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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월요묵상] 아직도 다수결을 신봉하십니까

(서울=뉴스1)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 2020-08-03 06:30 송고 | 2020-08-03 07:38 최종수정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뉴스1
자기 삶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다. 내가 심사숙고해 내린 결정은,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 상관없다. 성공과 실패는 때로는 내 의지와 실력과는 상관없이, 운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내가 염두에 둘 부분은, 내가 내린 결정이 최선인가라는 질문이다.
여기서 최선이란,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 당면한 문제를 심사숙고해 그 핵심을 간파하고, 지금 당장 괜찮을 뿐만 아니라, 내일에도 괜찮은 결정이다. 괜찮다는 것은, 그 해결 과정이 남에게도 정정당당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의미가 있고 아름다워야 한다.

최선의 정치체계라고 여기는 ‘민주주의’의 가장 큰 맹점은 ‘다수결 원칙’이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이 앵무새처럼 말하는 ‘민심이 천심이다’라는 문구가 상징하는 정치공학의 체계다. 어떤 중요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 문제를 풀기 위한 최선의 길은, 품격이 있는 전문가의 의견을 경청함이다. 그러나 대부분 정치인은 대중의 표와 인기를 얻기 위해 대중이 원하는 것을 진리인 양 따른다. 다수결이 소수의 의견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진보는, 항상 소수에 의해 진화했다. 그 소수는 고요를 수련해, 그 고요한 시간과 장소가 일깨워주는 ‘양심’의 소리에 복종한다. 소크라테스, 예수,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 갈릴레오, 단테,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마르틴 루터, 셰익스피어, 괴테,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들이 그랬다.

그들은 인류의 삶을 혁신적으로 진보시키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여는데, 누구와 상의하지 않았다. 이들의 천재성은 대중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결책으로 대중을 한 단계 도약시키고 감동하게 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은 그가 아테네 감옥에 감금됐을 때, 간수에게 뇌물을 줘 그를 탈옥시키려고 애를 썼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라는 신생도시를 구축한 ‘법’이 비록 악법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만하다고 판단해 독배를 기꺼이 마시고 순교했다.

예수는 신이 예루살렘 성전이나 율법에 감금된 화석화된 교리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자비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과 동물 안에 숨어 있다고 말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행위가 바로 ‘신’이라고 선언했다. 당시 종교인들과 정치인들은 그런 건방진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아 처단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우주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고 주장한 것은 당시로서는 ‘황당한’ 주장이었고, 종교재판에 회부될 정도로 중대한 범죄이자 이단이었다. 당시 과학자들과 사람들은 모두 천동설이 진리하고 주장했다. 진리는 대중이 다수결로 우긴다 할지라도, 그 전문성이 없다면, 진부하고 거짓이다.

정치는 가장 정교한 과학이고 예술이다. 정치에서 대중이 원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일 수는 없다. 오히려 거짓인 경우가 많다. 특히 정치지도자들이 대중의 눈치를 보고 인기 영합을 위한 정책을 내놓는다면, 그런 정치지도자를 가진 공동체는 불행하다.

공동체가 어떤 문제에 봉착해 그것의 진위를 알아보기 위한 심사숙고의 과정이 없다면, 그것이 대다수가 원한다고 할지라도 허망한 실수다. 후진국의 리더는 대중의 눈치를 보고 대중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자신이 독재를 견고히 다진다.

18세기 말 미국이라는 신생국가를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고 '독립선언문'을 작성했으며, 3대 대통령이기도한 토머스 제퍼슨(1743-1826)에겐 리더가 누구인지 항시 일깨워주는 정신적인 멘토가 있었다. 바로 아테네 정치가 테미스토클레스(기원전 524-기원전 459)였다.

그리스 삼단노선 부조물, 기원전 410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뉴스1
그리스 삼단노선 부조물, 기원전 410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뉴스1

당시 막강한 ‘아시아의 맹주’였던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 반도를 침공하기 위해 오합지졸의 그리스 도시 연합군들과 전쟁을 감행했다. 당시 그리스는 마라톤 전쟁과 살라미스 전쟁을 치르면서 페르시아 제국의 속국이 될 위기에 처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시점에 등장해 그리스 문명과 그 자식인 서양문명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리더는 없던 길을 만드는, 남들이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가야만 하는 고독한 인간이다. 고독의 화신인 리더에게 자신에게 투자하는 고독이 시간이 없다면, 그는 리더가 아니라, 이익이 눈먼 대중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시시한 인간이다.

대중은 대개 그에게 이전보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삶’을 기적적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정치꾼은 자신이 지킬 수 없는 공약을 남발하면서 리더가 되고, 리더가 된 후에는, 자신의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 권모술수를 이용해 대중을 달래며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한다. 그것이 보통 정치인들의 구차한 모습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기원전 493년, 서른 살이 되던 해 아테네의 가장 중요한 선출직 중 하나인 ‘아르콘’(archon)이라는 ‘최고행정관’에 선출됐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깊이 묵상해 리더로 최고의 가치를 몸에 지니게 됐다. 그 가치를 그리스어로 ‘프로노이아'(pronoia), 즉 ‘선견지명’이라 부른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인 ‘민주주의’를 위해선 그것을 해치려는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견제가 필수라고 여겼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이 점점 힘을 키우고 있는 아테네를 침공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아테네로 들어오는 주요 항구인 피라이우스(Piraeus) 요새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491년 페르시아 제국의 ‘위대한 왕’ 다리우스가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흙과 물’을 구하는 사절단을 보낸다. ‘흙과 물’이란 아테네가 페르시아 제국에 승복했다는 표시다. 다리우스는 특히 페르시아의 식민지였던 소아시아(오늘날 터키) 이오이나인들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아테네가 군사적으로 개입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소아시아 이오니아인들은 아테네와 그 주변에서 이주해 간 이민자들이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다리우스의 사절단을 지하 구덩이에 감금했다. 당시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제외한 그리스 모든 도시국가는 페르시아에 승복했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군대는 마라톤 항구에 배 600척, 보병 2만명, 그리고 기병 800명을 보냈다. 아테네인들은 전령 피딥피네스(Phidippides)를 시켜 스파르타에 군사적인 지원을 부탁했다. 스타르타인들은 중요한 종교절기 중에는 군대파견을 보류하는 관습이 있었다.

호플라이트’(hoplites)라는 그리스 보병들은 페르시아 군대를 홀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 군인들은 전력이 2대 1로 열세였지만, 정면대결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아테네 장군들은 밀티아데스, 칼리마쿠스, 아리스티데스, 크산티푸스, 스테이실아오스 그리고 테미스토클레스였다. 이들은 ‘밀집대형’이라는 새로운 전략과 사기로 불가능한 전쟁에서 승리했다. 6000명이 넘는 페르시아인들이 전사했지만, 아테네 그리스인들은 192명만 죽었다.

아테네인들은 마라톤 전쟁에서 승리한 후, 오만이란 병에 걸렸다. 어쩌다 승리한 전쟁을, 자신의 실력으로 이겼다고 착각한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마라톤 전쟁을 통해 페르시아 제국의 야망을 경험했고, 마라톤 전쟁에서 패한 페르시아가 다시 침공하리라 예측한 유일한 리더였다.

다리우스 대왕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의 영광을 재현하고 능가하기 위해 무리하게 애쓴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그는 무리하게 아테네 침공을 결정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제국이 반드시 아테네를 재침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도 재침공을 예측한 유일한 아테네 리더였을 것이다. 그것은 깊은 사고와 선견지명인 ‘프로노이아’를 통해 얻은 깨달음이다.

선견지명은 그것에 알맞은 실질적이며 실용적인 준비를 통해 꽃을 피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군대의 전력을 분석하고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아테네를 침공한 페르시아 군대를 이길 방도를 생각해냈다. 그는 삼단노선이라는 배를 증강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해군이 약한 페르시아가 살라미스 해협을 통해 침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전통적인 보병강국인 아테네와 그리스 도시국가에, 해군을 강화하자는 자신의 주장이 수용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삼단노선을 증강하지 않는다면, 아테네는 불타 없어지고 그리스는 인류 역사 안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프로노이아’ 즉 ‘선견지명’을 통해 깨달음으로 그 해결책을 고안해냈다.

해결책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선명하게 상상하고 입체적으로 구상하고 인내를 갖고 기다리는 자에게만 떠오른다. 살라미스 해전이 일어나기 3년 전인 기원전 483년, 아테네 근처 라우리온(Laurion)에서 대량의 은이 매장된 광산이 발견됐다.

100달란트나 되는 은은 오늘날 수천억원에 해당하는 재물이었다. 보통 아테네인들은 은 광산을 발견했을 때 은을 채굴해 골고루 배분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달랐다. 그는 이 은광으로 삼단노선을 사는 것에 아테네 운명이 달렸다고 생각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페르시아의 공격에 대비해 채굴된 은으로 페니키아에서 나무를 수입해 ‘삼단노선’을 제작하는 전쟁 비용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보병대장인 아리스티데스 장군은 이 안에 반대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번에는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의 직접적인 이익에 관련된 예를 들어 설득하지 않으면 자신의 계획이 수포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거짓말’로 아테네인들을 설득한다. 그는 아테네에서 17km 떨어져 있는 아이기나섬을 언급한다. 아이기나 섬은 마라톤 전쟁 때 페르시아 편을 들은 해상강국이다. 그는 아테네가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아이기나의 해군에 맞설 수 있는 삼단노선을 구축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탄핵감이지만, 아테네의 운명을 위해 거짓말로 시민들을 설득할 정도로 그는 간절했다.

드디어 아테네 민회에서 라우리온 은 사용에 대한 안건이 상정됐다. 아테네인들은 아이기나 섬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아테네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삼단노선 구축이라는 명제를 수용했다. 아테네의 가난한 도시 빈민들은 자신들에게 일거리를 주는 선박구축에 찬성한다. 삼단노선은 그 당시 크루즈 미사일이었다. 배가 삼단으로 돼 있어 노를 저어 속도를 낸다. 아테네인들은 100척의 삼단노선을 건조했고, 크세르크세스와의 살라미스 전쟁에서 승리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저 멀리 떠올려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독수리의 눈을 가진 자다. 그는 주관적인 자아를 선명하게 보고 수련한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공공이익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고유한 임무를 자신의 목숨처럼 믿고 신뢰하는 자다.

리더는 스스로 항상 물어봐야 한다. “나는 나에게 믿을 만한 존재인가?” “내가 나 자신을 못 믿는다면 누가 믿겠는가?” 선명지명과 자기 확신은 그 사람에게 카리스마를 선물한다. 아테네와 그의 자손인 서양문명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선견지명으로 생존하게 됐다.

만일 대다수 아테네인이 원하는 것처럼, 라우리온 광산에서 채굴된 은을 나눠 가졌다면 당시 지도자들은 일시적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 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 제국의 속국이 돼 아테네 민주주의, 원형극장, 철학, 과학 등 우리가 향유하는 문명과 문화는 물거품이 되고 인류는 오랫동안 야만의 노예로 전락했을 것이다.

리더는 다수결(多數決)의 위험을 감지하고 선견지명으로 전혀 새로운 방안을 생각해 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대중을 설득하는 자다. 당신은 다수결을 따르십니까 아니면 당신의 선견지명의 미세한 소리를 경청하십니까? 당신은 그 깨달음을 대중에게 설득하실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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