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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정 거짓말 밝혀낸 2㎜ 혈흔…'침묵의 목격자'를 찾는 사람들

제주경찰청 혈흔분석팀 3인방 난관 부딪힌 사건 해결사
혈흔 분석 사건 재구성…표백제로 지운 흔적도 찾아내

(제주=뉴스1) 고동명 기자 | 2020-11-14 09:00 송고 | 2020-11-15 10:51 최종수정
제주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임형수·박조연 검시조사관이 증거 분석 과정을 시연하고 있다. /© 뉴스1
제주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임형수·박조연 검시조사관이 증거 분석 과정을 시연하고 있다. /© 뉴스1

2019년 6월초 제주지방경찰청 고명권 과학수사계장을 비롯해 임형수·박조연 검시조사관, 이창용 경위 등으로 꾸려진 혈흔분석팀은 제주시 외곽에 있는 한 펜션 안에 들어갔다.

30대 여성이 자신을 성폭행하려 한 전 남편을 우발적으로 살해했다고 주장하는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서다.
이미 범행이 일어난 지 5일 이상 지났고 범인이 표백제로 펜션 내부를 말끔히 청소한 뒤였다.

분석팀이 내부를 살피며 느낀 첫 인상도 여기서 흉기를 이용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는 생각하지 못할만큼 깨끗하고 평범한 펜션일뿐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내부를 샅샅이 살피던 중 펜션 벽면에 묻은 검붉은 자국이 눈에 띄었다.
말이 자국이지 일반인이라면 그냥 지나쳤거나 봤더라도 벽에 묻은 때라고 여겼을 2㎜ 이하의 미세한 크기였다.

분석팀 감식 결과 이 흔적은 아니나 다를까 피해자의 혈흔이었다.

억울하게 숨지고 시신조차 찾지 못한 피해자가 남긴 이 작은 흔적은 지난해 전국을 떠들석하게 한 고유정(37) 전 남편 살인사건의 잔혹성과 계획범죄를 밝혀낼 중요한 단서가 된다.

고명권 계장은 "혈흔 형태 분석이란 혈흔을 분석해 범죄현장을 재구성하고 사건의 연속적인 과정을 결정하는 업무"라며 "혈흔의 위치와 모양은 범죄가 발생했을 때 어디에 희생자가 있었고 어디로 옮겨졌는지 등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고 설명했다.

망자가 남긴 '다잉 메시지'인 혈흔은 그래서 '침묵의 목격자'라고도 불린다. 

임형수 조사관은 "혈흔은 크기와 형태 등에 따라 자연적인 현상으로 신체에서 발생한 것인지, 인위적인 가해로 생긴 것인지 등도 구별이 가능하다"며 "변사체에 나온 타액의 형태를 통해 타살 여부를 확인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사건의 경우 분석해야 할 혈흔을 비롯한 범행 흔적이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였다. 게다가 범인은 범행을 부인하고 피해자 시신까지 없는 상황이였다.

고 계장은 "흉기 사건이 일어나면 현장에는 혈흔 등 다양한 증거가 있기 마련인데 고유정 사건처럼 현장을 훼손하는 즉, 청소하고 흔적을 지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회상했다.

제주지방경찰청 고명권 과학수사계장과 이창용 경위가 증거 분석을 시연하고 있다. /© 뉴스1
제주지방경찰청 고명권 과학수사계장과 이창용 경위가 증거 분석을 시연하고 있다. /© 뉴스1

첫번째 핏자국이 발견되면서 분석팀의 손발도 바빠졌다.

모래밭에서 바늘찾기였지만 벽면은 물론이고 방바닥과 천장 등에서 눈에 겨우 보일 정도의 미세혈흔들이 잇따라 발견됐다.

여기서 범죄를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루미놀 검사도 사용했다.

루미놀은 혈액과 반응하면 파란색 빛을 내는 특성상 이 검사는 야간에만 할 수 있다.

해가 떨어지고 펜션에 모인 분석팀이 거실과 욕실, 부엌 등에 루미놀 시약을 뿌리자 눈에 보이지 않던 혈흔들이 여기저기서 빛을 뿜어냈다.

다량의 혈흔이 발견돼 피해자 사망을 추정할 수 있었지만 고유정이 혈흔을 지우면서 형태도 훼손돼 루미놀 검사만으로는 정확히 당시 상황을 판단하기는 힘들었다.

결국 당시 상황을 재현해내는 것은 수많은 경험과 학습을 통해 축적된 인간의 관찰력과 지식이다.  

혈흔분석팀의 분석 결과 혈흔은 다이닝룸 천장, 입구 벽면, 의자에서부터 욕실 벽면, 문턱, 하수구를 거쳐 거실 천장, 현관 문틀, 중문, 신발장, 현관문 도어락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에 걸쳐 발견됐다.

분석팀 이창용 경위는 "혈흔의 대부분은 고유정이 휘두른 흉기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정지이탈흔(움직이거나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물체에서 혈액이 이탈해 생성되는 혈흔)이었다"고 설명했다.

분석팀은 고유정이 피해자에게 수면제 일종인 졸피뎀을 먹여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15차례 흉기를 휘두른 것으로 판단했다.

우발적으로 한차례 찔렀다는 고유정의 거짓말이 드러나는 순간이였다.

법원은 고유정의 계획범행을 인정한 결정적 증거로 졸피뎀과 이를 뒷받침한 혈흔 분석 결과를 인정했다.

공교롭게도 고유정 전 남편 살인사건 유죄가 대법원에서 확정된 지난 5일은 과학수사의 날(11월4일) 바로 뒷날이었다.

◇다양한 사건 해결에 기여…참혹한 현장에 트라우마도

고유정 사건은 최근 몇 년 사이 혈흔 형태 분석의 중요성을 알린 가장 유명한 사건이지만 제주지방청의 과학수사계는 이미 전국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전국 각 지방경찰청마다 혈흔 형태 분석 전문수사관이 있으며 제주지방청에는 3명의 혈흔 형태 전문수사관이 근무하고 있다. /© 뉴스1
전국 각 지방경찰청마다 혈흔 형태 분석 전문수사관이 있으며 제주지방청에는 3명의 혈흔 형태 전문수사관이 근무하고 있다. /© 뉴스1

2017년에는 전국 과학수사 국민만족도 조사에서 제주청이 전국 17개 지방청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박조연 검시조사관은 2017년 단순 변사로 묻힐 뻔한 영아 사망 사건에서 시신을 검사해 아동학대라는 근거를 찾아내는 등의 활약으로 2018년 '자랑스러운 제주경찰'에 선정됐다.

8~12년차의 경력을 갖춘 베테랑으로 구성된 제주청 혈흔분석팀은 고유정 사건 이외에도 수많은 범죄해결에 기여를 해왔다.

선박에서 실종된 외국인 선원 사건 수사에 애를 먹던 해경의 지원 요청을 받아 현장에 남은 혈흔을 분석해 자해한 뒤 바다에 뛰어든 사실을 밝혀내는 등 자칫 미궁에 빠질 뻔한 사건에는 항상 이들이 투입된다.

모든 수사가 그렇듯 혈흔분석도 감정을 배제한 냉철한 판단력이 중요하지만 때로는 참혹한 범죄 현장이 아른거려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한다.

임 조사관은 "참혹한 사건 현장은 아무리 봐도 무덤덤해지지 않는다"며 "우리도 인간인데 정신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어 심리상담을 받는 등 마음의 안식을 찾고는 한다"고 말했다.


kd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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