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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⑲ 조선 건국의 뿌리 함흥의 역사유적

조선 태조 이성계의 조상들이 터전은 잡은 땅
본궁을 역사박물관으로 활용 관광객 유치

(서울=뉴스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 2021-02-27 08:00 송고
편집자주 북한은 200개가 넘는 역사유적을 국보유적으로, 1700개 이상의 유적을 보존유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상 북측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고려시기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75년간 분단이 계속되면서 북한 내 민족문화유산을 직접 접하기 어려웠다. 특히 10년 넘게 남북교류가 단절되면서 간헐적으로 이뤄졌던 남북 공동 발굴과 조사, 전시 등도 완전히 중단됐다. 남북의 공동자산인 북한 내 문화유산을 누구나 직접 가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최근 사진을 중심으로 북한의 주요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조선시대 함흥은 관북지방의 행정도시의 중심이자 조선왕조 건국과도 많은 인연과 일화를 간직한 곳이다. 태조 이성계(李成桂) 집안은 4대조인 이안사(李安社, 목조)가 당시 몽골 땅이었던 함흥 남부의 영흥지역으로 이주한 후 대대로 이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했고, 이성계도 영흥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자랐다. 조선 건국 후 영흥과 함흥에는 ‘본궁(本宮)’이 설치됐고, 여기서 해마다 32차례의 제사를 올렸다.

함흥은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였고, 6세기 후반에는 신라 진흥왕의 북진정책에 따라 신라의 영토가 됐고, 그 뒤 발해의 영토가 됐다. 926년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여진족의 거주지가 되어 오랫동안 우리 영토에서 벗어나 있다가 1107년(예종 2) 윤관(尹瓘)이 이 지역의 여진을 정벌함으로써 비로소 우리 영토로 수복됐다.
그후 다시 여진과 몽골의 땅이 됐다가 수복하는 과정을 거쳐 1356년(공민왕 5)에 함흥에 설치돼 있던 몽골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함에 따라 고려의 영토가 됐고, 조선으로 이어졌다. 조선 3대 태종 때부터 함흥부로 승격돼 관찰사가 파견됐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1432년(세종 14) 당시 호수 3538호에 8913인이 거주했다. 16세기 후반 함흥의 인구는 6만여 명으로 크게 늘었다.

조선후기 함흥감영에서 과거보는 모습을 그린 ‘북관별과도(北關別科圖)’에 묘사된 함흥성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2.27.© 뉴스1
조선후기 함흥감영에서 과거보는 모습을 그린 ‘북관별과도(北關別科圖)’에 묘사된 함흥성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2.27.© 뉴스1

함흥의 중심지는 둘레 4.6㎞의 함흥읍성이었다. 함흥성(보존유적 제368호)은 고려 때 쌓은 함주성을 조선시대에 들어와 1453년(단종 원년)에 개축한 것으로 1746년에 다시 쌓았다. 함흥읍성은 북으로는 반룡산(현재 동흥산)의 지형을 이용하고 서쪽으로는 성천강의 자연적 해자를 이용했으며, 동쪽과 남쪽은 호련천(湖連川)과 동해에 접해 방어에 유리한 자연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촬영한 함흥읍성의 북쪽 성곽(위)과 동쪽 성곽(아래)의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2.27.© 뉴스1
일제강점기 때 촬영한 함흥읍성의 북쪽 성곽(위)과 동쪽 성곽(아래)의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2.27.© 뉴스1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함흥일대에서 일본군과 러시아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지면서 함흥성의 주요 시설도 큰 피해를 입었다. 다음해 통감부를 설치한 일제는 파괴된 함흥성을 복구하는 대신 대부분의 성곽을 철거하고 성의 가장 북쪽에 있던 북장대(北將臺) 주변에 공원을 조성했다.
그 후 함흥성의 동문쪽에는 함흥역이, 서문쪽에는 서함흥역이 들어섰고, 동서로 두 개의 신시지가 조성되어 함흥의 옛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일제 말기에 서울에서 함흥까지는 기차로 13시간 정도 걸렸다.  

특히 3년간 6·25전쟁을 거치면서 함흥시는 폐허로 변했다. 북한은 전후복구과정에서 동독의 지원을 받아 함흥과 흥남일대를 기계공업과 화학공업의 중심지로 개발했고, 현재 인구 약 80만 명의 북한 제2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일제강점기 때 촬영한 반룡산(동흥산) 남쪽 함흥시내의 모습과 1960년대 건설 중인 함경시내의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일제강점기 때 촬영한 반룡산(동흥산) 남쪽 함흥시내의 모습과 1960년대 건설 중인 함경시내의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현재 함흥성의 흔적으로는 일부 성곽과 북장대터에 세워진 구천각(九天閣, 국보유적 제108호)이 남아 있다. 처음 고려 때 함주성(함흥성)을 쌓을 때 북문의 동쪽에 전시의 전투지휘처로 북장대와 문루(북상루)가 세워졌고, 이곳에서 40m정도 떨어진 곳에 '구천각'이라는 누각을 함께 세웠다.

일제는 반룡산공원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1937년에 북장대 자리에 '함흥전망대'를 설치했다. 축대는 화강암 대신 콘크리트로 만들고 문루도 복원했지만, 이름은 북상루가 아닌 구천각이라고 불렀다.

북한은 1970년대에 "조선동부의 번영하는 도시 함흥에 있는 산"이라는 뜻에서 반룡산을 동흥산으로 이름을 바꾸고, 일제가 조성한 '반룡산공원' 일대를 대대적으로 재개발했다. 이때 구천각의 축대를 다시 화강암으로 다시 쌓고, 문루도 과거 북상루 양식으로 복구했다. '구천각' 현판은 1990년대 이후에 새로 설치한 것이다. 현재 동흥산공원 안에 ‘팔천각’이란 정자가 남아 있는데, 조선 말기까지 남아 있던 구천각은 이것과 같은 양식의 누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구천각의 축대는 높이가 6.5m이고, 축대 속은 비워 그 안에 21단짜리 돌층계를 놓아 축대 위로 오르내리게 했다. 축대 위에는 성가퀴(성벽 위에 설치한 높이가 낮은 담)를 돌리고 3면에 화살을 쏠 수 있는 구멍을 냈다.

1937년 건설된 '함흥전망대'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던 1960년대 구천각 모습과 새로 복원된 구천각의 모습. 축대가 콘크리트에서 화강암으로 바뀌고, 문루도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1937년 건설된 '함흥전망대'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던 1960년대 구천각 모습과 새로 복원된 구천각의 모습. 축대가 콘크리트에서 화강암으로 바뀌고, 문루도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조선 후기 방랑시인 김갓갓(본명 김병연)은 구천각에 올라 성천강의 장관을 바라본 후 "정자에 오르니 구천각은 하늘에 닿은 듯하고/ 말 타고 긴 다리를 건너니 오랜 세월을 밟는 듯하구나"란 내용의 시 한수를 남겼다.

구천각에서 내려다 보면 왼쪽(남동쪽)으로 함흥대극장 주변의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오고, 오른쪽(남서쪽)으로 성천강을 가로지르는 성천교와 함흥평야가 펼쳐진다. 성천교는 조선 초기에는 83m에 달하는 나무다리(만세교)였는데, 1905년 러일전쟁 때 불탔다. 일본공병대가 1908년에 가교로 복구했지만 1928년 대홍수로 유실됐고, 1930년에 다시 철근콘크리트로 건설돼 사용되다 6·25전쟁 때 파괴됐다. 현재는 신설된 성천교 옆에 교각만 남아 있다.

성천교를 지나 시내 쪽으로 강을 건너면 왼쪽으로 동흥산공원이 나오고, 김일성과 김정일동상, 함경남도혁명사적관, 신흥관 등이 대로를 따라 조성돼 있다.
함경남도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관청건물인 선화당과 부속건물이었던 징청각(澄淸閣)이 혁명사적관 뒤쪽에 보존돼 있다.

함흥 선화당(국보유적 제109호)은 1416년 함흥에 함경도 관찰사 본영을 두면서 지은 건물로 ​18세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당시 선화당 주변에는 수십여 동의 부속건물들이 있었으나 현재는 징청각만 남아 있다.

1416년에 지은 함경도 관찰사의 정무 건물이었던 선화당(위)과 부속건물 징청각(아래)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1416년에 지은 함경도 관찰사의 정무 건물이었던 선화당(위)과 부속건물 징청각(아래)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선화당 뒤쪽에는 함흥향교의 부속건물이던 제월루(霽月樓), 보존유적 제355호)가 보존돼 있다. 최근 북한은 제월루 뒤쪽구역을 민속공원으로 조성했다. 원래 1600년(선조 33)에 2층 누정으로 건설된 제월루는 현재 위치보다 더 북쪽에 있었는데, 1832년(순조 32)에 다시 지을 때 옮겼다. 정면 3칸(10.3m), 측면 3칸(5.6m)의 겹처마합각집이다. 

1832년(순조 32)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다시 지은 함흥향교의 부속건물인 제월루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1832년(순조 32)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다시 지은 함흥향교의 부속건물인 제월루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이외에도 동흥산 능선에는 만세봉수(보존유적 1320호), 광덕봉수(보존유적 1321호), 기와재봉수(보존유적 1324호) 등 여러 봉수대가 보존돼 있다.

조선시대 때 함흥성 남문을 나와 나무다리를 건너 4km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면 함흥본궁에 다다랐다. 일제강점기 때는 함흥역에서 기차를 타면 본궁역까지 3-4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시 아침에는 함흥시내에서 본궁 근처 함흥농업학교로 통학하는 교직원과 학생들로 자전거 행렬이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함흥본궁(국보유적 제107호)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의 4대조와 효비(孝妃)·경비(敬妃)·의비(懿妃)의 4대 황후 위패를 모시기 위해 자신의 집터에 새로 건물을 지은 것이다. 이성계는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이곳에 머물며 오랫동안 지냈다. 이성계 집안이 4대에 걸쳐 살았고, 이성계가 태어난 영광(현재 행정구역으로는 금야군)에도 '영광본궁'(보존유적 358호)이 세워졌다.

함흥본궁의 건물은 1392년부터 1398년 사이에 건립됐으나 '임진왜란' 당시 모두 불에 타버려 1610년(광해군 2)에 다시 세웠다. 함흥본궁의 건물배치는 남북으로 중심축을 설정하고 이 중심축 위에 바깥삼문과 안쪽삼문 그리고 본궁의 정전을 비롯한 기본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외삼문에서 내삼문까지의 거리가 26m이고 정전까지 거리는 60m이다. 본궁의 정전은 폭 15m의 앞면 5칸, 폭 9.15m의 옆면 3칸 전각이다. 본궁의 정전 앞 정원에는 수백 년 자란 한그루의 희귀한 반송이 땅에 누운 형태로 뻗어 자라고 있다.

함흥본궁 전경. ​함흥본궁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의 4대조와 효비(孝妃)·경비(敬妃)·의비(懿妃)의 4대 황후 위패를 모시기 위해 자신의 집터에 새로 건물을 지은 것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함흥본궁 전경. ​함흥본궁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의 4대조와 효비(孝妃)·경비(敬妃)·의비(懿妃)의 4대 황후 위패를 모시기 위해 자신의 집터에 새로 건물을 지은 것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정전에서 본 함흥본궁 내부 전경. 정전 앞 정원에 반송이 있고, 내삼문 앞쪽에 풍패루가 보인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정전에서 본 함흥본궁 내부 전경. 정전 앞 정원에 반송이 있고, 내삼문 앞쪽에 풍패루가 보인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그리고 정전의 동북쪽에 목조·익조·도조·환조의 위패를 모시던 이안전(移安殿)이 있다. 이안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에 단일 익공 겹처마에 배집으로 되어 있다. 현재는 수리나 청소를 할 때 위패를 잠시 보관하는 임시 보관소로 쓰인다.

본궁의 안삼문바깥 동쪽에는 2층루마루 형식의 풍패루(豊沛樓)가 있는데 앞면 3칸 옆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임금의 고향을 풍패라고 하는데, 여기서 따온 이름이다. 풍패루 앞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연못에 건물그림자를 드리울 때의 모습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듯 아름답다.

현재 함흥본궁은 함흥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정전 건물 안에는 조선자기를 비롯한 여러 공예품이 전시돼 있고, 황초령과 마운령에 세워져 있던 진흥왕순수비,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 들어온 왜병을 물리치기 위해 백성들을 궐기시키고 앞장서서 싸운 12인의 의병을 추모해 1712년에 세운 창의사비(彰義祠碑, 보존유적 1360호) 등의 역사유적이 옮겨져 있다.

함흥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함흥본궁 정전 내부 전시관과 박물관 안에 옮겨져 있는 창의사비. (신은미 제공) 2021.02.27.© 뉴스1
함흥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함흥본궁 정전 내부 전시관과 박물관 안에 옮겨져 있는 창의사비. (신은미 제공) 2021.02.27.© 뉴스1

정전 분관에 보관돼 있는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黃草嶺眞興王巡狩碑, 국보유적 제110호)는 관북의 내륙으로 통하는 관문이던 황초령(1,206m) 위에 세워져 있었다. 이 비는 신라 24대 진흥왕이 동북경계를 순행한 것을 기념하여 568년(진흥왕 29년) 8월에 처음 세워졌고, 1852년(철종 3)에 당시 함경도관찰사 윤정현(尹定鉉)이 비를 보호하기 위해 황초령 정상의 원 위치에서 고개 남쪽인 중령진(中嶺鎭) 부근(하기천면 진흥리)으로 옮겼다. 처음 발견됐을 때 3개 부분으로 잘려져 있었던 것을 현재는 붙여놓았다.

황초령비는 화강석 몸돌만으로 만들어졌고, 높이는 1.17m, 넓이는 44㎝, 두께는 21㎝이다. 비문에는 12줄에 35자씩 모두 420자가 새겨져 있고, 비를 세우게 된 연유와 의의, 진흥왕의 업적과 순행한 목적, 수행한 사람들의 직위, 이름들이 기록돼 있다. 이 비는 고대 신라의 영역 범위와 관직제도·명칭·지명 등을 밝혀주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함흥본궁 정전 분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는 황초령진흥왕순수비(왼쪽)과 마운령진흥왕순수비(오른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함흥본궁 정전 분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는 황초령진흥왕순수비(왼쪽)과 마운령진흥왕순수비(오른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磨雲嶺眞興王巡狩碑)는 함경남도 이원군의 마운령에 세운 비석이다. 황초령비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 이 비는 16세기 말에 처음 발견됐고, 17세기 초 한백겸이 <동국지리지>에 고려 윤관(尹瓘)의 비로 소개했으나, 1929년 전적(典籍)조사 일로 현지에 출장나갔던 최남선(崔南善)이 현지 유지들의 협력을 얻어 본격적으로 조사해 학계에 소개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화강석으로 네모나게 다듬어서 만들어진 비석은 높이 1.36m, 너비 45㎝, 두께 30㎝이며, 앞면에 26자씩 10줄, 뒷면에 25자씩 8줄, 모두 415자의 글이 새겨져 있다.

이외에도 함흥에는 태조 이성계의 조부 이춘(李椿, 도조)의 묘인 의릉(義陵, 보존유적 1285호), 조모 경순왕후의 묘인 순릉(純陵, 보전유적 1286), 이성계의 부모인 이자춘(李子春, 환조)과 의혜왕후의 묘인 정·화릉(定和陵, 보존유적 제1284호) 등도 남아 있다.

조선 초기에 함흥본궁과 함께 세워진 영흥본궁 정전과 이안전(移安殿) 전경(위), 태조 이성계의 조부 이춘(李椿, 도조)의 묘인 의릉(義陵, 아래 왼쪽), 이성계의 부모인 이자춘(李子春, 환조)과 의혜왕후의 묘인 정·화릉(定和陵, 아래 오른쪽). 일제강점기 때 촬영한 사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2.27.© 뉴스1
조선 초기에 함흥본궁과 함께 세워진 영흥본궁 정전과 이안전(移安殿) 전경(위), 태조 이성계의 조부 이춘(李椿, 도조)의 묘인 의릉(義陵, 아래 왼쪽), 이성계의 부모인 이자춘(李子春, 환조)과 의혜왕후의 묘인 정·화릉(定和陵, 아래 오른쪽). 일제강점기 때 촬영한 사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2.27.© 뉴스1

함경남도에는 현재 양천사(국보유적 제113호), 안불사(보존유적 제360호), 용흥사(국보유적 제115호), 광제사(국보유적 제150호), 정광사(국보유적 112호), 동덕사(국보유적 116호) 등의 사찰이 남아 있다. 함흥과 이웃한 영광군 봉흥리에 있는 용흥사(龍興寺, 국보유적 제115호)는 1048년(고려 문종 2)에 창건된 사찰이다.

이 사찰은 18세기에 화재로 전부 불탄 후 1794년(정조 18)에 백운산성(보존유적 제403호) 동문에서 60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옮겨 새로 지었다. 현재 대웅전, 무량수각, 운하루, 향로전, 산신당이 남아 있다.

함경남도에 남아 있는 사찰의 위치도.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함경남도에 남아 있는 사찰의 위치도.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용흥사에서 500m가량 떨어진 곳에 부속암자인 불지암(佛地庵, 보존유적 제 362호)도 남아 있다. 이 암자는 불지사로도 불렸으며 1378년(고려 우왕 4)에 용흥사의 부속암자로 지어졌다. 

함경남도 영광군 백운산성 안에 남아 있는 용흥사(龍興寺)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함경남도 영광군 백운산성 안에 남아 있는 용흥사(龍興寺)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함경남도 영광군 백운산성 안에 남아 있는 불지암(佛地庵) 전경. 고려 말기 용흥사의 부속암자로 지어졌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함경남도 영광군 백운산성 안에 남아 있는 불지암(佛地庵) 전경. 고려 말기 용흥사의 부속암자로 지어졌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안불사(安佛寺)는 함경남도 금야군 동흥리에 있으며, 1393년(조선 태조 2)에 창건돼 1843년에 중건된 사찰이다. 현재 극락보전과 민적당만 남아 있다. 정광사는 발해 때 세운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병자호란 때 불에 탄 것을  1643년(조선 인조 20)에 복원했다. 현재 대웅전과 명부전, 무량수각이 보존돼 있다.

단천시에 있는 동덕사는 고려시대에 처음 지어졌고, 6㎞ 정도 떨어져 있던 화장사(華藏寺)를 현재의 위치로 옮겨와 지으면서 동덕사로 이름을 바꾼 것이라고 전한다. 한때는 함경남도 북부의 승려들을 관리하는 승통(僧統)과 단천 지역의 일곱 사찰을 관리하는 승장(僧將)이 있던 비교적 큰 절이었지만 현재는 대웅전과 무량수전만 남아 있다.

함경남도 북청군 대덕산에 있는 광제사(廣濟寺) 전경. 1467년(세조 13) 창건되고, 1735년(영조 11)에 중창된 사찰이다. 현재 대웅전을 중심으로 보광루, 무량수각, 산신각, 요사채 등이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함경남도 북청군 대덕산에 있는 광제사(廣濟寺) 전경. 1467년(세조 13) 창건되고, 1735년(영조 11)에 중창된 사찰이다. 현재 대웅전을 중심으로 보광루, 무량수각, 산신각, 요사채 등이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북한은 최근 함흥시내 동흥산공원 인근의 역사유적지와 농마국수 전문식당인 신흥관, 평양대극장을 본떠 건설한 함흥대극장,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25㎞ 떨어진 곳에 있는 마전휴양지를 연결해 관광 활성화에 나서고 있다. 

함흥시내에서 동남쪽으로 25km 가량 떨어진 동해안에 있는 마전해수욕장 모습. 북한은 최근 마전휴양지와 함흥 시내 역사유적지를 연결해 해외관광객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함흥시내에서 동남쪽으로 25km 가량 떨어진 동해안에 있는 마전해수욕장 모습. 북한은 최근 마전휴양지와 함흥 시내 역사유적지를 연결해 해외관광객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7.©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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