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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확장] 서체(書體) 디자인, 남북 갈등의 증표가 되기도

"Design으로 보는 북한 사회"-(2) 서체도안
최고지도자들이 직접 서체 제안하고 로고·디자인 결정도

(서울=뉴스1) 최희선 디자인 박사/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겸임교수 | 2020-07-04 08:00 송고 | 2020-07-04 09:32 최종수정
편집자주 [시선의 확장]은 흔히 '북한 업계'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북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그간 주목받지 못한 북한의 과학, 건축, 산업 디자인 관련 흥미로운 관점을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최희선 디자인 박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겸임교수.© 뉴스1
최희선 디자인 박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겸임교수.© 뉴스1

북측의 유별난 서체 사랑

식료품, 화장품 등 북한 상품들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정서적으로 묘한 감정을 준다. 이러한 미감은 북한 제품의 포장에 인쇄된 한글에서 오는 언어의 동질성과 손글씨풍의 서체에서 풍기는 복고적 이미지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남북의 서체 디자인들은 유사한 듯하지만 미묘하게 차이를 보이며 남과 북의 문화를 구분할 수 있는 시각적 기준이 되기도 한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북한 제품의 상표와 포장, 광고들이 과거 70~80년대를 연상시키는 '레트로 디자인(Retro style design)' 스타일로 해석되기도 한다.

북한의 서체 사랑은 유별나다. 특히 북한은 주요 인물들의 손글씨체인, '태양 서체'(김일성 서체), '백두산 서체'(김정일 서체), '해발 서체'(김정숙 서체)를 '민족의 최고 유산'인 명필체로 신성하게 여기며, 서체 연구토론회를 개최하거나 학생들에게 따라 배우기 학습을 시키기도 한다.   

2018년 8월 8일 국제상표로 등록한 대동강식료공장의 <대동강> 마크(좌). 이 마크는 ‘식료’ 글자를 표주박 형태로 만든 독특한 디자인으로 되어있다. 북한식 흘림체 로고 타입을 관찰할 수 있는 <대동강>표의 평양주와 평양소주(우). 출처: WIPO(좌), 조선의오늘(우) © 뉴스1
2018년 8월 8일 국제상표로 등록한 대동강식료공장의 <대동강> 마크(좌). 이 마크는 ‘식료’ 글자를 표주박 형태로 만든 독특한 디자인으로 되어있다. 북한식 흘림체 로고 타입을 관찰할 수 있는 <대동강>표의 평양주와 평양소주(우). 출처: WIPO(좌), 조선의오늘(우) © 뉴스1

북한 권력자의 필체들은 가로, 세로획이 경사를 보이고 붓놀림에서 속도감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북한은 우리의 명조체에 해당하는 '청봉체'는 김정숙의 항일 무장 투쟁기에 나무에 새긴 구호의 글씨체 '해발 서체'를 모체로 개발된 것이라고 선전한다. 청봉체는 현재 인쇄매체의 표준 글꼴로 사용되고 있다.

북한에서 최고존엄자는 본보기 서체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명제품, 명상품 개발을 위해 자국산 제품의 로고와 포장 디자인에 들어가는 글씨체 결정에도 관여한다. 대표적 사례가 ≪대동강맥주 상표, 광고도안≫이다. 2008년 열린 '공화국 창건 60주년 기념 전국 산업미술전람회'에는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창작 과정에서 디자인을 지도했다고 알려진 천영일 작 ≪대동강맥주 상표, 광고도안≫이 특별한 대접을 받고 전시됐다.
다양한 북한 서체디자인을 엿볼 수 있는 <려명거리 봉사망들과 공공건물들의 간판도안> 출처: 서광(2017. 11. 15), '조선산업미술 인민생활관련 부문 도안창작' © 뉴스1
다양한 북한 서체디자인을 엿볼 수 있는 <려명거리 봉사망들과 공공건물들의 간판도안> 출처: 서광(2017. 11. 15), '조선산업미술 인민생활관련 부문 도안창작' © 뉴스1

이 주류의 상표 도안은 2008년 11월 전국적으로 외국상품을 팔지 못하는 <내각 결정 06호>와 그해 12월 대동강맥주의 국제규격화기구(ISO9001)의 품질관리체계 인증 획득과 맞물려 지도자의 치적으로 평가받는다. 9년 후인 2017년 북한의 국가산업미술전시회에서도 ≪대동강맥주 축전 마크, 상표 및 포장 도안≫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조선산업미술창작사가 디자인한 대동강맥주 로고 타입도 김정은 위원장이 지도한 도안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의 집권 이후 북한에서는 다양한 글씨체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조선예술' 2014년 7월호는 과거 "산업미술에서는 글씨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장군님께서도 글씨체와 관련하여 여러 차례 강조하시였습니다"라는 지도자의 어록을 여러 차례 전하며 북측 산업미술가들이 거리 간판, 상표 및 포장 디자인에서 독특한 서체를 개발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북한의 삐라(대남 전단)에 남측 서체가…?"

북한 산업미술 분야에서 컴퓨터 서체를 디자인한 것은 '2001년 조선문학예술연감'에서 처음 찾아볼 수 있다. 고정백의 '<갈매기> 컴퓨터 서체 도안'이 그것인데, 디자인은 공개되지 않아 그 수준은 판단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북측의 산업미술가들은 '자음+모음+특수기호'로 조합 가능한 디지털 활자 1벌의 서체(Font) 개발보다는 거리 간판이나 상표, 포장에 들어가는 글씨의 형태와 색, 꾸밈 방법을 달리하여 목적에 맞게 디자인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한다.

컴퓨터 글자체들은 평양정보센터(PIC) 등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설계되며, 최근 기사를 보면 산업미술을 전공한 도안가들이 IT 연구기관 서체실에 파견되어 새로운 폰트 개발에 참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과거 대남 전단지로 추정되는 인쇄물에서 남한에서 개발된 '태나무체'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디지털 폰트는 저작권의 보호 대상 중 하나로 남북은 모두 명시하고 있다. 새로운 글꼴 역시 남한에서는 창작물로 인정하여 디자인등록출원 가능한 대상이다.

하지만 북한의 서체는 웹사이트를 통해 직접 구매하지 않아도 무단으로 다운로드하거나 호기심 있는 개개인들에 의해 데이터 파일로 P2P로 전달되는 경우들도 있다. 남북관계의 긴장 속에 북한의 서체를 적합하지 못한 경로로 다운로드하여 집회 플래카드나 상업용 글꼴로 사용했다가 정치적 오해와 저작권 분쟁에 휘말리는 경우들이 있어 특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최근 서해 연평도에서 발견된 대남 전단(삐라) 중 일부. 화살표로 표시된 서체가 '태나무체'다. (미국 NK뉴스 갈무리)© 뉴스1
최근 서해 연평도에서 발견된 대남 전단(삐라) 중 일부. 화살표로 표시된 서체가 '태나무체'다. (미국 NK뉴스 갈무리)© 뉴스1

북한이 지난 6월 20일 노동신문을 통해 '대규모적인 대남 삐라 살포 투쟁'을 밝힌 이후 대남 전단(삐라)들의 서체들도 국내에서 발원지의 진위를 증명하려는 관심을 받고 있다. 언론에서 보도된 전단지들을 보면 북한이 개발한 서체들도 보이지만, 남북을 구분하기 어려운 글꼴들도 눈에 띈다.

2018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쇄물에는 놀랍게도 아래 한글 2.5에서 번들(bundle)로 제공된 폰트 '태나무체'가 발견되기도 한다. 태나무체는 현재 한글 최신 버전에서도 사용 가능한 남한의 대중 서체 중 하나이다. 프로그램을 불법 복제하여 서체를 무단으로 사용했다면 저작권 침해에 해당된다. 동시에 인쇄 발원지 판단에 혼란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한의 글자체를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의심된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로 70주년을 맞았다. 이 긴 세월 동안 남북한의 동족상잔의 비극은 군사분계선과 북방한계선에서의 크고 작은 무력 도발뿐만 아니라, 인쇄물의 아주 작은 5mm 크기의 서체 사용에서도 드러나기도 한다. 글로벌 시대 한글의 서체의 다양성은 국력이며, 민족의 문화 저력을 드러내는 척도이다. 이 비극이 끝나고 남북이 아름다운 한글 글꼴을 함께 디자인하며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seojiba3@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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