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본문 바로가기 회사정보 바로가기

[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역사는 흙 한 줌에서 시작되었다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2020-08-13 12:00 송고 | 2020-08-14 11:16 최종수정
영화 '새벽의 7인' 포스터

우리는 얼마 전 대한민국의 영웅과 작별을 했다. 백선엽 대장(1920~2020). 나는 백선엽 장군을 '캐나다 6‧25전쟁 참전군인 한국방문 축하 모임'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다. 거동이 불편한 노병들과 그 가족들이 백선엽 장군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기억에 선명하다. 한국인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비로소 자유민주주의공화국의 국민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한국인이 자유와 사유재산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역설적으로 6‧25전쟁이었다.

백선엽 대장의 장례 관련 기사들을 읽으면서 내가 한참을 생각한 대목은 그의 유언이었다.

"전사한 전우들과 함께하고 싶다."

장군은 먼저 간 전우들을 잊지 못했었구나! 최전선에서 목숨 걸고 싸워보지 않은 사람은 이 말뜻을 이해하기 힘들다.

장례위원회는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다부동, 문산 파평산, 파주 봉일천, 화천 소토고미 등 8대 격전지의 흙을 퍼서 유해와 함께 안장했다. 다부동 전투에 참전했던 노병 네 사람이 다부동의 흙을 관 위에 뿌리는 광경을 TV로 보면서 가슴이 먹먹했다.

부산 UN기념공원에는 유엔군 2309명이 영면 중이다. 오래전 이곳에서 특별한 봉안식이 치러진 적이 있다. 호주에서 별세한 참전용사의 유해를 봉송해 안장한 것이다. 그 참전 용사의 유언은 '부산에 묻혀 있는 전우들 곁에 묻어 달라'였다. 호주군은 6‧25전쟁에서 346명이 전사했다.  

흙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생을 가리켜,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한다. 문명권에 관계없이 인간은 사람의 영혼은 흙속에 스며 있다고 믿는다. 흙은 죽음과 관련된 은유로 자주 쓰인다. '눈에 흙이 들어가다'는 죽음을 은유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는 안된다'라는 관용어구도 있다.

얼핏 다부동의 흙이 다른 곳의 흙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라고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다. 흙은 지역마다 다르다. 그래서 흙에는 고유의 빛깔이 있다. 또한 특유의 냄새가 난다. 그것을 흙내라고 한다. 비가 내리면 빗줄기를 타고 흙내가 올라온다. 빗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흙내에서 자연의 흐름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지금은 거의 불리지 않지만 나는 청소년기에 광복절 노래를 자주 부르곤 했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노랫말은 한국의 국보(國寶)로 불린 위당 정인보(1893~1950)가 썼다. 그 노랫말에 윤용하가 곡을 붙였다.

평화와 풍요의 시대에 태어난 한국인은 이 노래를 부르며 특별한 감회에 젖기 힘들다. 그러나 베이비붐세대(1955~1964)의 부모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감격에 벅찼을 것이다. 위당 정인보는 첫 소절을 왜 '흙 다시 만져보자'라고 했을까.    

2차세계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1874~1965)의 마지막 길은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장례식은 런던 세인트 폴 성당에서 위엄있게 치러졌고 유해는 고향인 블랜엄 궁전 근처의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처칠은 국왕이나 국가영웅들이 잠들어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아닌 고향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영화 '새벽의 7인'의 마지막 장면
영화 '새벽의 7인'의 마지막 장면
체코 레지스탕스와 영화 '새벽의 7인'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영화는 수백 편이 넘는다. 지금도 꾸준히 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영화가 제작된다. 이들 영화중에 '새벽의 7인'(원제 Operation Daybreak)이 있다. 체코 레지스탕스의 실화를 다룬 영화다. 나의 주관적인 견해를 덧붙이면 ‘새벽의 7인’은 2차 세계대전 영화 '베스트 5'에 든다. 혹시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될 기회가 있다면 마지막 부분의 흑백 자료필름을 유심히 살펴보기를 바란다. 체코의 나치 사령부는 레지스탕스를 숨겨준 리디츠 마을을 아예 지도에서 삭제시켰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오스트리아와 체코. 합스부르크 제국 시절 오스트리아는 보헤미아(체코)를 300년간 식민지로 지배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두 나라는 똑같이 독일에 점령당했다. 체코는 런던에 망명 정부를 세우고 레지스탕스를 조직해 끝까지 나치를 괴롭혔지만 오스트리아는 이렇다 할 저항을 하지 못한 채 나치에 협력했다. 두 나라는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민족과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도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어딘가 설명이 미흡하다.

나는 그 이유를 보헤미안 DNA에서 찾는다. 그것은 불의(不義)에 저항하는 정신이다. 체코인의 혈관 속에는 저항 정신이 면면히 흐른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소련제 탱크에 짓밟힌 이후 바츨라프 광장은 침묵의 들판으로 변했다. 묘지의 평화가 감도는 그 광장에서 분신으로 저항한 이가 대학생 얀 팔라흐(Jan Palach)였다.
1969년 1월 16일 얀 팔라흐가 분신 후 쓰러져 숨진 바츨라프광장의 현장에 설치된 기념물 / 사진=조성관 작가
1969년 1월 16일 얀 팔라흐가 분신 후 쓰러져 숨진 바츨라프광장의 현장에 설치된 기념물 / 사진=조성관 작가
체코 레지스탕스와 얀 팔라흐. 그들을 나치와 공산주의에 저항하게 만든 정신의 뿌리가 얀 후스(Jan Hus 1372?~1415)다. 체코 프라하를 여행하면서 후스를 느끼지 못하고 가는 것은 수박을 초록색 과일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프라하 구시가광장의 중앙에 있는 게 후스 동상이다. 왜 사람이 가장 많이 찾는 곳에 후스의 동상을 세웠을까.

나는 '프라하가 사랑한 천재들'에서 후스 이야기를 스메타나의 교향시와 연결해 자세히 썼다. 또 최신작 '언젠가, 유럽'에서도 프라하 구시가를 여행하면서 얀 후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운동의 깃발을 든 것이 1517년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100여 년 전 보헤미아에서 이미 종교개혁운동의 불길이 쓰나미처럼 번졌다. 깃발을 든 이가 얀 후스였다. 얀 후스는 프라하 구시가의 베들레헴채 플에서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교황청이 두려움을 느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얀 후스를 소환해 회유 작업을 한다. 신념을 바꿔라. 그러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후스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진리가 반드시 승리한다며 신념을 선택했다. 결국 얀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 앞 광장에서 화형에 처했다. 1415년 7월 6일이다.'

콘스탄츠(Konstanz)는 현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있는 도시로 보덴 호수를 끼고 있다. 콘스탄츠에서 1414~1418년 중세 최대의 종교회의가 열렸고, 후스는 '이단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구시가광장 한 가운데에 있는 얀 후스 동상 / 사진=조성관 작가
구시가광장 한 가운데에 있는 얀 후스 동상 / 사진=조성관 작가
스메타나 '나의 조국' 제5곡

마녀사냥이 횡행하던 암흑의 중세에 벌어진 일이다. 로마 교황청은 이것으로 일단락되었다고 판단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발명되기 20여년 전, 신문이 등장하기 200년 전의 일이다. 필사본 책이 유일하게 미디어 역할을 할 때다. 아니면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구전(口傳)뿐.  

어떻게 이 소식을 보헤미아에 알릴 것인가. 며칠 뒤 후스를 따르는 일단의 추종자들이 한밤중에 화형장에 나타났다. 이들은 화형장 마당의 흙을 파서 주머니에 넣어 허리춤에 매달았다. 그리고 보헤미아로 향했다. 콘스탄츠와 프라하의 거리는 600여㎞. 추종자들은 그 흙을 가슴에 부여안고 몇 날 며칠을 걸려 프라하로 달려갔다. 그들은 마침내 보헤미안들이 보는 앞에서 후스의 영혼이 깃든 흙을 프라하 중심가 광장(현 구시가광장)에 뿌렸다. 보헤미안들은 타락한 종교권력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해 흙으로 돌아온 후스를 연호하며 울부짖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쇠스랑과 같은 농기구를 들고 나와 가톨릭 군대에 맞섰다.

얀 후스 / 사진=조성관 작가

"얀 후스를 살려내라, 살려내라." 자발적 농민군이 결성되었다. 농민군은 가톨릭 정규군과 맞서 싸우며 보헤미아 전역을 피로 물들였다.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중 제5곡이 '타보르'(Tabor)다. 타보르는 보헤미아 남쪽의 작은 도시. 이곳은 후스 추종자들인 허사이트(Hussite)가 최후까지 저항하며 옥쇄(玉碎)한 곳이다. '타보르'는 얀 후스의 생애를 그린 작품이다.

프라하 구시가광장의 랜드마크 중 하나가 고딕식 틴 성당이다. 이 틴 성당이 개혁운동 중 후스 추종자들의 본부 교회로 사용되었다. 매년 7월6일은 공휴일이다. 이날 프라하 시민들은 후스동상에 꽃을 헌화한다.  

세계사를 바꾼 종교개혁 운동은 프라하에서 발원했고, 그 시작은 한 줌의 흙이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뉴스1의 편집 빙향과 다를수 있습니다.  


author@naver.com

이런 일&저런 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