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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100℃] 한반도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재일동포 이야기

남북 야구 부흥 모두에 힘썼던 그라운드의 '이방인'들

(서울=뉴스1) 김정근 기자 | 2020-10-17 10:00 송고 | 2020-10-17 11:40 최종수정
편집자주 [북한 100℃]는 대중문화·스포츠·과학·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북한과의 접점을 찾는 코너입니다. 뉴스1 북한팀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관심사와 관점을 가감 없이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 장훈(왼쪽)과 선동열 전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오른쪽). © 뉴스1

전후 3년 한국은 야구 부활을 위한 밑거름이 필요했다. 이때 손을 내밀어준 이들이 바로 재일동포였다. 일본의 선진야구를 한국에 구김살 없이 전해준 그들 덕에 한국 야구는 빠르게 성장했다.

사실 일본 야구계에서 재일동포의 명성은 대단하다.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인 장훈의 '3085 안타'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일본서 가장 위대한 투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가네다 마사이치(김경홍)도 수많은 최고 기록을 갖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통산 5526.2이닝, 통산 400승, 통산 4490 탈삼진, 14년 연속 20승 등이다.

한민족에겐 정말로 '야구 DNA'가 있는 걸까. 지금도 우리는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빛나는 활약을 펼치는 선수들을 보며 열광하고 있다.

프로야구 리그 역사가 40년가량 앞선 일본은 한국과의 결전에서 곧잘 '40년 차이'를 언급한다. 그런데도 우리가 일본 야구에 대항할 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엔 야구와 모국을 사랑했던 재일동포들이 있었다.

그런데 재일동포들이 지원한 건 남한만이 아니었다. 북한 야구 부흥에도 힘썼던 그들의 역사를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2015)'를 통해 되짚어본다.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의 공식 포스터. © 뉴스1

◇한국 야구 발전의 밑거름…재일동포 학생 야구단

1956년 8월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한국을 찾았다. 해외 선진야구에 대한 경험을 통해 국내 야구 부흥을 꿈꿨던 정부는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을 초청 대상으로 정했다.

"야구 종주국 미국은 너무 멀었고 가까운 일본은 너무 미웠다." 김명준 감독의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평가하는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시작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방문 초청 경기'는 1956년 시작해 1997년까지 42년간 매년 8월 열렸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은 일본에서 가져온 야구 장비들을 대한야구협회에 기증하거나 마지막 경기를 펼친 팀에게 선물했다. 헬멧도 없이 천막으로 글러브를 만들어 쓰던 한국 야구는 그렇게 조금씩 발전의 물꼬를 튼다.

1982년 한국에 프로야구가 출범하며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초청 경기의 인기는 조금씩 사그라든다. 영화는 그렇게 잊혀간 재일동포 선수들을 다시 찾았고, 흩어져 있던 그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재일동포 2세인 정원덕 전 재일조선인 야구협회장은 재일동포의 야구 사업과 관련된 다양한 일화를 전해준다. 그중 그가 북한 야구 부흥에 나섰던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북한에 야구가 '반짝' 떠올랐던 1990년대

남한과 달리 북한은 애초부터 야구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야구를 자본주의 색채가 짙은 스포츠라며 멀리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런 북한이 야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쿠바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실제 북한은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의 권유에 따라 야구를 도입한다. 1985년 자국 야구협회를 창설한 뒤 1990년 아시아야구연맹(IBA)과 국제야구연맹(IBAF)에도 정식 가입한다.

어쩌면 북한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강호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8강에 진출해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과거의 영광을 야구를 통해 재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가 이미 야구 강국에 올라 명성을 떨쳤던 것도 자극제가 됐을 수 있다.

그렇게 사실상 처음으로 출전한 국제무대인 1992년 바르셀로나에서는 본선 탈락을 면치 못했지만, 북한은 1993년 호주에서 열린 제17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도 출전한다. 다만 이를 끝으로 국제야구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다.

북한 야구 발전을 위해 북한을 33번 방문했던 정원덕 전 협회장은 북한에서 야구가 사라지게 된 이유를 북한의 '가난'에서 찾는다. 영화는 "야구라는 꽃이 피기에 북녘 들판은 너무 차가웠다"라고 회상한다.

◇우리는 그들을 나무랄 수 없었다…'고난의 행군'에 잊힌 야구

야구 발전을 위해 남한이 그랬듯 북한도 재일동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남한의 경우 재일대한민국민단(민단)의 지원이 있었고 북한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의 도움을 받는다.

조총련은 일본 내 조선인 선수들을 모아 야구팀을 만든다. 이렇게 모인 20명의 총련 야구단은 삼지연호를 타고 북한을 오갔다.

총련 야구팀이 북한에 도착해 제일 처음 한 일은 축구장의 잔디를 옮겨 야구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총련 야구팀 소속으로 북한에 다녀온 황철진씨는 "(당시 주민들은) 야구라는 스포츠를 몰랐다"라며 "던지는 방법과 캐치볼부터 가르치는 수준이었다"라고 기억한다.

영화는 "북한이 첫 해외 원정을 나섰던 1991년엔 10개 대학팀을 포함해 32개 팀이 국내 리그전을 할 정도였다"라며 "또한 재일동포들의 정성으로 평양에 신축 야구장 조성 계획도 있었다"라고 과거 북한의 야구 '열풍'을 소개한다.

정원덕 전 협회장은 북한을 찾아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맞춰주고 야구장 건설에도 참여했다. 그는 계획대로만 됐더라면 북한에 '평양 정원덕 야구장'이 생겼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결국 신축 야구장은 지어지지 못했다. 논밭이 모자라고 당장의 먹을 것이 없었던 북한 주민들에게 야구는 사치였다. 재일동포들은 먹을거리 확보를 위해 야구장 그라운드에 보리를 심는 그들을 차마 말릴 수 없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북한은 수해와 대흉작을 맞는다. 5년 뒤 대기근, '고난의 행군' 시기(1996~2000)가 닥치며 북한에서 야구는 잊히게 된다.

북한 내에서 공화국선수권대회 야구경기가 진행되는 모습. (조선중앙TV 갈무리)© 뉴스1

◇북한은 다시 글러브를 쥐고 세계에 나설 수 있을까

북한에 야구가 정착하지 못한 이유에는 경제적 문제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1차적으로는 야구가 북한 주민들에게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잊혔다고 생각한다.

그토록 힘들었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북한 주민이 사랑하는 축구는 살아남았다. 1989년 지어진 능라도 5월1일경기장과 양강도축구경기장은 가난을 이겨내고 여전히 그 위상을 뽐내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시대 들어 북한은 '체육강국' 건설에 열을 올리고 있다. 2013년엔 미국 프로농구 리그의 스타인 데니스 로드먼을 초대해 농구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2011년 이후 잠잠하던 북한 배구도 2017년과 2018년 세계선수권 대회에 다시 등장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 비인기 종목인 야구도 다시 꿈틀대는 듯 하다. 최근 북한은 공화국선수권대회와 만경대상 체육경기대회 등을 통해 야구 경기를 치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3년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내각 철도성 소속 기관차체육단 야구팀이 공화국선수권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다만 그들의 야구가 세계 대회에선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아 수준을 가늠하긴 어렵다.

만약 야구가 북한에서 충분히 사랑을 받을 만큼의 시간이 있었더라면 한민족의 야구 DNA가 북한에서도 꽃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지금은 꽉 막혀 있는 남북관계지만 언젠가는 다시 대화 분위기가 찾아올 것으로 예상된다. 그때가 되면 과거 재일동포가 그랬듯 우리가 북한에 숨겨져 있는 야구 DNA를 세계로 끌어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carrot@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