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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에 세종도 여종에 '긴급생활비'…1699년 숙종때 141만명 사망

조세 감면·격리조치 등 2020년 대책도…500년전 전염병매뉴얼도
세종 "만일 한 사람이라도 죽게 되면 죄를 주고 용서하지 않겠다"

(서울=뉴스1) 문창석 기자 | 2020-03-21 03:45 송고
조선시대 전염병 이야기를 픽션으로 다룬 '킹덤'(넷플릭스 제공) '© 뉴스1
조선시대 전염병 이야기를 픽션으로 다룬 '킹덤'(넷플릭스 제공) '© 뉴스1

"온 집안이 모두 전염되어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낫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병을 앓다가 죽은 자와 길에 쓰러진 주검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모두 거두어 묻지 못하고 구덩이에 가져다 두는데, 동서교(東西郊) 10리 안에 쌓인 주검이 언덕을 이루었고, 빗물이 도랑에서 넘칠 때는 주검이 잇따라 떠내려갔다. 도성에서 이처럼 사람이 죽는 참상은 예전에 없었다."(1671년 5월20일 현종실록)

코로나19를 겪는 2020년의 대한민국은 조선시대와 얼마나 같고 어떻게 다를까.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조선의 백성들이 겪었던 전염병의 참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조선 18대 국왕인 현종(顯宗) 재위 기간인 경술년(1670년)과 신해년(1671년)에 조선을 덮친 '경신대기근'에는 약 1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19대인 숙종(肅宗) 시대는 더욱 참혹하다. 숙종실록은 1693년부터 1699년까지 당시 인구의 20%인 141만6274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한다. 이는 집계된 사망자일뿐, 실제 사망자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21대 국왕인 영조(英祖) 시대에도 1749년 "여역(전염병)이 만연해 민간의 사망자가 50만, 60만이나 됐다"는 기록이 있다.

코로나19의 첫 발병지가 중국 우한인 것처럼, 당시에도 명(明)·청(淸)으로부터 전염병이 전파되는 경우가 많았다. 1524년(중종 19년) 중국과 교역로로 맞닿은 평안도에서 창궐한 전염병은 이후 전국 팔도로 확산됐다. 1821년(순조 21년) 조선에 처음으로 전파된 인도 지방 풍토병 콜레라도 중국 전역이 감염된 후 평안도·황해도로 들어왔다.

전염병에 백성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자 왕들은 통탄한다.
1671년 경신대기근 당시 현종은 인심 수습을 간언하는 대하선 장선징의 상소에 "백성이 장차 죄다 죽게 되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니,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차라리 내 몸이 그 재앙을 대신 받고 말지언정 백성이 그 화를 당하는 것을 차마 못 보겠다"고 말했다.

1718년 숙종은 "병든 가운데 초조하게 근심하니 내 마음이 타는 듯하다. 차라리 나 자신이 이를 당하여 갑자기 죽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싶다"는 제문(祭文)을 직접 짓기도 했다.

천연두 치유를 위해 굿을 하는 무당을 그린 '호구거리' © 뉴스1
천연두 치유를 위해 굿을 하는 무당을 그린 '호구거리' © 뉴스1

국가적 재난을 맞은 조정은 여러 방법을 동원해 대책을 내놓는다. 다만 아직 미생물이나 바이러스 같은 세균학의 개념이 없어 비합리적인 대책을 내놔 필요한 대응을 하지 못하기도 하고, 보신을 우선하는 공무원의 복지부동과 소홀한 일처리 등으로 화를 키우는 실책을 저지르는 일도 있었다.

1452년 경창부 윤 이선제는 황해도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당시 왕인 단종(端宗)에게 해결책으로 '평양으로 옮겼던 단군사당을 황해도로 복원하자'는 상식 밖의 상소문을 올린다. 단군사당을 옮기자 괴이한 기운이 뭉쳐 귀신 모양 같은 게 밤에 다닌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옮겨서 병이 발생했다'고 말한 것도 상소를 올린 이유였다.

기본적인 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은 관리도 있었다.

1524년 중종(中宗)은 전염병으로 670명이 죽었는데도 그 숫자를 보고하지 않은 용천군수에게 죄를 물었다. 1547년 명종(明宗)도 지방과 달리 서울은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수를 하나하나 보고하지 않자 "반드시 헤아릴 만한 게 아니라고 해서 아뢰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1612년 광해군(光海君)도 전염병 발생을 보고하지 않은 함경도 감사의 죄를 따졌다.

필요한 대응에 소홀한 일도 있었다. 1621년 전염병이 돌자 광해군은 전염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성문 밖으로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병관(兵官)과 위장(衛將)들은 즉시 실행하지 않았고 결국 군사들에게 전염병이 옮는 일이 일어났다.

광해군은 "나라의 기강이 너무 해이해졌다. 지시하는 일들을 조금도 거행하지 않으니 너무도 한심하다"며 해당 관리를 파직하기도 했다. 1622년에는 감옥에 병이 도는데도 책임자인 판부사가 해를 넘겨도 휴가에서 복귀하지 않아 계속 죄수들을 가둬둘 수밖에 없자 의금부가 상소하기도 했다.

일부 관리들은 자신도 옮을까봐 일부러 보직에 부임하지 않았다. 1528년 중종은 당시 함경도에 전염병이 크게 퍼졌는데도 기한 안에 부임하지 않는 수령 등을 파직했다. 경신대기근을 겪은 현종 때는 관리들이 전염병이 창궐한 서울에서 나가기 위해 건강을 핑계로 줄줄이 사직서를 제출하는 일도 있었다. 1673년까지 당시 영의정인 허적이 14번이나 사직하자 현종은 "내 지극한 소망에 부응해달라"고 타일렀다.

17일 오전 한 가족이 39년 만에 일반인에게 개방된 서울 중구 광희문을 지나고 있다. 1396년 흥인지문과 숭례문 사이에 세워진 광희문은 서소문과 함께 시신을 내보내던 문으로 수구문 또는 시구문이라고도 불린다. 2014.2.17/뉴스1
17일 오전 한 가족이 39년 만에 일반인에게 개방된 서울 중구 광희문을 지나고 있다. 1396년 흥인지문과 숭례문 사이에 세워진 광희문은 서소문과 함께 시신을 내보내던 문으로 수구문 또는 시구문이라고도 불린다. 2014.2.17/뉴스1

하지만 대부분의 관리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애를 썼다. 왕도 적절한 대책을 내놓으며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특히 일부는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2020년의 대한민국 정부가 내놓는 대책과도 일맥상통하는 모습을 보였다.

1432년 세종(世宗)은 전염병 피해를 확인하던 중 제사를 관장하는 소격전의 눈 먼 여종이 아이를 안은 채 굶어죽게 됐다는 말을 듣고 즉시 쌀과 콩을 1석씩 주게 했다. 이를 다 먹은 후에는 또다시 굶을 것을 우려해 여종의 족친 또는 소격전에서 계속 구호하라고 지시했다. 당장 급한 돈도 없는 저소득층에게 '긴급 생활비'를 지급하는 현재의 모습과 닮아있다.

조세 감면 조치도 이어졌다. 1643년 인조(仁祖)는 규정상 전염병으로 전 가족이 사망한 경우가 아니라면 토지세가 면제되지 않는 문제가 있자, 이를 개정해 전염병 구제 혜택이 백성들에게 골고루 적용되게 했다. 1788년 정조(正祖)는 제주도에서 많은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죽자 구휼 조치와 세금 면제를 명령했다. 그는 제주목사에게 "공물은 섬 백성들에게 한갓 고통과 폐해만 더할 뿐"이라며 "(제주에서 오는) 공물 목록을 볼 때마다 먼저 이맛살이 찌푸려져 맛이 입에 맞는지 여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미생물에 의해 전염되는 원리를 모르면서도 경험적으로 원인을 파악해 감염자와 비감염자를 격리 조치하는 대책도 있었다. 1444년 세종은 과거 전염병 당시 굶주린 백성들을 한 곳에 모아 배불리 먹였지만, 서로 전염돼 사망자가 늘어난 일을 떠올렸다. 세종은 "만약 주린 백성을 한 곳에 모두 모이게 한다면 도로 전과 같을까 염려되니, 나누어 거처하게 하고 질병을 얻은 자는 다른 사람과 섞여 살게 하지 말라"는 대책을 지시한다.

이런 격리 조치는 죄수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789년 정조는 감옥 안에 전염병이 돌자 죄수들을 형조 안으로 옮겼다가 옥을 깨끗하게 하고 다시 가두라고 지시했다. '어차피 사형수가 아니냐'는 의견이 있자 그는 "사형에 해당한다 해도 처형으로 죽지 않고 병으로 죽는 건 정사에 어긋난다"며 물리치기도 했다. 250년 전 정조에게서 인권과 법치주의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News1 김일환 디자이너
© News1 김일환 디자이너

코로나19를 겪는 현재 정부가 국민에게 '안전수칙'을 지키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조선시대에 '전염병 매뉴얼'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기도 했다. 1434년 세종은 유행·전염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직접 써 전국 방방곡곡에 내렸다. 비록 어린아이의 소변을 달여 마시라는 처방도 있지만, 매일 아침 세수부터 하라는 등 위생을 강조하는 대목도 있다. 1525년 중종도 처방을 정리한 '벽온방'을 편찬해 전국에 배포했다.

정조는 고정관념에 얽매이기보단 융통성 있는 대책을 내렸다. 1791년 지방에서 올라온 금위영 군사들이 전염병에 걸리자 융통성이 없는 금위대장을 "고락을 함께하는 의리를 모르느냐"며 엄하게 나무라고 치료한 병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굶주리자, 특정 장소에만 지을 수 있는 구제기관 진휼청(賑恤廳)을 필요한 장소에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시대 최악의 전염병을 겪은 숙종이 내린 대처도 주목된다. 국내 인구의 20%가 사망한 1699년 그는 "더 사망하는 사람이 없도록 제때 약을 지급하고 시체는 거둬서 꼭 매장하며, 전염병이 잦아들면 백성들에게 특별히 혜택을 베풀고 제사를 지내 원통한 마음을 위로해주라"고 지시했다. 보건·경제 대책에서 심리치료까지 전염병에 대응하는 기본적인 대책으로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관리들에게 '어떻게든 백성들을 구하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1444년 세종은 전염병 확산을 우려해 감염자와 비감염자를 격리 조치하는 대책을 지시하면서 지금의 서울시청인 한성부(漢城府)에 "만일 한 사람이라도 죽게 되면 죄를 주고 용서하지 않겠다"는 엄명을 내렸다. 최대한 많은 백성을 살리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themo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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