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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테스형!'과 천재들의 비밀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2020-10-29 12:00 송고 | 2020-11-02 15:04 최종수정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포스터
'테스형'의 파장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 같다.

KBS 추석특집 '대한민국 어게인'에서 나훈아는 '테스형!', '명자'와 같은 신곡을 선보였다. '명자'도 기막힌 노래지만 '테스형!'의 쓰나미에 밟혀 그만 으깨져 버린 느낌이다.
'테스형!'과 '명자'를 들으며 누구나 직감적으로 나훈아의 작사·작곡 능력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가수의 목소리는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누구든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다. 하지만 노랫말을 쓰고 작곡하는 능력은 다르다. 환경이 주어지고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더 오래 유지될 수 있다.  

나훈아는 노래와 노래 사이 막간에 세상에 대한 자기 생각을 거리낌 없이 표출했다. 김동건 아나운서와의 짤막한 인터뷰에서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사는 이야기도 살짝 비쳤다.

나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감히 운위할 능력이 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정확히 기억한다. 30대를 뒤로하고 마흔 살을 마주하던 해였다. 그해 나는 소크라테스를 느꼈다. 그가 남긴 한마디. '너 자신을 알라'가 한밤중의 천둥처럼 내면을 뒤흔들었다. 나는 나 자신을 알고 있는가.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 존재인가.  

소크라테스 두상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소크라테스 두상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소크라테스(BC469?~BC399), 플라톤(BC427~BC347), 아리스토텔레스(BC 384~BC322). 중‧고등학교 시절 배운 고대 그리스 철학자 3인이다. 프랑스 시인이자 평론가인 폴 발레리는 일찍이 유럽인을 이렇게 정의했다. 유럽인은 그리스문명, 로마문명, 기독교문명이 삼위일체로 내면화되어 있는 사람이다. 3개 문명을 삼각형이라고 보면 꼭짓점에 있는 게 그리스문명이다. 고대 그리스문 명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철학자가 소크라테스다. 무지에의 자각을 일깨운 사람, 소크라테스!
나는 지금까지 동서양의 천재 54명을 발로 연구하면서 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하나는 천재는 천성적으로 노마드(Nomad)다. 정착하는 것보다 떠도는 게 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다. 지루한 걸 죽기보다 더 싫어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 천재다.

다른 하나는 천재는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서로 다른 것들을 연결해 융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새로운 것에 대한 수용 태도가 개방적이다. 범재(凡才)들은 대체로 선입견과 고정관념의 벽에 갇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나훈아는 말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나 같은 사람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동반하는 훈장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예술가의 속성은 반(反)권력적이다. 나훈아는 노래 한 곡을 완성하는 데 짧게는 6개월에서 1년 이상이 걸린다고 했다. 또한 자신은 1년에 10개월 가까이 외국을 여행한다고도 말했다. 1년에 절반 이상 외국 여행을 한다는 이야기에서 나훈아가 노마드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스문명은 주지하다시피 오랜 세월 서양의 문학·음악·회화 전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신화를 모르고는 기본적으로 서양 회화의 해독이 불가능하다. 20세기 이후 서양에서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이 그리스 문명의 최고봉을 끌어와 노래의 주제로 삼은 사람은 없었다. 아니,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훈아는 서양 철학의 현인(賢人)을 대중음악에 끌어들여 접목했고, 그를 '테스형'이라고 불렀다. 소크라테스를 의형제로 삼았다. 소크라테스가 '테스형!'으로 불리는 순간, 범접하기 어려워 보였던 2400년 전 철학자는 친근한 동네 슈퍼마켓 할아버지로 다가왔다. 

2000년 2월, 백남준의 구겐하임미술관 회고전 포스터. 조성관 작가 제공
2000년 2월, 백남준의 구겐하임미술관 회고전 포스터. 조성관 작가 제공

예술에 과학을 끌어들인 최초의 인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외벽은 밤이 되면 미디어 아트 전시장이 된다. 누구라도 이 광경을 처음 보면 걸음을 멈추게 된다.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미디어 아트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자문하곤 한다.

세종문화회관 로비에는 1세대 미디어 아트 작품이 전시 중이다. '호랑이는 살아있다'. 미디어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1932~2006)의 작품이다. 세계의 현대미술 작가들은 모두 백남준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미디어 아트는 50여 년 전 뉴욕에서 꽃을 피웠다. 서울 토박이인 백남준이 서울에만 있었으면 경기고 출신들의 고질적 한계에 갇힌 채 국내용 인물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스무 살 언저리에 서울을 떠나 홍콩, 도쿄, 독일, 뉴욕, 파리를 바람처럼 떠도는 노마드의 삶을 살았다. 1984년 그가 '굿모닝 Mr. 오웰'이라는 기상천외한 멀티미디어 쇼를 선보였을 때 한국인은 충격에 빠졌다. 저런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다 나왔나?

백남준 이전의 모든 예술가는 과학을 멀리했다. 과학기술이 예술의 고유영역을 침해한다고 생각했다. 논리적 증명의 세계인 과학과 상상력의 세계인 예술은 물과 기름처럼 도저히 섞일 수 없다는 게 세상의 통념이었다. 도쿄대학을 거쳐 독일로 유학을 떠난 백남준은 ‘바보 상자’라고 매도하던 TV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읽었다.

독일에서 고독하게 전자학과 회로학을 독학하며 예술을 TV에 연결하는 방법을 몰두했다. 독일에서 미디어아트를 실험한 백남준은 일본을 거쳐 현대예술의 메카인 뉴욕으로 갔다. 일본 엔지니어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미디어 아트가 뉴욕에서 꽃을 피웠다.

백남준은 예술에 과학을 결합한 최초의 인간이다. 2000년 2월, 구겐하임 미술관은 밀레니엄 특별전으로 백남준 회고전을 열었다. 이때 백남준은 처음으로 레이저 아트(Laser Art)를 선보였다.  
1900년 일본미술전을 개최한 분리파회관. 조성관 작가 제공
1900년 일본미술전을 개최한 분리파회관. 조성관 작가 제공

수천 년 서양회화에 일본회화를 결합하다

백남준은 1960년대 후반 뉴욕에서 여러 가지 전위예술을 실험했다. 그중 하나가 음악에 섹스를 결합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음악에도 프로이트가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를 만나게 된다. 오스트리아 빈 의과대학을 졸업한 프로이트는 프랑스 파리로 가 최면치료법을 배운다. 19세기 후반 정신과 의사에게 첨단 치료법은 최면치료술이었다.

프로이트는 지적 호기심에 충만한 사람이었다. 빈 중심가 베르크가(街) 19번지 집에서 그는 고독과 고립 속에서 정신질환의 비밀을 파고들었다. 인간의 정신세계는 무엇이 지배하고, 어떤 사람에게 정신질환이 나타나는가.  

그는 환자를 보는 틈틈이 문학과 고고학을 파고들었다. 세계 각지에서 만들어진 조상(彫像)들을 수집했다. 다른 문명권에서 만들어진 조상들을 뚫어지게 관찰하며 공통점을 찾으려 했다. 문학에서 프로이트를 매료한 인물은 셰익스피어, 도스토옙스키, 발자크였다. 그는 의문 부호를 던졌다. 왜 시대와 공간이 다른 작가의 작품 속에 공통점이 나타나는가. 프로이트는 문학의 프리즘으로 정신의 심연을 비췄다. 그는 캄캄한 해저에 바위처럼 웅크리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에 다다랐다. 그리고 세상이 바뀌었다.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는 구스타브 클림트(1856~1918)이다. 클림트는 20대 후반에 빈 화단(畵壇)에서 큰상을 잇달아 받으며 떠오르는 스타가 된다. 하지만 파리여행을 다녀온 뒤 고민에 빠진다. 빈 미술계가 과거에 함몰되어 시대에 뒤처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클림트는 과거 양식에서 벗어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예술운동을 조직하기로 한다. 그게 분리파 운동이다. 화단의 기득권 세력이 그를 비난했다.

오가타 코린의 '홍백매도병풍'. 모아미술관 소장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오가타 코린의 '홍백매도병풍'. 모아미술관 소장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분리파의 리더로서 동양 미술을 받아들인다. 자포니즘과 시누아즈리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1900년에 분리파회관에서 일본 회화전을 열었다. 중국 회화책과 일본 회화책을 읽었다. 특히 그를 매료시킨 것은 프랑스 인상파에 영향을 미친 일본 회화였다. 일본 화가들 중에서 그는 에도 시대의 화가 오가타 코린(尾形光琳 1658~1716)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대표작 '키스'와 '다나에'를 오가타의 그림들을 비교해보면 '악!' 소리가 난다. 클림트가 일본 회화를 받아들여 혁신을 도모하는 동안 빈 주류 화단은 역사주의 화풍을 고집했고, 그러다 역사의 조류에 떠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양 미술에 동양 미술을 받아들여 독창적인 회화세계를 만들어낸 클림트, 예술에 과학을 융합해 미디어 아트라는 새로운 미술사조를 창조한 백남준. 코로나 시대를 사는 한국인은 지금 고대 그리스 철학자를 대중음악과 결합한 나훈아 현상을 만나는 중이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뉴스1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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