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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월요묵상] '나만의 최선'을 찾는 모험을 하고 있는가

(서울=뉴스1)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 2019-12-02 06:30 송고 | 2019-12-02 09:50 최종수정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뉴스1
2019년도 이렇게 지나가는가 보다. 지난 11개월은, 상투적인 문구지만, 정말 눈 깜짝할 사이라는 순간(瞬間)처럼 지나갔다. 2019년의 마지막 달에 들어서니 만감이 교차한다. 지난 11개월을 좀 더 보람차게 보내지 못한 내가 원망스러운 아침이다. 그런 후회가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런 감정을 숨길 수는 없다. 나는 매해 연말에 그런 회한의 감정을 반복해 왔고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젊은 날에는 그런 감정도 느끼지 않을 만큼 무모하고 어리석었다. 나의 이런 회한은 분명 2020년 연말에도 반복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심기일전하여 2019년을 마무리하고, 2020년을 맞이하고 싶다.     
로마시대 황제이자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인생 말년을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체코슬로바키아 전선에서 보내면서, 매일 저녁 목욕재계하고 중요한 의례를 행했다. 그는 더 나은 자신을 위한 당부의 말들을 현재의 자신에게 썼다. 이 일기가 '명상록'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게으름을 꾸짖고 훈련을 독려하는 스승을 마음속에 모셨다. 그는 인간의 몸, 정신 그리고 영혼을 다른 단계로 도약시키기 위해 나태한 지금을 각성시키는 훈련사를 '헤게모니콘'(hegemonikōn)이란 그리스 단어를 사용해 표현했다. 헤게모니콘은 '(나를) 장악하며 감시하는 자'란 뜻이다. 헤게모니콘은 미래에 내가 흠모하는 나를 만들기 위해, 현재의 나에게 조언하는 엄격한 훈련사다.     

더 나은 자신으로 변모하기 위해 구별된 시간과 공간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사람은 이 훈련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녀)는 다음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 그는 '너는 너다'(you are who you are)라고 말한다. 그는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도 흉내 내지도 말고,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라고 명령한다. 그는 '자신다운 자신'이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선이란 점을 일러준다. 둘째, 그는 '너는 네가 될, 그것이다'(you are who you will be)라고 단언한다. 만일 내가, 나를 응시하고 내가 흠모하는 나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면, 나는 오늘을, 그 모습을 위해 최선을 경주할 것이다. 나는 오늘, 미래를 살 것이다.

내가 내 미래가 되어 지금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대개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자신에 연연해한다. 우리는 매순간, 새로운 생각을 요구하는 '지금'에 몰입하지 못하고, 자신이 과거에 이룬 자신의 성과 혹은 실패에 안주해 우쭐하거나 의기소침해 한다. 미래의 자신을 지금 연습하는 사람은 행복(幸福)하다. 행복이란 누구의 열광이나 갈채가 아니라 자신이 응시한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고 응원할 때 마음속에서 저절로 샘솟는 만족감이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유다이모니아'(eudaimonia)라는 단어는 '행복'이 아니라 '최선'(最善)이다. 내 삶의 최선은 최선을 지향하는 마음이며, 최선을 연습하는 과정이다.

헨리 스콧 툭(Henry Scott Tuke, 1858–1929) , 조망(眺望, The Look Out), 1886, 유화, 23.5x 33㎝, 영국 콘월주 팰머스에 있는 팰머스 예술관(Falmouth Arts Centre) 소장.© 뉴스1
헨리 스콧 툭(Henry Scott Tuke, 1858–1929) , 조망(眺望, The Look Out), 1886, 유화, 23.5x 33㎝, 영국 콘월주 팰머스에 있는 팰머스 예술관(Falmouth Arts Centre) 소장.© 뉴스1

인간은 하루를 통해 두 가지 삶을 산다. 하나는 우리가 경험해 익히 '알고 있는 영역'안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아직 경험하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다. 미지의 영역이 바로, '나만의 최선'이 발굴되는 장소이며, 나의 신명을 일으키는 신나는 놀이터다. 이 두 가지 삶 사이에는 깊은 계곡이 존재하고, 팽팽한 외줄로 연결돼 있다. 한쪽은 과거의 나이며 다른 한쪽은 나를 극복한 나, 미래의 나다. 우리 대부분은 외줄타기를 시도하지 않는다. 과거의 나에 안주하는 것이 편하고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수는 과감하게 위험한 외줄타기를 시도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우리는 종종 인생의 시련과 마주하여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한다. 하나는 좌절과 불행의 심화라는 출구가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좌절하든지, 다른 하나는 자신이 아직 경험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모험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모험을 감히 감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자신에게 익숙한 과거의 행태로 돌아가 감각을 자극하는 욕망, 희망이 없는 권태, 혹은 세상에 대한 불평과 냉소로 소일한다. 인간이 자신의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숭고한 자신의 목소리를 외면한다. 그 목소리는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성공, 확신, 그리고 용기를 열망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든 과정인 자기-변모와 자기-진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인간은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들, 예를 들어 의식주와 같은 물질적인 욕구와 안정, 사랑, 소속감 그리고 자부심과 같은 정신적인 욕구를 만족한 후에 그 이상의 만족을 추구한다. 그래야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물질적인 욕구와 정신적인 욕구를 넘어선 영적인 욕구는 '자신이 최선의 노력을 통해 도달 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인간이 짧은 인생동안 자신이 돼야만 하는 자신이 될 때, 삶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작곡가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야만 하고, 화가는 그림을 그려야 하며, 시인은 시를 써야만 한다. 이런 행위를 통해 각자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이 될 수 있는 그것이 반드시 돼야 한다.

독일 낭만주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요한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휠더린(1770-1843)은 숭고한 자신을 '내면의 거룩한 불'(the sacred fire within)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이 불을 지피면 자신이 이전에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다. 인간 마음속 깊은 곳엔 자신이 한 번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인식되지 않는 땅’이 있다. 2세기 알렉산드리아 거주하던 지리학자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미는 로마제국을 위해 세계전도인 '코스모그라피아'(Cosmographia)를 제작하면서, 그 당시까지만 해도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있어야만 하는 땅과 바다를 지도에 그려 넣었다. 그의 지도에는 라틴어로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 즉 '알려지지 않는 땅'이란 지역이 등장한다. 테라 인코그니타는 르네상스 시대와 그 이후 대항해시대 탐험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신대륙을 발견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지도 제작자들은 테라 인코그니타에 별칭 문구를 삽입했다. 바로 '힉 순트 레오네스'(HIC SVNT LEONES), 즉 "여기에 사자가 있다"라고 표시했다. 사자가 버티고 있는 그 장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남다른 기개가 필요하다. 그 기개란 모험을 통해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겠다는 용기와, 그 용기를 지탱하는 자기 확신이다. 나는 과거의 알려진 영토, 즉 '테라 코그니타'에 안주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최선을 발견할 '테라 인코그니타'로 건너가기 위해 외줄타기를 시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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