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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손짓 하나로 8000명이 죽었다니…기억나지 않습니다"

제약회사 평범한 영업사원이 악마가 되기까지
[신간 리뷰]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서울=뉴스1) 박정환 문화전문기자 | 2020-11-21 07:00 송고
빅토르 카페시우스(Viktor capesius, 1907~1985)가 1963년 프랑크푸르트법정에 출석해 찍은 머그삿(위쪽) 1928년 카페시우스(왼쪽)가 동료들과 수영장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뉴스1
빅토르 카페시우스(Viktor capesius, 1907~1985)가 1963년 프랑크푸르트법정에 출석해 찍은 머그삿(위쪽) 1928년 카페시우스(왼쪽)가 동료들과 수영장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뉴스1
독일계 루마니아인 빅토르 카페시우스(Viktor capesius, 1907~1985)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제약사 바이엘의 전신인 이케파르벤의 영업사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세 딸의 아버지였던 카페시우스를 악의 평범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바꿔놓았다. 강제징집된 그는 1943년 11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전근명령을 받았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대인 학살에 동참했다.

신간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는 빅토르 카페시우스의 삶을 추적하면서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아무런 죄의식 없이 악의 중심 속에서 타락하는지 고발한다.

카페시우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전쟁 이전에 여느 평범한 직장인처럼 조직의 성장과 개인적 이익을 위해 일했다. 그의 고객 상당수가 유대인이었으며 카페시우스는 이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주임약사로 근무했다. 그는 독가스 '치클론 베'를 관리하면서 신입 유대인 수감자를 두 그룹으로 분류했다. 노동이 가능한 사람은 수용소로 이송하고 여자·어린아이·병자들은 가스실로 보냈다. 그가 내린 결정으로 루마니아 거주 유대인 8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카페시우스는 임산부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생체 실험을 도왔으며 의약품 수집의 명목으로 신입 수감자들의 소지품에서 귀중품만을 가로챘다. 심지어 그는 희생자의 턱뼈에서 금니를 빼내 모으기도 했다.

카페시우스를 비롯해 일부 직원들은 수감자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문제 제기는 인도주의적 관심이 아니라, 이익 창출에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어서 건강한 노동자 1명의 생산량을 채우려면 수감자 3명이 동원되야 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했을 뿐이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전범재판소에 서지만 곧 풀려났다. 헌법인 독일 기본법은 '모든 행위는 그 행위 이전에 법률로 벌칙을 정한 경우에 한하여 처벌할 수 있다'(제103조 제2항)고 '소급효 금지'를 명시했기 때문이다.

선글라스를 착용한 빅토르 카페시우스 1963년 프랑크푸르트법정에 출석했다. (출처 저자 퍼트리샤 포즈너 트위터) © 뉴스1
선글라스를 착용한 빅토르 카페시우스 1963년 프랑크푸르트법정에 출석했다. (출처 저자 퍼트리샤 포즈너 트위터) © 뉴스1
카페시우스는 전범재판 이후 10여 년간 조용하게 살았지만 독일정부는 중앙검찰청이 신설돼 전범자를 잡아들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런 노력에 의해 카페시우스는 살인죄 공소시효 20년이 지나기 직전인 1963년부터 법정에 다시 서야 했다. 요아힘 퀴글러 검사는 카페시우스의 혐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희생자들은 아우슈비츠에서 카페시우스를 재회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카페시우스는 오랜 친구와 직장 동료를,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을 친근한 미소와 다정한 말로 안심시켜 놓고서 아무렇지 않게 손짓 한 번으로 죽음의 길로 보내 버렸다."

카페시우스는 이런 혐의에 대해 "모른다" 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로 일관했다. 심지어 그는 재판 도중에 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그는 1965년 8월6일 마지막 변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우슈비츠에서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약사로서 상황이 허락하는 한 최선을 다했다. 어떠한 범죄도 저지른 적이 없다. 무죄를 선고해 주시길 요청드린다."

저자 퍼트리샤 포즈너는 이런 상황을 이해하려면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어떻게 생체 실험과 강제 노역과 집단 말살을 통한 이익 창출 조직이 되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약사 이게파르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 손을 잡고 아우슈비츠를 탄생시켰다. 이 수용소는 단순히 히틀러와 광신도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게파르벤과 나치의 이해관계 속에서 인간성이 말살된 수용소가 생겨났고, 그 아래에서 카페시우스 같은 개인이 부단히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었다.

책은 이런 모든 것이 맞물려 악이 조직화되고 보편화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냈으며 후반부에서 종전 이후의 독일이 전범자들을 법정에 세워 역사의 심판대에 올리는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퍼트리샤 포즈너 지음/ 김지연 옮김/ 북트리거/ 1만7000원

퍼트리샤 포즈너의 원작(왼쪽)과 한국어판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뉴스1
퍼트리샤 포즈너의 원작(왼쪽)과 한국어판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뉴스1



art@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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