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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하루키, 이승기에 표절당하다(?)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2019-11-07 12:00 송고 | 2019-11-07 17:56 최종수정
무라카미 하루키

노벨문학상은 2019년에도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를 비껴갔다. 연극 '관객모독'으로 국내에 널리 알려진 오스트리아 페터 한트케와 폴란드의 올가 토카르추크가 노벨 문학상을 각각 수상했다. 일본은 문학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요시노 아키라가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하면서 28번째 노벨상 수상이라는 영광을 안았다.

국내의 하루키 팬들은 하루키가 2019년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해 아쉽고 섭섭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너무 속상해할 것도 없다. 노벨문학상 수상 여부와 관계없이 하루키는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으니까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이승기가 모델로 나온 버스정류장의 '숏.확.행' 광고. 조성관 작가 제공
이승기가 모델로 나온 버스정류장의 '숏.확.행' 광고. 조성관 작가 제공

'숏. 확. 행' 광고모델 이승기
 
나는 기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대중교통을 애용하고 있다. 대중교통을 우스개로 BMW라고 한다. 버스(Bus)‧지하철(Metro)‧도보(Walking)의 줄임말이다. 세상만사가 그렇듯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다. BMW의 장점은 계절 변화와 더불어 세상 변화를 실시간으로 감지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버스나 지하철을 갈아타면 환승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광고를 보게 된다. 광고는 계절과 시류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오래 가는 좋은 글은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인간 삶의 모습을 나무의 수액처럼 끌어올린 글이다.  

서울시내 버스 정류장에는 보통 광고판이 2~6개가 설치되어 있다. 하루키가 버스정류장 광고판에 등장한 것은 일각에서 '일본 불매 운동'이 한창이던 팔월이었다. 버스정류장 광고는 2~3개월에 한 번씩 교체된다

방송인 이승기가 활짝 웃고 있는 사진에 '숏‧확‧행'이라는 큼지막한 글자가 박혀 있었다.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크고 강렬했다. '숏‧확‧행' 위에 '짧아서 확실한 행복'이라는 짧은 설명문이 붙어 있다. 휴대폰 애플리케이션(APP) 광고다.  

하루키 팬이라면 이 광고판을 볼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물론 하루키를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숏‧확‧행'을 보고도 저게 무슨 말이지 하고 소 닭 보듯 그냥 지나쳤겠지만.

이승기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서도 '숏확행'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자신을 홍보했다. '숏확생 폼확행'. 웃음이 나온다. 배우 이진욱도 짧은 패딩점퍼를 SNS에 광고하면서 '숏확행'이라고 했다. 어떤 여행 작가는 자신의 강연제목을 '나의 소‧확‧행 여행을 찾아서'고 달았다. 단행본 제목에도 '소확행'이 등장했다. '소확행:워라벨 시대의 취미생활백서' '소확행 답사' 같은 책이 그렇다.
 
'렝겔한스섬의 오후' 표지

하루키 조어능력의 원천은?
 
'숏‧확‧행'은 '소‧확‧행'의 변형이다. '소확행'의 지적재산권은 하루키가 갖고 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줄임말로 소확행(小確幸)이라 부른다. 일상의 작은 것에서 발견하는 것이 진짜 행복이라는 뜻이다. 오래전 런던에서 지하철 테러 사건이 났을 때 어떤 시민의 인터뷰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테러를 당하고 보니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겠다."

2018년 유행어 설문조사에서 '소확행'이 당당하게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이 줄임말의 확장성과 지속성을 방증한다. 장년층 이상은 대체로 젊은 세대의 줄임말 사용에 불편함을 느끼지만 '소확행'은 예외다.

하루키가 군조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데뷔한 게 1979년이다. 나이 서른 살 때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내와 함께 재즈카페를 운영하던 어느 날 문득 그는 미칠 듯이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 영업이 끝나면 술 냄새 찐득한 카페에 남아 혼자 글을 썼다. 그게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다.

'소확행'은 1986년에 나온 산문집 '랑겔한스 섬의 오후'에 살짝 등장한다. 김난주가 번역한 책을 펴본다. 49쪽에 이런 단락이 나온다.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말은 깨끗한 팬티가 잔뜩 쌓여 있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작기는(小) 하지만 확(確)고한 행(幸)복의 하나(줄여서 小確幸)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건 어쩌면 나만의 특수한 사고체계인지도 모르겠다."

국내의 하루키 팬들은 '확고한'을 '확실한'으로 살짝 변형을 주었다. '소확행'이 국내에서 이처럼 크게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과 한국이 같은 한자문화권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고대 로마제국의 언어인 라틴어와 같은 게 극동 아시아의 한자(漢字)다. 뜻글자인 한자는 조어(造語) 능력이 탁월하다. 중국은 거의 모든 외래어를 조어를 통해 한자어로 만들어내는 나라다.  

하루키는 말한다. "이건 어쩌면 나만의 특수한 사고체계인지도 모르겠다"고. 소확행을 생각해내고 그걸 성문화(成文化)시켜 세상에 없던 말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 여기에 하루키의 천재성이 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 눈에는 '소확행'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하루키가 막 데뷔했을 때 기성 문단은 그를 몹시 불쾌해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는 "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하루키는 아쿠다가와 류노스케(茶川龍之介),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같은 기성 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코스를 밟아 소설가로 데뷔한 사람이다.

'나만의 특수한 사고체계'라는 말 속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직업 음악가가 아닌 사람 중에서 하루키만큼 음악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풍부하고 깊은 사람을 찾기 힘들 것이다. 현존하는 세계의 작가들 중 하루키만큼 음악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은, 단연코 한 명도 없다. 록, 팝, 재즈, 클래식을 비롯해 심지어 보사노바까지 그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그는 10대부터 20대까지 음악 속에 빠져 살았다. 재즈나 실컷 들으면서 살고파 명문대학을 나오고도 회사에 취직하지 않고 재즈카페를 차린 사람이다.

음악은 만국 공통언어다. 음악은 장대높이뛰기 선수처럼 인종‧종교‧언어라는 가로대를 사뿐히 뛰어넘는다. 일찍이 쇼펜하우어는 "예술의 최정점에 있는 게 음악이며 음악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음악적으로 사고하고 음악적으로 구성하고 음악적으로 문장을 쓰는 사람은 하루키뿐이다. '나만의 특수한 사고체계'는 바로 음악적 사고방식의 세계를 뜻한다. 그의 소설은 50개국 언어로 번역됐다. 아마존강 부족과 시베리아 원주민을 제외하고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그의 소설을 읽는다는 뜻이다.

하루키가 동양인으로 세계문학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인간 본성에 관한 주제를 음악적 리듬으로 문장을 풀어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뉴스1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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