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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클레망소가 아니었더라면…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2020-09-17 12:00 송고 | 2020-09-17 15:20 최종수정
조르주 클레망소 / 사진출처=Nadar
조르주 클레망소 / 사진출처=Nadar

식자층이라면 에밀 졸라의 기고문 '나는 고발한다'(J'Accuse…!)를 한 번쯤 읽어봤을 것이다.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문장 자체가 명문(名文)이다. 글쓰기를 업(業)으로 삼은 사람들은 머리맡의 자리끼처럼 두고 읽어볼 만하다.

'공화국의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가 달린 이 기고문은 1898년 1월13일 자 파리의 일간지 '로로르'(L'Aurore) 신문에 실렸다. 발행 부수 3만부이던 이 신문은 이날 30만 부를 찍었다.

독일에 군사기밀을 넘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남미 기아나에 유배 중인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1859~1935)가 무죄(無罪)라는 주장이었다. 프랑스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권력과 군부와 가톨릭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에밀 졸라는 서훈이 박탈되었고 졸속 재판을 받고 영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재심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해지면서 진실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4년간 권력이 축조한 거짓의 성채(城砦)가 쿠르르릉 무너졌다.

'드레퓌스 간첩 사건'은 권력과 군부와 가톨릭이 사법부·언론과 반유대주의로 스크럼을 짜고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를 희생양으로 짓밟은 것이다. 1900년 12월 드레퓌스 대위 사면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그 후 드레퓌스는 프랑스 육군으로 복귀했고, 에밀 졸라도 복권되었다. 드레퓌스는 주어진 삶을 살아내고 1935년, 7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는 현재 몽파르나스 공원묘지의 가족묘에 잠들어 있다.

몽파르나스 묘지의 드레퓌스 가족묘. 조성관 작가 제공
졸라는 왜 클레망소를 선택했을까?

몽마르트르 골목길 142. 로로르 신문사가 있던 곳이다. 신문사는 오래전에 문을 닫았다. 그런데도 나는 '파리가 사랑한 천재들'을 취재하면서 신문사가 있던 곳을 꼭 가보고 싶었다. 신문사가 있던 건물 옆길은 '크루아상 길'. 이 골목길에는 '라 프랑스' '파리 수와' '르 탕' '르 주르날' 등의 신문사들이 있었다. 몽마르트르 142 주변은 주요 신문사들이 몰려 있는 서울 광화문 같은 곳이었다.  

로로르 신문사 자리에는 역사유적을 알리는 푯말과 함께 명판(플라크)이 붙어 있다. 반드시 필요한 핵심적인 사실만을 명기했다.

<1898년 1월12일 이 건물에 로로르 신문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에밀 졸라는 조르주 클레망소 편집국장에게 펠릭스 포르 대통령에게 띄우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결백함을 증명하는 증거들이 있었다. '진실은 이미 굴러가고 있고, 아무것도 이를 멈추진 못할 것이다.' 원고는 다음날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1902년의 에밀 졸라 / 사진출처=위키피디아
1902년의 에밀 졸라 /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이 글의 주인공은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가 아닌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1841~1929)다. 졸라는 왜 '르 피가로'와 같은 신문을 젖혀두고 '로로르'를 택했을까. 전적으로 클레망소 때문이었다. 파리의 신문들이 권력에 눈치를 보며 진실에 눈을 감고 있을 때 졸라는 클레망소가 사장 겸 편집국장으로 있는 로로르 신문에 원고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클레망소라면 권력의 눈치를 안 보고 진실의 편에 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졸라는 명예와 부(富)를 다 가진 사람이었다.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었지만 졸라는 작가로서 도저히 양심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클레망소는 잘못하면 신문사가 망할 수도 있었지만 언론인의 직분에 충실하기로 한다. 두 사람은 진실을 밝히는 데 인생을 걸었다.  
1898년 1월13일자 로로르 신문 1면에 실린 에밀 졸라의 기고문 / 사진출처=위키피디아
1898년 1월13일자 로로르 신문 1면에 실린 에밀 졸라의 기고문 / 사진출처=위키피디아
클레망소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간결한 제목과 함께 1면 전면에 기고문을 실었다. 클레망소의 결단으로 진실의 수레바퀴가 어둠에서 나와 굴러가기 시작했다.    

졸라는 왜 클레망소를 신뢰하게 되었을까. 프랑스 현대사에서 클레망소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세계인문여행> 46회에 쓴 것처럼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전시 공간 '그랑 팔레'와 연결된 지하철역이 '클레망소 역'이다. 역에서 나오면 광장이 있는데, 그 광장이 클레망소 광장이다.    

클레망소는 평생 세 가지 직업을 가졌다. 의사, 저널리스트, 정치가. 그의 아버지 역시 의사이면서 정치 활동가였고, 어머니는 신교인 위그노(Huguenot) 교도였다. 가톨릭에 비판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라며 반골 의식이 키워졌다.

낭트에서 고교를 마친 그는 파리로 올라와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의대생 시절 그는 신문을 창간해 글을 쓰며 정치 활동에 관심을 보였다. 불법 시위 주도로 수감 생활을 하기도 했다. 1865년 의사 면허증을 딴 뒤에는 의사로 활동하면서 문학 잡지를 창간해 나폴레옹 3세의 독재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 이 점에서 그는 문호 빅토르 위고와 같은 정치 노선을 걸었다.  

실연을 당한 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간다. 뉴욕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남는 시간은 글쓰기와 정치 활동에 전념했다. 미국 생활에서 그는 미국 민주주의에 감동했고 그럴수록 나폴레옹 3세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된다. 프랑스 망명자클럽에 참여했고 프랑스 신문에 나폴레옹 3세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그가 미국에서 귀국한 것은 1870년 보불전쟁으로 제2제정이 붕괴한 직후였다. 고향에서 의사로 일하던 그는 파리 18구 구청장에 임명되면서 현실 정치에 뛰어든다. 서른 살에 첫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 연거푸 두 번 당선되면서 정치인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정치인으로서 그의 일관된 입장은 식민지 정책 반대와 보불전쟁으로 독일에 빼앗긴 '알자스-로렌 지방 회복'이었다. 두 가지 모두 집권 세력에게는 부담스러운 이슈였다. 급진파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지인들이 연루된 파나마 운하 스캔들의 여파로 1893년 총선에서 낙선한다.

옛 로로르 신문사 건물 외벽에 붙은 기념판. 조성관 작가 제공
이후 10년간 그는 현실 정치에서 물러나 언론인으로 산다. 로로르 신문을 창간해 사장 겸 편집국장으로 활동하던 중에 드레퓌스 사건이 터졌다. 그는 1898년 1월13일 자에 졸라의 공개편지를 '나는 고발한다…'로 1면에 배치한다. 이후 그는 편집국장으로서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글을 665회를 썼다. 거의 매일 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에밀 졸라 역시 이 신문에 글을 계속 기고한다.

드레퓌스의 사면과 무죄 판결은 에밀 졸라 혼자 이뤄낸 것이 아니다. 칠흑의 밤하늘에 진실의 횃불을 든 것은 에밀 졸라였지만 그 횃불이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게 한 것은 반골 기질로 똘똘 뭉친 클레망소였다.
 
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어

그는 1906년 첫 번째 총리로 지명되어 1909년까지 총리직을 수행했다. 1차 세계대전 와중인 1917년 다시 총리 겸 육군 장관으로 지명되어 1차 세계대전을 프랑스 승리로 이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이 부분이다. 그가 총리에 재임명되었을 때 전세는 프랑스에 불리했다. 후방인 파리에서는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반역자들과 패배주의자들이 목소리가 만연했다.

클레망소 총리는 국가 반역자들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즉결재판에 넘겨 총살형에 처했다. 그러자 전방의 프랑스군 사기는 충천했고, 마침내 독일에 승리했다.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방을 되찾았다. 1차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서 그는 파리강화회의 프랑스 전권대사로 참여해 전후 질서를 재편하는 데 역할을 한다.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 그는 본업인 문필가로 돌아갔다. '데모스테네스'(1926), '내 사색의 황혼에'(1927) '승리의 명예와 비참'(1930)을 썼다.          
로댕의 작품 '조르루 클레망소'. 조성관 작가 제공

대중은 반골 기질의 클레망소를 좋아했다. 모네, 마네, 로댕과 같은 당대의 예술가들이 예술적 심미안이 뛰어난 문필가 클레망소와 교유했고, 그를 모델로 작품을 만들었다. 에두아르 마네는 초상화를 그렸고, 오귀스트 로댕은 두상을 제작했다. 센 강변의 오랑주리미술관에는 '수련의 방'이 있다.

모네의 '수련의 방' 입구에는 클레망소 두상이 놓여 있다. 클레망소는 자신의 책에서 모네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모네의 작품에는 어떤 종류의 시라든가 이론이라는 것이 없다. 그는 자신이 본 것들에 진실이 있으리라고 믿었으며 지칠 줄 모르고 그것들을 재현했다. 그 이상은 없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시 파리 샹젤리제 거리로 가본다. 전시공간이 그랑 팔레와 프티 팔레와 연결되는 지하철역이 클레망소역이다. 역사를 빠져나오면 너른 광장이 나타난다. 클레망소 광장이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 드골 동상은 클레망소 광장에 우뚝 서 있다.

올해는 진실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프랑스의 양심을 세상에 보여준 지 120년이 되는 해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뉴스1의 편집 빙향과 다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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