았다고 하여 수항루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재의 건물은 해방 후에 복구된 것이다. 통영시에도 왜군의 항복을 받았다는 수항루가 복원돼 있다. 

조선 중기 때 종성읍성의 장대로 세워진 수항루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조선 중기 때 종성읍성의 장대로 세워진 수항루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북한은 백두산과 칠보산지역을 연계해 국제관광지로 개발하고 있다. 백두산지역에는 '무봉국제관광특구'가 조성됐고, 백두산 아래 첫 도시인 삼지연시 개건 현대화사업도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또한 북한은 2013년 개성역사지구를 고구려고분군에 이어 두 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뒤부터 문화유산·자연유산 보호 사업의 중요성을 부쩍 강조하며 국제기구와 다른 나라들과 교류사업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2015년 민족유산보호법을 세계적 추세에 맞게 새로 제정하고, 2018년에는 문화유산·자연유산 보호 사업을 위해 국내외에서 기부를 받아 운영되는 ‘조선민족유산보호기금’도 설립했다.

남북 간에는 문화유적 보존, 공동발굴, 상호 교환전시, 공동학술대회 등 교류의 폭을 넓혀갈 수 있는 사업들이 많다.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상호협조 및 문화재의 해외유출 방지, 해외소재 문화재의 환수, 일본의 교과서 왜곡 및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공동 대응 등 대외적인 문제에서도 남과 북은 머리를 맞대고 협력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특히 문화유산 분야의 교류는 남북의 오랜 분단의 이질감을 극복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데도 기여할 것이다.

따라서 남북관계가 막혀있을수록 문화유산을 매개로 한 남북교류는 정책적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 역사문화유산 교류가 남북의 다름을 이해하고 소통하는데 가장 좋은 창구인 동시에 의미 있는 성과를 도출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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