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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재구성]누명 쓴 '가짜 범인'이 불쌍해 펑펑 운 진범

'삼례 나라슈퍼 사건' 가짜범인 3인조 가운데 2명 장애
한글 모르는데 구타당해 자술서…누명 벗기까지 17년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2020-12-02 07:02 송고 | 2020-12-02 08:39 최종수정
© News1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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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틀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캄캄한 새벽에 또렷하게 들린 범인들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피해자들에게 흉기를 갖다 댄 3인조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고 싶어?", "가만히 있으면 자식과 남편은 살려줄게", "돈 어딨어?"

불청객 '3인조'는 금반지와 목걸이, 현금 등 254만원어치를 챙겨 달아났다. '나라슈퍼' 주인 유모씨(당시 77세)는 질식사했다. 옆방에 자고 있던 조카 이진주씨(가명)는 생존했으나 이후 강도만큼 치 떨리고 몰상식한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장애 있는 청년에게 "네가 죽였지" 누명

이른바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이다. 지난 1999년 2월6일 새벽 4시쯤, 전북 완주군 삼례읍 우석대학교 앞 나라슈퍼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3인조 불청객은 나라슈퍼 주인 유모 할머니(당시 77세)와 옆방에 자고 있던 조카 부부의 입을 청테이프로 틀어막은 뒤 강도 행각을 벌였다.
지문 등 현장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목격자도 없었다. 피해자의 진술에 따르면 범인들은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며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

경찰은 우범자를 대상으로 불심검문을 했다. 강인구씨(당시 19세)·최대열씨(당시 20세)·임명선씨(당시 20세)를 체포했다. 모두 불우하고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강씨와 최씨의 부모는 장애가 있었다. 강씨의 어머니는 왼팔에 장애가 있었고, 그의 부친은 지적 장애인이었다. 최씨의 모친은 하반신 마비 1급 장애인, 부친은 척추장애 5급 장애인이었다. 강씨와 최씨 모두 지적 장애가 있었다.

검거 당시 강씨는 미성년자였다. 형사는 조사실에서 강씨를 앞에 앉혀 두고 몰아붙였다. "이 XX야, 그 할머니(유씨) 네가 죽였지?"

이게 무슨 소리일까. 아니라고 했더니, 형사는 강씨의 뺨을 후려쳤다. "이놈 봐라, 거짓말하네." 경찰은 수갑을 찬 강씨를 일으켜 세워 그의 가슴을 발로 찼다. "일어나, XX야, 죽였어, 안 죽였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구타당한 강씨는 결국 '자술서'를 쓴다. 7세 때 어머니를 잃은 강씨는 글을 깨우치지 못했다. 형사의 '지시'대로 그림을 그렸다. "한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의 한글 자술서가 그렇게 완성됐다."(지연된 정의, 박상규·박준영 지음, 55쪽)

경찰청 © 뉴스1 황덕현 기자
경찰청 © 뉴스1 황덕현 기자

◇'진범 따로 있다' 신고 외면…결국 피해자가 나서


강인구씨·최대열씨·임명선씨. 검찰이 '범행'을 자백했다고 발표한 이들은 '전라북도 삼례읍 선후배 관계'였다.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는 피해자 진술과 맞지 않았다.

강인구씨 등이 1999년 4월 재판을 받는 와중에 경찰은 1통의 신고를 접수한다. 진범은 삼례 출신이 아닌 '부산 출신 3인조'라는 것이었다. 진범이 나라슈퍼에서 챙긴 귀금속을 본인이 팔아줬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은 어떻게 했을까.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찰도 신고를 접수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누명 쓴 '가짜 범인 3인조' 가운데 최씨가 2000년 재심 청구를 했으나 법원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법원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짜 범인들을 위해 나선 것은 공교롭게도 피해자였다. 강도 사건으로 고모를 잃고 생존한 이진아씨였다.

이진아씨는 경찰 수사기록을 입수해 살펴봤다. 강인구씨·최대열씨·임명선씨가 '가짜 범인'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자신이 피해자 조사 때 그만 실수로 잘못 말한 부분까지 이들의 진술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끼워 맞추기 수사'였던 것이다.  

'진범이다'는 신고를 당한 부산 3인조의 진술은 어땠을까. 이진아씨가 기억하는 사건 정황과 들어맞았다.

이씨는 강인구씨·최대열씨·임명선씨 등 '가짜 범인 3인조'를 위해 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들의 억울함을 풀렸으면 하는 바람에서 '엎드려 빈다'고 탄원서에 적어 호소했다. 그러나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짜 범인 대면한 진범, 눈물 펑펑 흘려

이들의 처지를 너무나 딱하게 생각한 것은 피해자뿐이 아니었다. 진범마저 눈물을 흘렸다. 강인구씨를 비롯한 '가짜 범인' 3인조는 진범 '부산 3인조'를 대면한 적 있다. 전주지검 조사실에서 진범을 가리기 위한 절차였다.

지적 장애가 있는 강씨는 '너네가 진범이잖아'라고 쏘아붙이는 검사의 질문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진범은 고개를 들어 강씨를 바라봤다. 

"다시 고개를 숙인 진범은 소리 내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강인구는 다시 교도소로 들어갔다."(지연된 정의, 박상규·박준영 지음, 58쪽)

강인구씨·최대열씨·임명선씨가 청구한 재심이 인정돼 무죄가 선고된 것은 사건 발생 17년 뒤다. 전주지법 제1형사부(재판장 장찬)는 지난 2016년 10월 재심 선고 공판에서 이들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강인구씨·최대열씨·임명선씨는 이날 판결에 따라 정부 보상금 3억5400여만원, 3억800여만원, 4억8400여만원을 받게 됐다.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사건 피해자들과 관련인들이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News1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사건 피해자들과 관련인들이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News1

드라마 '날아라 개천용' 주인공 실제 모델 박상규 기자와 '이 사건 재심을 맡은 박준영 변호사가 끈질긴 추적으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한 공이 크다. 진범 가운데 1명인 이모씨(52)가 "내가 범인이다"고 자백한 것도 무죄 선고에 영향을 미쳤다.

◇강압수사 의혹 일부 여전히 '현직'

뒤늦게나마 억울함이 풀렸으니 이 사건 결말은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억대 보상금으로 피해자들의 상처는 아물 수 있는 걸까. 무죄 선고가 난 것은 '가짜 범인' 3인조가 징역 3∼6년을 선고 받고 복역한 후였다.

경찰은 이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송민헌 경찰청 차장은 지난달 2일 서대문구 미근동 본청에서 열린 정례 기자간담회에서 "경찰을 대표해 피해자분들에게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송 차장은 "해당 사건 공소시효가 지나 형사 처벌도 안 되고, 징계시효도 당시 기준 2년이라 추가 규명 조치가 어려웠다"며 "해당 사건을 대상으로 조사가 이뤄진 것은 없다"고 덧붙였다.

경찰에 따르면, '가짜 범인 3인조'를 대상으로 강압적인 수사를 했다는 의혹에 휩싸인 경찰관 가운데 일부는 현직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 이 기사는 박상규 진실탐사그룹 '셜록' 기자와 박준영 변호사가 지난 2016년 12월 펴낸 '지연된 정의'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돼 작성됐음을 알립니다.


mrle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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