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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쿨파] 미중 무역전쟁이 소환한 한국전쟁의 기억

(서울=뉴스1) 박형기 기자 | 2019-05-21 07:30 송고
한국전을 다룬 중국 영화 '영웅의 자녀들' 포스터 © 뉴스1
한국전을 다룬 중국 영화 '영웅의 자녀들' 포스터 © 뉴스1

미중 무역전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중국 CCTV가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를 긴급 편성해 방영하고 있다.
중국은 한국 전쟁을 승리한 전쟁이라고 여긴다. 중국 공산당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방영함으로써 반미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중국이 세계유일 초대강국 미국에 맞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는 자신감을 국민에게 심어줌으로써 본격적인 무역전쟁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한국전쟁을 승리한 전쟁이라고 생각할까? 시계를 약 70년 전으로 돌려보자.

한국전쟁이 발발한 때는 1950년이다.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해방한 시점은 1949년이다. 당시 중국은 수십 년간의 국공내전을 끝내고 국가를 정비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나라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전에 참전하는 것은 무리라며 반대가 거셌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생각은 달랐다. 마오가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미군이 주둔하는 한국과 국경을 맞대는 것이었다. 마오는 미국이 한반도를 점령한 이후 베트남까지 점령해 미군을 주둔시키면 유사시 만주와 운남성 양면에서 미국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문루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발표하는 마오쩌둥 - 바이두 갈무리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문루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발표하는 마오쩌둥 - 바이두 갈무리

당시 미군이 평원(평양~원산)선에서 진군을 멈췄다면 중국은 한국전에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군이 압록~두만 라인까지 진군하자 미군이 주둔하는 한국과 국경을 맞대는 것에 부담을 느낀 마오는 참전을 결정한다.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돕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군은 1·4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군은 압록~두만 라인에서 서울까지 밀렸다. 중공군의 전략은 특유의 게릴라 전술이었다. 미군은 중공군의 게릴라 전술에 속수무책이었다.

중공군은 밤에만 낭림산맥을 타고 이동하는 게릴라 전술을 펼치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갑자기 나타나 미군을 괴롭혔다.

당시 미국과 중국의 전력 차는 말 그대로 천양지차였다. 중공군은 공군은 물론 해군도 없었다. 중국이 대만을 수복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해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대륙을 해방시킨 뒤 해군이 제 모습을 갖추면 대만을 점령하려 했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 중국은 한국 전쟁에 참전한 대가로 대만을 수복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당시 전력은 미국의 압도적인 우세였지만 양국은 38선에서 휴전했다. 무승부인 셈이다.

그런데 중국은 한국전쟁을 승리한 전쟁이라고 본다. 중국이 참전한 시점, 미국은 압록~두만 라인까지 진격했었다. 그런데 중공군이 참전함으로써 미군은 38선까지 밀렸고, 결국 38선에서 휴전했다. 이같은 이유로 중국은 한국전쟁을 승리한 전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전쟁은 중국이 천하무적 미국에 맞서 밀리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키기에 아주 좋은 소재인 것이다.

중국 당국이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긴급 편성해 방영하는 것은 미중 무역전쟁의 장기전을 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현대 중국인들이 가장 열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서방에 대한 복수다.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종이 호랑이임이 판명됐다. 중국은 서구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중화민족이라는 자부심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중국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중화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중화민족의 자존심이 회복된다면 어떠한 고통도 감내할 수 있다는 것이 중국인들의 일반적 정서다. 

미중 무역전쟁의 장기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철저히 대비해야 할 시점이다.

 
 



sino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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