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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100℃] 북한판 '부부의 세계'…그들은 결국 '리혼' 했을까

북한 소설 '벗'으로 본 북한의 결혼과 이혼

(서울=뉴스1) 이설 기자 | 2020-05-09 10:00 송고
편집자주 [북한 100℃]는 대중문화·스포츠·과학·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북한과의 접점을 찾는 코너입니다. 뉴스1 북한팀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관심사와 관점을 가감 없이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 공식 포스터.(JTBC 제공) © 뉴스1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 공식 포스터.(JTBC 제공) © 뉴스1

"실은 내가 이렇게 돌아와 주길 기다렸던 거 아니야? 실은 지금 이 순간도 나한테 안기고 싶어서 죽겠잖아 당신, 아니야?"

간통을 저지르고 새 살림을 차린 남편이 한밤 중에 갑작스럽게 찾아와 이렇게 묻는다. 부인은 솟구쳐 오르는 증오감에 대답 대신 그의 뺨을 내리친다. 그런데 순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심상치 않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눈빛을 교환하는 두 사람. "설마, 설마…?"
불길했던 내 직감은 현실이 됐다. 두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리듯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JTBC가 방영 중인 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내용이다. 이상하게도 그들의 마음이 '이해는' 된다. 주변 반응도 비슷하다. 지난 12화(5월 2일 방송)를 본 이들은 대체로 내용은 '멘붕'이었지만 주인공들의 마음이 이해는 된단다. 기혼자든, 미혼자든 '부부의 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데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된 듯하다.

여기 북한판 '부부의 세계'가 있다.

"리혼이라는 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퇴장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판사 정진우는 예술단 소속 가수 채순희가 선반기계공인 남편 리석춘과의 이혼을 간절히 요청하자 이렇게 말한다. '리혼'이라는 북한식 표기가 아니었다면 우리의 이야기로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북한의 대표작가 중 한 명인 백남룡의 소설 '벗(1988)'은 북한 주민들의 사랑, 결혼, 이혼 문제를 다뤘다. 책이 발간된 지 한참이 지난 오늘 읽어도 내용이 흥미롭다. 연애, 결혼, 이혼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인생사이지만 모든 것이 베일에 싸였다는 북한 사회에서의 일반적인 인생사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매력 포인트다.

북한 작가 백남룡의 소설 '벗' 표지.(아시아 출판사 제공) © 뉴스1
북한 작가 백남룡의 소설 '벗' 표지.(아시아 출판사 제공) © 뉴스1

◇"전 그 사람하고 생활 리듬이 통 맞지 않아요."

채순희가 이혼 사유로 제시한 것은 '생활 리듬'의 차이다. 우리로 치면 성격 차이에 해당할 것 같다. 두 사람은 철제 일용품 공장에서 기계공(리석춘)과 운전공(채순희)으로 만났지만 빼어난 노래 실력을 갖춘 채순희는 결혼 이후 가수가 된다. 그리고 부부의 불행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채순희는 남편이 열정을 쏟아부은 사업의 성과가 좋지 않자 야간대학에 진학할 것을 제안한다. 남편은 이를 거절한다. 가수가 된 아내가 허영심에 하는 말로 여겼다. 기계공으로서의 순수한 열정을 버리고 어떤 '타이틀'을 좇으라는 조언으로 생각한 것이다.

채순희의 마음을 이해하는 건 판사 정진우다. 그는 이렇게 정의한다. "채순희는 남편이 선반공이어서 불평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남편이 십 년 전이나 오늘이나 정신생활에서 변화가 없이 따분하고 구태의연한 생활을 하는 것이 문제 아니겠는가. 거기에다 '성실성'이라는 울타리를 둘러치고 안해(아내)를 타매(경멸히 여김)한다… 이런 마찰에서 순희의 우월감과 절망적인 결심이 생긴 게 아닐까?"

바람을 핀 남편 때문에 이혼하게 된 '부부의 세계'와 달리 '벗'에는 갈등이 정점을 치닫는 극적인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막장'의 요소가 없다. 부부 사이에 발생한 사소한 오해가 끝까지 풀리지 않는 과정이 꼼꼼하고 집요하게 전개된다. 감정선이 터지진 않지만, 파고든다.

◇직장까지 찾아와 이혼을 말리는 판사?

판사 정진우는 그들이 갈라서지 않도록 끊임없이 설득한다. 그는 부부의 가정과 일터까지 직접 찾아가며 이들의 결정이 틀렸음을 증명하려 한다. 정진우는 부부의 아들 호남을 직접 만나 밥을 먹이고 이야기를 나눈다. 리석춘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게 부부 사이 갈등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정진우는 이를 추적하다 공업기술위원회 위원장의 비리까지 캔다. 성실하게 일한 리석춘에게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자기 주머니를 불린 이 위원장을 질책하기까지 한다. 판사의 이런 오지랖(?)은 남한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모습일 것이다.  

판사가 직접 나서 이혼을 말리는 건 북한 체제의 특성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정진우의 말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처녀 총각이 사랑하고 결혼하는 건 자유입니다. 그러나 가정을 이룰 때에는 법 기관에 등록해야 합니다. 가정이 국가의 개별적 생활 단위인데 국가의 단위가 파괴되는 일을 간단히 볼 수 있겠습니까."

자료사진. © News1 김일환 디자이너
자료사진. © News1 김일환 디자이너

◇그래도 자식 때문에…그들도 망설였다

채순희와 리석춘은 정진우 판사의 눈물겨운 설득에도 불구하고 결정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다만 망설임이 없는 건 아니다. 흔들리는 마음은 나라에 충성하려는 '공민적 의무감'이나 수군대는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 때문만은 아니다. 부부는 '이 결혼을 더 이어갈 수 없다'는 자신들의 내면의 감정에 더 집중한다.

그런데 이들의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든 건 판사도, 국가도 아닌 그들의 '자식'이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의 주인공들이 인연을 쉽게 끊지 못하는 이유도 아들의 존재였다. 채순희는 이혼을 굳게 결심한 뒤 부쩍 말수가 적어진 호남이를 마음에 걸려한다. 예술단 공연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기차역에 마중 나온 리석춘과 아들 호남을 보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끼기도 한다. 채순희는 아들을 껴안은 채 한동안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리석춘과도 눈을 마주한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는 종반부에 접어들었다. 이미 이혼했지만 복잡한 감정선을 주고받는 두 사람이 결국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세상의 모든 '부부의 세계'는 알다가도 모를 세계이겠지만 '부부의 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남북 모두에 공감대가 형성된 듯하다.

리석춘과 채순희는 과연 '리혼'을 선택했을까? 어느 쪽이든 나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보기로 했다.


sseol@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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