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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 피해 6분뒤 신고, 하루뒤 극단선택…무죄될뻔 했다

1심 무죄→2심 징역 1년6월→대법 상고기각
항소심 "경찰 수사보고·법정진술, 증거능력 있다"

(서울=뉴스1) 박승주 기자 | 2020-10-02 08:00 송고 | 2020-10-02 15:01 최종수정
© News1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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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동이 불편하고 수면제를 먹은 피해자를 간음한 혐의를 받는 30대 남성에게 유죄가 확정됐다.

1심은 피해자가 진술을 일부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지만, 2심은 이를 다르게 판단하고 유죄로 판단해 실형을 선고했다.

2일 법원에 따르면 박모씨(32)는 지난 2018년 3월20일 채팅 애플리케이션에서 처음 알게 된 피해자 A씨의 집을 찾아가 강간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박씨는 A씨가 다리가 불편하다며 나갈 수 없다고 하자 A씨로부터 주소를 알아낸 뒤 집을 찾아갔다. 박씨는 A씨가 수면제 성분이 든 약을 먹고 눕자 신체를 만졌고, 반항을 억압한 뒤 강간한 혐의를 받았다.

박씨는 "A씨가 아무 말을 안 해서 성관계를 승낙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며 "손으로 A씨의 양손을 잡고 몸을 눌러 간음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는 '전문증거'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전문증거란 피해자의 법정 진술이 아닌 진술조서나 타인의 증언을 말한다. A씨는 사건 다음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전문증거의 증거능력이 쟁점이 됐다.

형사소송법 314조는 재판에 진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사망 등의 이유로 진술할 수 없는 때, 해당 사람이 신빙성이 있는 상태에서 작성·진술한 서류 등을 증거로 채택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1심은 "피해자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며 △경찰 내사보고 중 피해자 진술 △경찰 수사보고 중 피해자 진술 △피해자에 대한 경찰 진술조서가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구체적으로 A씨가 수면제를 먹고 자는 사이에 원치 않는 성관계를 당했다고 진술했다가, 이후 박씨가 손으로 자신을 누르면서 억지로 성관계를 했다는 취지로 진술한 점을 지적했다.

또 1심은 피해자가 수면제를 먹은 상태였고, 우울증을 앓으면서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던 상황에 비춰 진술 중 일부가 과장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1심은 "A씨 진술에 의하더라도 유형력의 행사가 항거가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정도인지 분명하지 않다"며 "박씨는 범행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진술했는데 (A씨 사망으로 인해) 진술 내용의 진위를 A씨에게 확인하고 이를 다시 박씨가 반박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고 밝혔다.

판결에 불복한 검찰은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있고 박씨에 대한 강간죄를 인정할 수 있는데, 수사보고나 진술조서 등이 증거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잘못됐다"며 항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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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소심은 1심 판결을 뒤집었다. 피해자 진술 자체의 신빙성에 문제가 없으며 피해자에 대한 '유형력' 행사도 있다고 판단했다.

우선 2심 재판부는 A씨가 최초로 피해진술을 한 시점에 주목했다. A씨는 사건이 일어나고 불과 6분 뒤 112에 신고해 피해를 진술했는데, 자신의 진술을 조작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봤다.

A씨가 극단선택을 하기 전까지 박씨에게 피해사실과 관련해 연락하거나 금전적인 요구를 하지 않은 점을 볼 때 성폭행으로 무고할 동기도 없어 보인다고 판단됐다.

특히 1심과 달리 A씨가 112에 신고할 당시, 현장에서 경찰에게 진술할 당시, 의사 진료를 받을 당시에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아니라고 봤다. 피해자 진술이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이뤄졌단 설명이다.

재판부는 "A씨는 경찰에게 피해진술을 할 당시 울거나 고함을 지르는 등 특이한 행동을 하지 않았고, 졸리는 상태인데도 언어구사가 어눌하지 않았으며 피해사실을 호소했다"고 밝혔다.

이어 "A씨가 사건 직전 먹은 약은 우울증 치료제이거나 수면제인데 섬망환각, 감정기복, 분노조절 장애 증세를 유발하는 약물이 아니라 오히려 감소시킬 작용을 하는 약물"이라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피해진술 당시 A씨에 대해 심리 상태 변화의 세부적인 면까지 확인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증거능력 인정에 장애가 된다고 볼 근거가 없다"며 수사보고, 피해자에 대한 경찰 작성 진술조서 등에 증거능력이 있다고 봤다.

A씨에 대한 박씨의 유형력 행사도 인정됐다. 구체적으로 △박씨는 A씨가 다리가 불편해 제대로 걷지 못하고 수면제를 먹은 것을 알고 있었던 점 △A씨는 박씨가 집에 오기 전부터 박씨에게 '건들지 말라'고 한 점 △정상적인 보행을 할 수 없는 A씨로서는 사력을 다해 반항할 수 없었던 점 △박씨가 '하지말라'며 손으로 막으려는 A씨의 손을 잡고 힘으로 눌렀던 점 등이 판단근거가 됐다.

양형과 관련해 재판부는 "A씨는 박씨에게 저항할 수 없어 성폭행 당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고, 그로부터 48시간 내에 자신의 존재와 삶의 가치를 부정하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인다"며 "비록 A씨가 유서에 적지는 않았지만 박씨의 범행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박씨는 A씨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에 마음 아파하고 있다"며 "강간 범행의 고의를 부인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A씨 의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이 사건 범행을 저지른 측면도 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1심 판결을 파기하고 박씨에게 징역 1년6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했다.

박씨는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지만 대법원에서도 유죄 판단은 바뀌지 않았다.


parksj@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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