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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⑥ 평양지역의 고구려왕릉

광개토왕, 장수왕릉도 확정하지 못한 상황
왕릉 주인공 놓고 남북 견해 차이 확연

(서울=뉴스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 2020-11-21 08:00 송고
편집자주 북한은 200개가 넘는 역사유적을 국보유적으로, 1700개 이상의 유적을 보존유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상 북측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고려시기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75년간 분단이 계속되면서 북한 내 민족문화유산을 직접 접하기 어려웠다. 특히 10년 넘게 남북교류가 단절되면서 간헐적으로 이뤄졌던 남북 공동 발굴과 조사, 전시 등도 완전히 중단됐다. 남북의 공동자산인 북한 내 문화유산을 누구나 직접 가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최근 사진을 중심으로 북한의 주요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북한을 방문했을 때 남포시 강서구역에 있는 강서세무덤(강서삼묘)를 비롯해 덕흥리벽화무덤(국보유적 제156호), 진파리 7호무덤 등 여러 고구려시기 무덤에 직접 들어가 볼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안타까운 점은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에는 건국시조인 동명왕부터 마지막 보장왕까지 28명의 국왕이 있었다. 고구려왕들은 추모왕(동명왕), 유리왕 등 이름을 딴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장지명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미천왕은 미천원에, 소수림왕은 소수림에 장사지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광개토왕의 경우도 원래 공식 호칭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므로, '국강상(장지명)+광개토경평안(업적)+대왕(태왕)' 형식으로 이름이 붙여진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때는 광개토왕을 국강상왕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고국곡에 묻힌 8대 신대왕이 '고국곡왕'이 아닌 '신대왕'으로 기록된 것은 광개토왕처럼 왕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킨 호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왕들은 어디에 묻혀 있을까? 장지명으로 왕의 이름이 붙어 있기 때문에 왕릉이 있는 지형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지역에서 고국천왕의 '고국천'(故國川), 고국양왕의 '고국양'(故國壤), 광개토왕의 '국강상'(國岡上)이 어디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환도산성에서 국내성터로 가는 길에 있는 고구려시기 무덤들. 고구려 제2대 유리왕 22년(서기 3)부터 제20대 장수왕 15년(427)까지 420여 년간 고구려의 수도였던 지안지역에는 1만 2천여기의 고구려 무덤이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에 있는 태왕릉에서 바라다본 광개토왕비 비각과 장군총(將軍塚). 태왕릉과 장군총은 1.7km 떨어져 마주보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고구려는 2대 유리왕 때 국내성지역(현재 지안지역)으로 수도를 옮겼고, 장수왕 때 다시 평양성으로 천도했기 때문에 고구려 왕릉은 이 지역에 남아 있을 것이다. 고구려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있는 지안(集安)지역에는 현재 수많은 고구려시기 무덤이 남아 있다. 그 중 임강총, 천추총, 서대총, 태왕릉, 장군총 등이 왕릉으로 추정되지만 무덤의 주인을 두고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다만 서대총은 미천왕의 무덤으로 견해가 모아져 있다.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에 있는 태왕릉 전경. 일반적으로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학계에서는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에 있는 장군총(將軍塚) 전경. 과거 장수왕릉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 한국학계에서는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 뉴스1

과거 태왕릉 인근에 광개토왕비가 세워져 있기 때문에 태왕릉은 광개토왕릉, 장군총은 장수왕릉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현재는 태왕릉을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릉으로,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광개토왕릉비가 발견되었지만 비 근처에 있는 태왕릉과 장군총 둘 중에서 어느 게 광개토왕의 무덤인지를 놓고 여전히 확정짓지 못하는 상황이니 다른 고구려 왕릉의 주인공을 판단하기는 더욱 어렵다.

평양에 있는 고구려 왕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현재 평양에 있는 고구려 무덤 중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은 경신리1호무덤, 전(傳)동명왕릉, 진파리1호무덤과 4호무덤, 강서대묘·중묘·소묘, 호남리사신무덤, 토포리큰무덤(토포리대총), 안악3호무덤 등이다.  

4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후 20대 장수왕으로부터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 등 8명의 국왕은 평양에 묻혔을 것이다. 마지막 보장왕은 고구려가 멸망 후 당나라가 끌려가 그곳에서 사망해 묻혔기 때문에 제외된다.

평양지역에 남아 있는 왕릉 중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평양 중심부에서 25km 정도 남동쪽으로 떨어진 역포구역 용산리(옛 진파리)의 동명왕릉(국보유적 제36호)이다. 이곳에는 동명왕릉을 비롯해 10여기의 고분이 남아 있다. 북한에서는 '동명왕릉고분군'(국보유적 제15호)이라 부른다. 동명왕릉은 고분군에 속한 돌방무덤(石室墳) 가운데 가장 크고, 예로부터 '진주'(眞珠墓)라고 불렸다.
    
1973년경 김일성종합대학 채희국 교수의 주도로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 전(傳)동명왕릉을 발굴하고 있다. 발굴과정에서 모두 641송이의 연꽃무뉘 벽화가 발견됐고, 금과 은으로 만든 왕관 자편들과 구슬 등이 출토됐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동명왕의 무덤은 당연히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에 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3대 대무신왕은 졸본에 동명왕의 사당(廟)을 세웠고, 고구려의 역대왕들은 평양천도 이후에도 졸본까지 가서 한 달을 머물며 시조묘에서 제사를 지냈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졸본에 동명왕의 사당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무덤의 존재여부는 확실치 않다.

북한학계에서는 장수왕 때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졸본에 있던 동명왕의 무덤을 함께 옮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무덤이 평양 일대에서 다른 고분에서 볼 수 없는 화려한 연꽃무늬 벽화가 그려져 있고, 동명왕릉이 속한 진파리 고분군의 다른 무덤들이 모두 동명왕릉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 주요 근거다. 그리고 '정릉'(定陵)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그릇과 기와가 출토되어 정릉사로 불린 사찰이 무덤 앞에 건립되어 원찰의 역할을 한다는 점도 시조릉으로 보는 중요한 근거다. 실제로 능사를 갖춘 왕릉은 전동명왕릉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이 무덤이 특별한 위상을 갖는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북한은 이 무덤을 발굴 후 동명왕릉으로 확정하고, 1993년 5월에 화려하게 개건했다.
    
1974년 발굴 후 화려하게 개건된 동명왕릉의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 뉴스1

1974년 발굴 후 웅장하게 개건된 동명왕릉의 정면 모습. 200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사실 이 무덤을 동명왕릉으로 보는 것은 북한학계의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적어도 고려 후기부터는 고려나 조선에서도 동명왕릉이라고 인식했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인 고려 말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동명왕의 무덤이 평양의 용산묘(龍山墓)라고 기록돼 있고, 조선 초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동명왕 무덤은 부의 동남쪽 30리쯤 되는 중화(中和)의 경계 용산(龍山)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평양의 동명왕릉이 고려시대에 과거 고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면서 당대에 잘못 파악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평양 천도한 후에 졸본의 동명왕릉을 평양으로 옮겨왔거나 혹은 평양에도 동명왕릉의 허묘(墟墓)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열려 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으로 추정되는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환런(桓仁)시 미창구(米倉溝)에는 '장군묘'(將軍墓)라고 불리는 거대한 무덤이 있다. 오녀산성 남쪽에 있고, 묘 앞으로 혼강(渾江, 비류수)이 흐른다. 일각에서는 이 장군묘가 동명왕의 무덤을 옮겨 다시 조성했거나 장수왕 때 개축된 것으로 보고, 비슷한 시기에 천도한 평양에도 동명왕릉의 허묘를 조성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물론 남한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무덤을 장수왕릉이나 장수왕의 아들 문자왕릉으로 추정한다. 현재로선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2007년 2월 리명화 해설강사가 동명왕릉을 뒤쪽에 있는 ‘진파리 제7호분’에 직접 들어가 묘실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무덤을 북한에서는 고구려 건국공신인 마리 장군의 묘라고 주장한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동명왕릉의 오른쪽 뒤편에는 10여개의 무덤이 산재해 있다. 북한은 고구려 개국공신들인 오이(烏伊)‧마리(摩離), 부분노(扶芬奴) 등과 평양 천도 후 장군이나 학자, 외교관인 고흘(高紇), 온달, 이문진(李文眞), 예실불(芮悉弗) 등의 무덤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추론하는 근거는 뚜렷하지 않다. 그중 '진파리1호분'(국보유적 181호)과 '진파리4호분'(국보유적 제180호)에서는 사신도가 그려진 화려한 벽화가 확인됐다. 북한은 '진파리4호분'을 온달과 평강공주의 합장묘로 본다. 무덤 안 북벽에 청룡과 함께 상서로운 새를 탄 여자 신선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동명왕릉 뒤쪽에 있는 ‘진파리 고분군’. 북한에서는 ‘동명왕릉고분군’이라고 한다. 현재 10여기가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그러나 남한학계에서는 벽화무덤 양식을 토대로 두 무덤을 왕릉으로 평가한다. 남한의 일부 연구자는 북한이 양원왕 때의 장군인 고흘의 묘로 이름붙인 진파리1호분을 안장왕 또는 양원왕으로, 온달의 묘로 이름붙인 진파리4호분을 문자명왕릉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동명왕릉 뒤쪽에 있는 ‘진파리고분군’ 중 하나인 진파리1호분 전경. 북한에서는 고흘의 무덤이라고 주장한다. 남한학계에서는 무덤 내부에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는 점을 근거로 이 무덤을 안장왕 또는 양원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동명왕릉 뒤쪽에 있는 ‘진파리고분군’ 중 하나인 진파리4호분 전경. 북한에서는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의 합장묘라고 주장한다. 남한학계에서는 무덤 내부에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는 점을 근거로 이 무덤을 문자명왕릉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이렇게 추론만 무성한 평양지역 고구려 왕릉들의 주인공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장수왕과 평원왕의 무덤이 확인되어야 한다. 두 왕릉이 다른 왕릉의 주인공을 가리는데 기준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전동명왕릉을 장수왕릉으로 판단했지만 현재는 평양시 중심부에서 동북쪽으로 약 30㎞ 떨어진 평안남도 평성시에 위치한 경신리1호분을 장수왕릉으로 추정한다. 경신리1호무덤은 장군총보다는 훨씬 크고 태왕릉에 다소 못 미치는 규모로, 석실봉토분으로서는 한반도 내에서 가장 큰 고분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이 무덤은 예로부터 '한왕묘'(漢王墓), '황제묘'(皇帝墓)로 불렸다. 이 무덤에서는 연꽃무늬 와당과 다수의 기와가 출토됐고, 이 와당은 대략 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490년에 사망한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근거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무덤 남쪽의 현재 행정구역명이 평양시 삼석구역 장수원동이다. 북한은 이 지역의 오랜 마을인 '장수원마을'의 이름을 따서 장수원동이라고 했다. 장수원동의 북쪽에는 청운산에서 발원해 대동강으로 흐르는 장수원천(長壽院川)이 있다. 장수왕이 다녀간 강이라는 설화가 전해온다. 이 지역이 장수왕과 인연이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학자들이 발굴하면서 촬영한 경신리1호무덤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11.21.© 뉴스1

경신리1호무덤에서 남동쪽 대동강변에는 석실에 벽화가 그려져 있지 않은 토포리큰무덤과 사신도로 유명한 호남리사신무덤(국보유적 제26호)이 자리 잡고 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22대 안장왕과 23대 안원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무덤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장수원동과 호남리 일대에는 많은 벽화무덤이 남아 있고, 최근까지도 사신도가 그려진 벽화무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한편 평원왕릉은 남포시 강서구역에 있는 강서대묘라는 주장이 제기돼 있다. 강서구역에는 이 무덤 외에도 약수리벽화무덤(국보유적 제29호), 수산리벽화무덤(국보유적 제30호), 태성리벽화무덤 등 고구려시기 무덤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사신도로 유명한 강서세무덤(국보유적 제28호)은 특이한 배치구조를 가지고 있다. 강서세무덤은 무덤 크기에 따라 대묘, 중묘, 소묘로 불린다. 대묘가 가장 앞에 위치하고 그 뒤에 중묘와 소묘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토포리큰무덤이나 호남리사신무덤보다 늦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남포시 강서구역에 있는 강서삼묘 전경. 앞쪽에 대묘가 있고, 뒤쪽으로 중묘와 소묘가 나란히 배치돼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특히 왕릉급으로 평가되는 고구려 무덤 중 강서세무덤처럼 2기이상이 모여 있는 경우가 없다는 점에서 이 무덤의 주인공은 아버지(대묘)와 두 아들(중묘, 소묘)의 관계이거나 3형제 관계로 추정된다. 이러한 관계를 형성한 고구려왕으로는 25대 평원왕과 그의 아들들인 26대 영양왕, 27대 영류왕, 대양왕(평원왕의 아들이자 보장왕의 아버지로 보장왕 때 왕으로 추존) 밖에는 없다. 

남포시 강서구역에 있는 강서세무덤(강서삼묘) 앞에 북한이 세운 표식비. 현재 강서세무덤은 삼표리협동농장의 한 가운데에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이에 따라 남한학계에서는 강서대묘를 평원왕으로 추정하고, 강서중묘는 영양왕이나 대양왕, 강서소묘는 영류왕이나 대양왕의 무덤으로 본다. 이 무덤을 형제묘로 봐서 대묘를 영양왕, 중묘를 대양왕, 소묘를 영류왕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소묘를 대양왕이나 영류왕릉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소묘에만 벽화가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정변으로 시해되거나 공식 왕이 아니었기 때문으로 본다.

2003년 2월 강서대묘와 중묘 안에 들어가 볼 기회가 있었는데, 안학궁에서 평양성(장안성)으로 수도를 옮긴 평원왕이 대묘에 묻혔고, 어머니가 같은 영양왕과 대양왕이 대묘 뒤쪽에 나란히 있는 중묘와 소묘의 주인공이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관찰자 입장에서 해봤다.

이외에도 황해남도 안악군에는 국보유적 제73호, 제74호, 제67호로 각각 지정된 세 개의 무덤이 있는데, 그중 안악3호무덤(국보유적 제67호)의 주인을 두고 남북학계 사이에 논쟁이 치열하다. 안악3호무덤에는 무덤조성 시기와 주인을 알 수 있는 7행 68자로 된 동수(冬壽)라는 인물의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됐다. 당연히 이 무덤의 주인공은 336년 연나라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로 확정됐다. 문제는 묵서명이 발견된 위치였다.

황해남도 안악군에 있는 안악3호무덤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무덤 주인의 초상 벽화는 서쪽 곁방의 정면에 그려져 있고, 서쪽 곁방 입구 양쪽 벽에는 왕을 호위하는 무관인 장하독 2명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문제의 묵서는 좌측 장하독(帳下督) 그림 위에 쓰여 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동수의 이름이 쓰인 묵서명이 묘주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묘주의 신하인 장하독에 대한 내용으로 평가한다.

반면 남한학계는 안악3호무덤의 양식이 당시 국내성에 조성된 왕릉 형식과 달리 요녕지역에서 확인되는 전형적인 중국식 무덤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귀화한 동수의 무덤이 확실하다고 본다.
    
황해남도 안악군에 있는 안악3호무덤 내부 모습. 정면에 묘지 주인공이 그려져 있고, 앞쪽 입구 양 벽에 장하독(帳下督)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묘지 주인공을 두고 남한학계에서는 연나라에서 망명한 동수((冬壽)로, 북한학계에서는 고국원왕이라고 엇갈린 평가를 내리고 있다.(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1.© 뉴스1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국원왕은 재위 4년(서기 334년)에 평양성을 증축하고, 12년에 환도성을 수리하며 국내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해 11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침입해 궁실을 불태운 뒤 환도성을 무너뜨리고 돌아갔다. 다음해 7월 고국원왕은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이주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은 이 동황성이 서경(西京, 현재 평양) 동쪽 목멱산(木覓山)에 위치하고 있다고 했다. 목멱산은 고국원왕이 증축한 평양성(청암동토성)의 대동강 건너편에 있다. 북한은 동황성이 청암토성의 동쪽에 있는 청호토성이라고 보고 있다.

재위 39년(369년)에 고국원왕은 백제를 공격했으나 치양(雉壤, 황해남도 배천)에서 패전했다. 2년 뒤 평양성을 공격한 백제군과 맞서 싸우다 화살에 맞아 사망한 후 고국원(故國原)에 묻혔다. 북한은 고구려가 공격한 평양성이 현재 평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황해남도 신원군의 장수산성 일대에 위치한 남평양이라고 해석한다. 즉 남평양성인 장수산성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고국원왕이 전사하자 남평양 북쪽의 안악에 묘를 조성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평양성과 동황성이 만주에 있다고 보거나 남평양성의 존재를 인정하는 않는 입장에서는 소설 같은 이야기다.  

고구려 왕릉들의 주인공을 확정하는 작업은 아직까지도 미로찾기 같다. 고구려의 중심지가 만주와 평양지역이었기 때문에 현재 남한의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들은 고구려 왕릉에 직접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북한의 학자들은 공식입장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남한에서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이러한 요인들은 고구려왕릉의 주인공을 둘러싼 논쟁에서 남과 북의 견해 차이를 좁히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고구려의 모든 왕릉이 지안(집안)지역에 있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나온 적이 있다. 평양지역의 고구려 왕릉이라도 남북이 활발히 교류하며 공동조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yeh25@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