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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적이지만 엉뚱했던 소년…'초일류' 삼성 만들었다

[이건희 별세] 학창시절 말수 적고 책·영화에 몰두
"독특한 시각과 통찰력…사람 보는 안목도 남달라"

(서울=뉴스1) 문창석 기자 | 2020-10-25 16:26 송고 | 2020-10-25 18:23 최종수정
 환하게 웃고 있는 이건희 회장의 유년 모습. (삼성전자 제공)2020.10.25/뉴스1

1942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외로운 아이였다. 출생 당시 선친인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한창 사업을 일으켜 운영하던 때였고, 이 회장은 젖을 떼자마자 어머니의 품을 떠나 경남 의령의 할머니 손에서 세 살까지 자랐다. 선친의 사업 확장에 따라 여섯살이 돼서야 서울로 이사해 온 가족이 모여살게 됐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피난살이를 다녔고, 초등학교도 일본 생활을 포함해 다섯 번이나 옮겨다녔다.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는 큰형(이맹희 전 CJ그룹 명예회장)·작은형(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과 함께 자취했지만, 각각 나이 차이가 11세·9세로 커서 어울리기 어려웠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3년 동안 이 회장은 책과 영화에 빠져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환경 때문인지 이 회장은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은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혼자 사색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이 회장은 1989년 월간조선과 가진 인터뷰에서 유년 시절을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다. "나면서부터 떨어져 사는 게 버릇이 돼서 성격이 내성적이 됐고, 친구도 없고, 술도 못 먹으니 혼자 있게 됐고, 그러니까 혼자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생각을 해도 아주 깊이 하게 됐다. 가장 감성이 민감한 때에 일본에 머물면서 민족차별, 분노, 외로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이 모든 걸 다 느꼈다."

 이건희 회장 유년 모습. (삼성전자 제공)2020.10.25/뉴스1

잦은 전학과 내성적인 성격으로 이 회장의 학창시절에 대해선 크게 알려진 바가 없지만 고(故)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의 말을 통해 띄엄띄엄 알 수 있다. 유년 시절 경북 영주에서 우등생이었던 홍 전 부의장은 서울로 상경해 서울사대부고에 입학했고, 일본에서 귀국한 이 회장과 만나 60년 지기가 됐다.

홍 전 부의장은 이 회장이 학창 시절 늘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2001년 신동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고등학생 이건희에 대해 "그때도 지금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 없었다. 친구들이 말을 걸면 돌아오는 답은 '응' '아니'뿐이었다. 동작도 느릿느릿했고 한번도 놀라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너는 천둥벼락이 내리쳐 다른 놈들은 다 기절해도 터덜터덜 집에 가서 다음날 아침에나 기절할 놈'이라고 놀려줬다"고 회상했다.

오히려 그는 '엉뚱하고 싱거운 친구'였다고 설명했다. 홍 전 부의장은 1997년에 쓴 한 에세이에서 학창시절 이 회장에 대해 이런 에피소드를 밝히기도 했다. "방과 후 그가 자기 집에 놀러가자고 했다. 앞장서 가던 그가 '배고프다'면서 끌고 간 곳은 군용 천막 안의 즉석 도넛 가게. 시골 촌놈인 내 눈에도 완벽하게 비위생적인 곳이지만 그는 털쩍 주저앉아 잘도 먹어 치웠다. 그의 아버지 함자는 물론, 얼마나 엄청난 부자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속으로 '녀석, 가정 형편이 우리 집 수준밖에 안되는 모양'이라고 단정했다."

 이건희 회장 유년 모습. (삼성전자 제공)2020.10.25/뉴스1

하지만 고등학생 수준을 뛰어넘는 독특한 시각과 통찰력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홍 전 부의장의 2001년 인터뷰에서 "건희는 어쩌다 입을 열면 싱거운 소리를 잘했는데, 더러는 충격적일 만큼 독특한 시각과 발상을 내비쳤다. 그런 말을 앞뒤 설명도 없이 '본체'만 툭툭 던졌는데, 책깨나 팠다고 거들먹거리던 나도 한참을 생각해봐야 겨우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미국에서 차관을 많이 들여와야 미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우리 안보가 튼튼해진다"느니 "공장을 지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게 어떤 웅변보다 애국하는 길이다"는 등 그때 고교생으로선 상상도 못했던 얘기를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다고 회상했다.

시대를 내다본 에피소드는 또 있다. 하루는 이 회장이 홍 전 부의장에게 일본의 소학교 교과서를 건네면서 '일본어 좀 배워놔라. 너 정도면 두어 달만 해도 웬만큼 할 거다'고 말했다. 당시 고교생들에겐 반일 감정이 팽배했던 시절이라 '그걸 뭐하러 배우냐'고 묻자, 심드렁하게 "일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봐야 그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게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홍 전 부의장은 "솔직히 그때는 건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고등학교 1학년짜리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왔는지 놀랍다"고 말했다.

1980년 고(故) 이병철 선대 회장(왼쪽)과 함께 있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삼성전자 제공)2020.10.25/뉴스1 © News1 김진 기자

특히 이 회장에 대해 사람을 보는 안목이 남달랐다고 소개했다. 홍 전 부의장은 학과 공부에는 별 뜻이 없던 이 회장에게 무슨 궁리를 하며 사느냐고 묻자 "사람 공부를 제일 많이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 무렵 삼성의 한 임원이 내쳐지자 이 회장은 아버지에게 그 임원의 복권을 건의했고 결국 다시 불러들였다. 이병철 회장도 고등학생이던 이 회장의 사람 보는 눈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홍 전 부의장은 2003년 한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그분(복권된 임원)은 나중에 삼성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전했다.

사안을 보는 시각이 남달랐다는 에피소드는 또 있다. 1960년대 중반 일본 와세다대에 유학 중이던 이 회장은 방학을 맞아 귀국해 대학생이던 홍 전 부의장을 만났다. 이 회장이 운전하던 차가 제2한강교(양화대교)를 지나자 홍 전 부의장은 "봐라, 이게 우리나라 기술로 만든 다리"라고 자랑했다. 다리를 본 이 회장은 "이 생각없는 놈아, 통일이 되면 한강으로 화물선이 다닐 것 아이가. 그러려면 다리 가운데 있는 교각은 간격을 더 넓게 만들었어야지!"라고 말했다. 홍 전 부의장은 "실로 괴이한 두뇌의 소유자였다"고 전했다.

이 회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연세대 상학과(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외국으로 나가라'는 선친의 지시에 자퇴하고 일본 와세다대와 미국 조지워싱턴대로 떠났다. 이후 유학을 마치고 1966년 동양방송에 입사한 뒤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 1979년 삼성 부회장을 거쳐 1987년 회장이 돼 현재 삼성그룹의 초석을 닦았다.

© News1 이지원 디자이너
© News1 이지원 디자이너



themo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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