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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E. H. 카와 도스토옙스키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2020-05-21 12:00 송고 | 2020-05-22 16:24 최종수정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집콕'하던 중 거실 귀퉁이에 잔뜩 쌓인 신문에 눈길이 갔다. 내가 신문에서 꼼꼼히 읽는 면은 '피플 & 스토리'다. 국내외 어떤 인물이 타계했고, 누가 무슨 상을 받았는지 주로 이런 뉴스가 '사람들면'에 등장한다.
오려놓은 2019년 11월 말의 신문에는 모두 7개의 사람 기사가 실렸다. 박해림 차범석희곡상 뮤지컬 극본 수상자,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별세, 제31회 아산상 시상식 등이었다.

내가 이 신문을 스크랩한 것은 박해림 작가 기사 때문이다. 이 기사를 포함해 여섯 꼭지의 기사를 다 읽고는 신문을 그대로 두었다. 그런데 햇볕에 누렇게 변색되어가던 신문의 접힌 부분에 우연히 시선이 멈췄고, 그 제목에 동공이 커졌다.

'도미타 신임 일본대사, 대처 총리 연구로 출판상 수상'

어, 이런 기사가 났는데 내가 왜 여태 못 봤지!
"다음 달 한국에 부임하는 도미타 고지(富田浩司·62) 신임 주한 일본대사가 11월25일 일본의 권위 있는 출판상인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상을 받았다.

일본 PHP연구소는 이날 도쿄 제국호텔에서 제28회 시상식을 열고, '정치를 바꾼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를 출간한 도미타 대사에게 상장과 300만엔의 상금을 수여했다. 이 상은 1991년 사망한 일본의 유명 평론가 야마모토 시치헤이를 기려 제정됐다.

도미타 대사는 영국 연수와 두 차례의 주영 대사관 근무를 통해 영국 현대사에 관심을 가져왔다. 대처 총리 관련 책을 출간하기 전에는 '위기의 지도자 처칠'을 출간해 주목 받았다. 도미타 대사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자주 거론됐던 일본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1925~1970)의 사위다.

도쿄대 법대 출신의 도미타 대사는 2004년 주한정무공사로 근무한 바 있으며 G20 대사, 주이스라엘 대사를 역임했다."

 에드워드 카
 에드워드 카
최고의 도스토옙스키 평전  
 
원고지 3매 분량의 이 기사를 읽자마자 한 사람이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E. H. 카! 대중에게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에드워드 카(1892~1982) 말이다.

런던 출신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출신인 그는 90년의 생애 동안 세 개의 직업을 가졌다. 외교관, 교수·역사학자, 언론인.

그는 1916년부터 1936년까지 20년간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외교관 경력 중 대부분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보냈다. 외교관으로 그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초기 소련을 한복판에서 경험했다. 그의 첫 번째 저서가 1931년 영국에서 나온 '도스토옙스키 평전'이다. 

이후 그가 쓴 책들을 열거하면 '평화의 조건'(1942), '소련이 서구에 준 충격'(1946),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전 14권, 1978), '러시아 혁명'(1979), '나폴레옹에서 스탈린까지'(1980) 등이다. 이쯤 되면 그를 가리켜 '소련사에 대한 세계적 권위자'라고 칭하는 게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러시아 연구라는 그 장대한 여정의 첫 발자국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왜 도스토옙스키였을까. '러시아의 난제' 도스토옙스키를 모르고서는 현대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열린책들에서 출간한 '도스또옙스끼 평전' 표지와 뒷면. 조성관 작가
열린책들에서 출간한 '도스또옙스끼 평전' 표지와 뒷면. 조성관 작가
내가 '페테르부르크가 사랑한 천재들'을 쓰기 위해 속성으로 도스토옙스키를 공부하면서 탐독한 책이 바로 '도스또예프스끼 평전'(김병익·권영빈 옮김, 열린책들)이었다. 이 책은 도스토옙스키 연구의 입문서이자 원전(原典)이다. 도스토옙스키라는 거대한 산맥을 탐험하려면 누구 할 것 없이 이 베이스캠프를 거쳐야 한다. 나 역시 이 베이스캠프에서 기초 체력을 다진 뒤 석영 중의 도스토옙스키도 만났고, 이덕형의 도스토옙스키도 접했다.  

20세기 정신과 사상은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발원했다. 그 중심에 정신분석학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가 있다. 프로이트의 업적은 '무의식의 발견'이다. 프로이트가 있었기에 융 심리학과 아들러의 심리학도 파생될 수 있었다. 그 프로이트가 숭배한 작가가 바로 도스토옙스키다. 프로이트는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을 탐독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부친 살해 욕망'의 모티브를 얻었고, 이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발전시킨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가의 소설가다. 방탄소년단(BTS)과 지드래곤이 가수의 가수인 것과 비슷하다. 소설가들이 최고로 꼽는 작가가 도스토옙스키다. 막심 고리키, 앙드레 지드, 토마스 만, 김동인….  세계의 시인, 작가, 사상가들이 도스토옙스키를 찬미했다.
 
족쇄를 차고 4년간…
 
그는 모스크바 태생이지만 열여섯 살 이후 죽을 때까지 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이하 페테르부르크)에서 살았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총명한 두 아들에게 육군공병학교 시험을 보게 한다. 아버지는 두 아들이 육군공병학교를 나와 장교 경력을 쌓은 뒤 러시아 제국의 관료가 되기를 희망했다. 1837년 형제는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시험을 치지만 형 미하일은 낙방하고, 동생 표도르만 합격한다.  

공병학교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따분한 학교생활에서 숨통을 터준 것은 문학이었다. 셰익스피어, 라신, 실러, 괴테, 위고 등을 읽으며 학교생활을 견뎌낸다. 그는 아버지의 기대대로 학교를 마치고 장교가 되었다. 1844년 지방으로 발령 나자 그는 사표를 내고 전업 작가의 길에 뛰어든다. 1845년에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이 나왔다. 당대의 평론가 벨린스키는 신인 작가에게 말했다.  

"자네가 쓴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있는가? 스무살의 자네 나이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을 텐데."

사람을 단련하는 것은 시련과 고난이다. 지난 200년간 세계의 작가들 중에서 도스토옙스키만큼의 고통을 겪어낸 사람은 없다. 비범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에게 비범한 불행이 덮쳤다.

작가로 왕성하게 작품을 토해내던 1848년 그는 동갑나기 사회주의자 페트라세프스키를 알게 된다. 니콜라이 1세의 전제적 통치가 강화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는 페트라세프스키의 집에서 열리는 금요회 회원이 된다. 대학생부터 초급장교까지 다양한 인텔리겐차(지식층)들이 금요회에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에 환호했다.

1849년 4월 말 금요회 회원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불온사상을 유포했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같은 해 12월 22일 새벽 도스토옙스키는 다른 사형수들과 함께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맨 앞 열의 사형수 세 사람이 질질 끌려 나와 기둥에 묶였다. 그는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다.

이때 말을 탄 헌병이 사형장으로 달려와 황제의 형집행정지 명령서를 낭독했다. 사형수들은 사색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인류역사상 사형 집행 직전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작가는 없었다. 시베리아 유형(流刑)!      

12월25일 밤 12시, 그는 다른 사형수들과 함께 족쇄를 찬 채 썰매마차에 올라탔다. 대한(大寒)보다 더 혹독한 추위 속에 썰매마차는 동쪽으로, 동쪽으로 내달려 우랄산맥을 넘었다. 그렇게 18일만에 도착한 곳이 옴스크의 유형수 부대. 그는 족쇄를 찬 채 흉악범 사형수들과 4년을 보냈다. E. H. 카의 평전으로 들어가 본다.

'도스토옙스키는 4년간 인간 사회의 보통의 인습과 규약에서 벗어난, 거의 인간 이하의 생존에 다다른 사람들과 생활했다. …그 감옥 안에 정상적인 인간이 드물었던 것처럼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에서도 정상의 인간은 드물다. 그의 세계 속에 정상적인 모습을 한 인간은 없다. 그것은 범죄인과 성자의 세계, 악덕과 미덕이라는 괴물의 세계이다. 감옥 속 대장간에서 그의 발은 족쇄에 채워졌고, 다시금 자유인의 세계로 되돌아간 것은 그가 서른세 살 때의 일이다. 그러나 그가 얻은 체험을 통하여 그의 세계는 영원히 변모되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유형수 감옥에서 4년간 찬 족쇄와 같은 족쇄. '죽음의 집 기록' 책. 조성관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유형수 감옥에서 4년간 찬 족쇄와 같은 족쇄. '죽음의 집 기록' 책. 조성관 작가
4년 유형을 마치면 죄수들은 족쇄를 풀고 사병으로 복무해야 했다. 그가 사병(후에 부사관으로 승진)으로 복무한 곳이, 현재의 카자흐스탄 북부 도시인 세미팔란티스크. 6년 뒤인 1859년 그는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재탄생했다. 

1860년 '죽음의 집의 기록'을 쓰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옴스크 유형부대에서의 4년을 토대로 쓴 자전 소설이다. 1867년 '죄와 벌'을 1871년 '악령'을 각각 출간했다. '죄와 벌'에서 그는 정의를 독점한 인간 라스콜리니코프가 자행하는 재앙을 그렸다. '악령'은 네차예프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소설이다. 그는 네차예프로 상징되는 혁명적 인텔리겐차들을 악령(惡靈)에 홀린 인간들로 간주했다. 1880년 11월, 그는 마침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완성한다. 그리고 1881년 1월28일 눈을 감았다.

E. H. 카가 소련 근무에서 도스토옙스키를 발견해낸 것처럼 도미타 일본대사가 한국 근무에서 현대사의 어떤 인물에 관심을 갖게 될지 궁금하다.      
시베리아 세미팔란티스크에서 부사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도스토옙스키. 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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