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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의 페르시안 나이트] 2. 페르시아 제국의 원형질 파사르가드

(울산=뉴스1) 이상문 기자 | 2016-05-06 08:08 송고
파사르가드로 가는 고속도로변의 사막 지역. 험준한 돌산이 낯선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란 대부분의 지역은 이런 삭막한 사막 지형이다. © News1 이상문 기자.
파사르가드로 가는 고속도로변의 사막 지역. 험준한 돌산이 낯선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란 대부분의 지역은 이런 삭막한 사막 지형이다. © News1 이상문 기자.

사막도시 야즈드에서 ‘詩와 장미의 도시’ 시라즈로 가기 위해서는 10시간 정도 버스에 시달려야 한다. 그러나 창밖으로 펼쳐지는 이란의 황량한 사막은 버스에 올라탄 이들을 압도한다. 헐벗은 돌산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바싹 마른 사막을 가로질러 굵은 핏줄처럼 고속도로가 뻗어있다. 그 모습을 두고 이란을 ‘열사의 나라’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지구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낯선 풍경처럼 여겨지는 특이한 모습의 사막이 지루하게 느껴질 무렵 느닷없이 오아시스 도시가 하나 나타난다. 바로 고대 페르시아 제국 최초의 수도인 파사르가드다.

카루스 대왕이 건설한 아키메네스 페르시아의 왕궁터. © News1 이상문 기자.
카루스 대왕이 건설한 아키메네스 페르시아의 왕궁터. © News1 이상문 기자.

◇위대한 키루스 대왕이 건설한 아키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현장
파사르가드는 이란 남부의 비옥한 오아시스 지대인 ‘파스’의 중심지로 페르시아라는 제국의 이름이 여기서 비롯됐다. 이 도시는 B.C. 546년 키루스 대왕(B.C. 600~B.C. 529)이 건설했다. 구약성서에 전하는 고레스왕이 바로 키루스 대왕이다. 키루스라는 이름은 ‘태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의 태양신 숭배사상과 무관하지 않은 이름이다. 그는 B.C. 539년 바빌론의 벨샤자르왕이 베푼 연회에서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 제국을 창건했다. 세계사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기록된 아키메네스 페르시아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키루스 대왕은 이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그는 제국을 세운 후 지금의 터키 지역의 리디아국과 이라크 지역의 바빌론까지 점령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한다. 수많은 이웃나라들과 부족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면서도 그는 어떻게 하면 이들을 평화롭게 다스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그만의 독특한 통치법을 생각해 냈다. 바로 자신이 정복한 나라의 문화와 왕조의 전통, 종교를 존중하면서 새로운 제국의 억압을 실감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키루스 대왕은 거대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군 바빌론을 점령한 후에 칙령을 내려 바빌론에서 끌려온 유대인을 풀어준다. 이 사실은 구약성서 에스라서 제1장에 소상하게 기록돼 있다. 그는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키루스 대왕이 유대인들로부터 찬양을 받는 이유다.
그는 적국이었던 그리스에서도 군주로 칭송을 받았다. 그 까닭은 다름이 아니다. 바로 관용과 융합, 유화정책 덕분이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르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사를 다룬 ‘역사’에서 “페르시아 사람들이 말하기를 다리우스는 상인이고 캄비세스는 장인인 반면 키루스는 아버지라고 칭송한다. 왜냐하면 다리우스는 늘 어떤 결과나 이익을 중시 여겼고 캄비세스는 거칠고 가혹했지만 키루스는 자상하게 배려해 줬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키루스 실린더’의 복제품. 테헤란의 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 News1 이상문 기자.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키루스 실린더’의 복제품. 테헤란의 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 News1 이상문 기자.

◇관용과 배려의 정치 편 ‘성군’ 키루스 대왕

그런 키루스 대왕은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최초의 선언을 한다. 여러 민족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바빌론 주민의 생계를 향상하며 포로로 끌려온 민족과 그들이 가진 종교적 상징물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자신의 군인들이 점령지 백성들에게 위협을 하거나 약탈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자신의 개혁 의지를 점령지에 전하고 개혁하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인 셈이다.

키루스 대왕의 통치이념이 담긴 이 선언은 길이 23cm, 지름 10cm 크기의 석조 원통에 쐐기문자로 쓰여 있다. 이 원통을 ‘키루스 실린더’라고 한다. ‘키루스 실린더’는 1879년 이라크 바빌론 고대 신전에서 이라크 모술 출신의 영국인 호르무즈드 라삼이 발견했다. 그리고 영국 대영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이 됐으며 뉴욕의 UN본부에도 복사품이 전시돼 있다. 키루스 대왕의 선언은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에 영향을 줬고 토마스 제퍼슨이 기초한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본 철학으로 작용했다.

2010년 ‘키루스 실린더’는 고향인 이란을 찾아 테헤란에 있는 국립박물관에서 4개월간 전시됐다. 1971년 팔레비 국왕 시절 페르시아 제국 건설 2500주년 기념으로 대여 전시한 후 39년만의 일이었다. 대영박물관의 임대전시 형태로 열린 전시를 계기로 이란 국민들은 영국을 향해 자신들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반납하라고 졸랐지만 영국은 외면했다.

전시를 위해 ‘키루스 실린더’가 그해 9월 10일 테헤란에 도착했을 때 마흐무드 아마디네자드 당시 이란 대통령은 키루스 대왕을 ‘세계의 왕’이라고 표현했다. 호메이니가 혁명을 이루고 난 후 이슬람이 지배한 페르시아 이전의 페르시아와 관련된 표현을 극도로 자제한 것에 비한다면 매우 이례적인 표현이었다. 그만큼 ‘키루스 실린더’는 이란뿐만 아니라 세계가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다. ‘키루스 실린더’를 영국에 반환한 이후 이란은 실물 크기의 복제품을 제작해 국립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파사르가드에 있는 키루스 대왕의 무덤.  © News1 이상문 기자.
파사르가드에 있는 키루스 대왕의 무덤.  © News1 이상문 기자.

◇바벨탑 본뜬 무덤 알렉산더도 손 못 대

파사르가드에는 키루스 대왕의 무덤이 실존한다. 시라즈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버리고 파사르가드 이정표를 따라 진입하면 곧바로 허허벌판에 강건한 대리석 건조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키루스 대왕의 무덤이다. 1821년 클라디우스 제임스라는 고고학자가 이 건조물이 키루스 대왕의 무덤이라고 선언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예언자 솔로몬의 어머니의 무덤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중세 기독교인들인 이 무덤을 중요한 순례지로 여겼다. 클라디우스 제임스는 이 무덤에 인접한 왕궁 터에서 발견된 비문에 ‘나는 아키메네스 왕 키루스다’라고 쓴 쐐기문자로 이 무덤이 키루스 대왕의 무덤이라고 확정했다.

아키메네스 왕조의 왕궁터에 있는 조로아스터 신전 ‘탈이 타흐트’ © News1 이상문 기자.
아키메네스 왕조의 왕궁터에 있는 조로아스터 신전 ‘탈이 타흐트’ © News1 이상문 기자.

◇덧없이 역사는 흘렀지만 페르시아는 건재한다

키루스 대왕의 무덤은 한 눈에 봐도 튼튼하게 지어졌다. 석회질 대리석으로 만든 이 무덤은 강도 7도의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2500년이 넘는 세월 비바람에 견디고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남은 것은 역시 키루스 대왕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듯하다. 석실 재단의 좌우 길이는 12m, 전체 높이는 11m로 6개의 계단을 만들어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다. 무덤의 실제 높이는 2.11m다. 키루스 대왕은 바빌론을 점령하고 바벨탑에 매료됐고, 바벨탑을 본떠 자신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바벨탑에 비해서는 왜소한 규모지만 그 모습은 바벨탑에 못지않다는 것이 고고학자들의 견해다.

키루스 대왕의 무덤에는 의미심장한 설화가 전한다. B.C. 330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점령했을 때 다리우스왕이 세운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웠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시조격인 키루스 대왕의 무덤을 깨기 위해 파사르가드까지 달려왔다. 그러나 무덤 앞에서 알렉산더 대왕은 멈칫 했다. 무덤 앞의 비문을 읽었기 때문이다. 비문에는 “나 키루스는 한 때 세계를 지배했지만 언젠가는 이 땅이 다른 왕에 의해 점령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점령자여, 그대도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점령당할 것이니 내 무덤을 건드리지 말아다오”라고 쓰여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비문을 읽고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입고 있던 대왕의 옷을 벗어 키루스 대왕의 무덤에 덮어줬다.

 왕궁터에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사원 약할을 한 카바(신성한 돌). 이 카바에 아직도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순례를 온다. © News1 이상문 기자.
 왕궁터에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사원 약할을 한 카바(신성한 돌). 이 카바에 아직도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순례를 온다. © News1 이상문 기자.

키루스 대왕의 무덤을 지나치면 그가 지은 왕궁터가 나온다. 2개의 궁전터와 당시 페르시아인들을 지배했던 조로아스터교의 신전, 연회장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유적들은 페르시아 예술과 건축의 기초를 이룬다. 그 가운데 조로아스터교의 신전인 ‘탈이 타흐트’는 지금은 기단만 남아 있다. 키루스 대왕이 처음 돌로 짓기 시작했지만 그가 사망하자 중단됐다가 다리우스왕이 진흙 벽돌로 완공했다.

이밖에도 비록 잔해들만 남아 있지만 음악당, 연회장 등의 화려한 유적들이 최초의 페르시아 제국인 아키메네스 왕조의 위대함을 잘 설명해 준다. 제국은 사라져 버렸지만 그 역사는 오랫동안 지속됐다. 여전히 중동지역 맹주로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이란의 원형질이다.


iou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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