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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영의 뼈 때리는 언니] 나란히 걷는 언니들의 밤

(서울=뉴스1) 안은영 작가 | 2020-10-16 10:32 송고 | 2020-10-16 11:03 최종수정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복궁 경회루에서 '2020년 제6회 궁중문화축전'의 일환으로 '경회루 판타지-궁중연화'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올해 처음으로 가을에 개최되는 제6회 궁중문화축전이 지난 10일 개막해 오는 11월8일까지 열린다.  2020.10.14/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오래될수록 좋은 첫 번째는 엄마의 약된장. 이거 한 숟갈이면 배앓이부터 해장은 물론 손님상까지 '결정적 평온'을 얻을 수 있어. 두 번째는 선물 받은 금붙이. 난 최영 장군하곤 태생적으로 달라. 금은 금이요, 돌은 돌이지. 요새 금값 알지? 믿거나말거나 '애끼면' 돈 된다더라.

세 번째는 친구. 새로 사귄 친구도 물론 좋지만 오랜 친구는 굳이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 좋아. 가끔 너무너무 말하기 싫은 날이 있잖아. 하필 난데없이 온몸에 외로움이 스며서 퍽 당황스러운, 누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구구절절 사연을 읊긴 싫은 그런 날.

오랜 후배와 저녁을 먹었어. 아낀답시고 쓴 소리 마구 해대다가 '미안하다 사랑한다' 풍으로 빠르게 사과하기를 수십 년째야. 다른 사람이 자기 인생에 간섭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면서 다른 사람 인생에 훈수 두는 걸 좋아하는 중구난방의 바보들이지.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르고 오랜 시간을 지켜본 만큼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인정하는 편이야. 이런 관계들엔 공통점이 있어. 서로를 위한 마음의 자리가 있지. 서로가 인생의 화양연화에서 작두를 탈 때 맨 뒤에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다 우레 같은 박수를 보내주는 자리. 이 시대를 연대하며 살아가는 4050 언니들의 자리이기도 해.

맵고 뜨거운 안주에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고 나선 길은 밤하늘 아래 가을이 한창이더라. 한때 맡은 바 최고의 역량을 뽐냈던 후배는 위풍당당 갑질의 손맛을 내려놓고 제조업에 뛰어들었어. 기댈 언덕 하나 없이 거북이걸음 중이지만 업계에서 제품력과 성실성을 빠르게 인정받는 중이야.

탁 트인 밤거리에 흥이 돋은 걸까. 갑자기 후배가 목청을 쭉 빼더니 "안녕하세요 고객님, OO에 좋은 OOO입니다. 보고 가세요~"라는 거야. "나 있잖아, 매대에 서서 하루에도 수십 번을 외친다? 열에 아홉은 성가셔하고 한 명이 반응하는데 그 때마다 울컥해, 고마워서."

느티나무 잎이 노랗게 물드는 광화문 네 거리를 걷고 또 걸었어. 은행나무 열매 익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고요한 밤길이었단다. 한때 부러울 것 없이 잘나가던 후배의 드라마틱한 좌회전이 걱정되느냐고? 전혀! 크건 작건 자기 인생 안에서 뭔가를 이뤄본 언니들은 주변을 180도 환기해버리는 '오라'(aura)가 있지.

우리는 서로의 역사를 알아. 앞으로의 고전도 짐작돼. 지나간 영광은 개나 주라지. 비감한 혼잣말을 못들은 척 침묵하면서 끝없는 응원을 보내는 가을밤. 오랜만에 둘이 걸었어.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벗의 눈물은 모른 척하고서. / 안은영 작가. 기자에서 전업작가로 전향해 여기저기 뼈때리며 다니는 프로훈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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