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본문 바로가기 회사정보 바로가기

윤봉길, 日향해 두 개의 '수통형 폭탄' 준비했었다

"일본과 같은색 칠해진 조선…세계에 알려 독립운동 밀알"
[광복 75주년] "이름도 못 남긴 '무명의 독립군' 기억해야"

(서울=뉴스1) 심언기 기자 | 2020-08-14 07:01 송고 | 2020-08-14 09:33 최종수정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제87주기 추모식에서 최혜원 윤봉길함 무장관 등 승조원들이 헌화를 마친 후 거수경례하고 있다. 2019.12.19/뉴스1 © News1 이재명 기자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제87주기 추모식에서 최혜원 윤봉길함 무장관 등 승조원들이 헌화를 마친 후 거수경례하고 있다. 2019.12.19/뉴스1 © News1 이재명 기자

"물론 한두 명의 상급 군인을 죽여서 독립이 쉽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의 폭탄 투척이 독립에 직접적인 효과는 없지만, 단지 조선의 각성을 촉구하고 더 나아가 세계의 사람들에게 조선의 존재를 명료하게 알리기 위해서이다.

지금 이대로는 타국을 봐도 조선은 일본과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어 세계 사람은 조선의 존재를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때 조선이라는 관념을 세계 사람들의 머리에 새겨두는 것도 독립운동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29일 중국 상해 홍커우공원 의거 후 일본군에 체포됐다.

경성지방검찰청 <신문조서>에 따르면 그는 '독립운동이라는 측면에서 별로 효과가 없는 상해 의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고 한다. 일왕 생일인 천장절 및 상하이 점령 전승축하식에서 윤 의사의 의거로 일본 침략군 사령관 시라카와가 사망하는 등 7명이 죽거나 다쳤다.

올해는 윤 의사의 상해 의거 88주년이자 광복 75주년이다. 윤 의사가 상해 의거에서 사용한 것은 흔히 '도시락 폭탄'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수통형 폭탄'이다. 두 개의 폭탄을 준비해갔지만 한 개만 겨우 투척할 수 있었다. 신문조서에 따르면 윤 의사는 "상황을 보니 도저히 두 개를 던질 여유가 없었다"며 "물통 모양 폭탄에 끈이 있어서 던지기 쉽다고 생각했다"고 의거 당시를 회상했다.
윤봉길 의사의 장손녀인 윤주경 미래통합당 의원은 지난 1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광복 75주년 독립운동 정신의 오늘과 내일' 토론회에서 "'조국의 광복'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독립운동을 한 선열들 가운데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분들도 많다"며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에도 지속적인 독립운동이 전개돼 광복을 맞이했기에, 내가 이렇게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당당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고 옷깃을 여몄다.

장석흥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는 "1000여 차례에 걸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독립군은 대부분 패했고, 그 과정에서 수천여 명의 독립군이 전사하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며 "무명의 독립군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교수는 "50여 년 동안 500만명이 전개한 한국 독립운동은 남녀노소·신분·계급·종교·이념 등을 초월하면서 한국인이 사는 곳이면 국내는 물론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유럽 등 세계 어디서든지 일어났다"면서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세상은 힘으로 지배되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우리는 민족의 자유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을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독립운동 과정에서의 암울한 행적을 이제는 직시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1980년대 불붙은 독립운동사 조명작업이 부끄러운 과거는 숨기기 급급했고 밝은 면 부각에만 집중됐었다는 자성의 목소리다. 독립운동사가 국수주의로 흐르지 않고 국제주의·세계주의에 발맞춘 역사로 기록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독립운동의 이면사나 흑역사도 당대사의 일부로서 함께 논의해야 한다"며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나 패배한 역사, 부끄러운 부분은 금기시됐다. 그러다보니 독립운동사는 특정 분야에 편향적이었고, 실제와 괴리된 피상적 사실이 과장적으로 '국민교육'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고 꼬집었다.

박 교수는 독립운동 전반의 큰 틀을 살피지 않고 지엽적 주제로 독립운동을 폄훼하는(깎아내리는) 일부 학파에 쓴소리도 내뱉었다. 그는 "문화사와 경제사 분야의 피상적이고 계량적 접근은 주객과 가치가 전도된 결론에 도달할 우려가 있다"며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주장하던 학자들이 한순간 '식민지근대화론'자로 돌변한 것은 학문적 견해나 사상의 전향이 아니라 본질에서 벗어난 연구가 범하는 오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가보훈처가 1992년부터 2018년까지 매달 선정해 발표한 이달의 독립운동가 293명의 사진을 태극기를 배경으로 안드레아 모자이크 프로그램을 이용해 만들었다. 2019.1.1/뉴스1 © News1 박정호 기자
국가보훈처가 1992년부터 2018년까지 매달 선정해 발표한 이달의 독립운동가 293명의 사진을 태극기를 배경으로 안드레아 모자이크 프로그램을 이용해 만들었다. 2019.1.1/뉴스1 © News1 박정호 기자

독립운동에 앞장선 순국선열의 피땀과 희생은 일제 패망 이후 우리 광복의 밑거름이 됐다. 변방 소국에 불과했던 대한제국은 일제로부터 해방되더라도 미국·영국·소련·중국 등 열강들에게 '관리'될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게 당시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이었다. 전문가들은 독립운동가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외교 분투 덕분에 '카이로회의'에서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미국과 영국은 1943년 승전시 한반도를 국제공동관리하기로 밀약했다. 이에 임시정부 인사들은 장개석 중국 주석 등에 전방위적 외교전에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미·영·중 3국은 1943년 12월1일 '한국을 자유독립국'으로 명시한 카이로 선언을 발표했고, 소련도 동의했다. 미국과 영국, 중국, 러시아 등 열강의 치열한 알력다툼의 결과물이지만, 국제공동관리 체제를 피하기 위한 임시정부의 외교적 노력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한시준 초빙교수는 "수많은 민족들이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연합국이 전후에 독립을 보장한 것은 오로지 한국뿐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며 "해방과 독립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남이 갖다준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윤주경 의원은 "독립운동은 국제정세에 어두워 현실을 무시한 몽상이 아니라, 명확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반드시 만들어내야 하는 이상을 실현하려 한 것"이라며 "현실을 바탕으로 한 이상의 실현이야말로 독립운동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의 역사는 한두 사람의 노고나 의지만으로 완성된 역사가 아니다. 각기 다른 생각과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조국의 독립'이라는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함께 만들어 낸 역사"라며 "50여 년 동안 4세대에 걸쳐 만들어낸 역사이기에, 앞서간 사람들이 있었고 뒤따라간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부귀영화를 걷어찬 우당 이회영 가문이 가산을 털어내 설립에 기여, 만주·간도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선 신흥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비밀결사조직인 '신흥학우단'이 외친 선열의 시범은 다음과 같다.

나는 국토를 찾고자 이 몸을 바쳤노라.
나는 겨레를 살리려 생명을 바쳤노라.
나는 조국을 광복하고자 세사를 잊었노라.
나는 뒤의 일을 겨레에 맡기노라.
너는 나를 따라 국가와 겨레를 지키라.


eonki@news1.kr

이런 일&저런 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