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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유승민 질곡의 10년 돌아보니…돌아올수 없는 강 건너

朴, 비례대표 초선 劉 '삼고초려'로 비서실장 발탁하며 인연 시작
劉 독자행보 시동 걸며 사이 균열가다 "증세없는 복지 허구" 정면 항명에 배신자 낙인
劉 "내가 TK 적자 탈당 절대 안해" 버텼지만 '고사작전' 압박에 결국 탈당

(서울=뉴스1) 김영신 기자 | 2016-03-23 23:08 송고
(자료사진)
(자료사진)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배신자'로 낙인 찍힌 이래로 꾸준히 낙천 압박을 받던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이 24일 결국 탈당·무소속 출마를 택하면서 박 대통령과 유 의원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하다.
박 대통령과 유 의원, 그리고 이번 권력 투쟁의 다른 한축인 김무성 대표 간 인연의 시작은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대표와 유 의원,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은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 대선후보 캠프에서 각각 비서실장, 정치특보, 여의도연구소장을 맡으며 한솥밥을 먹었다.

박 대통령이 2005년 한나라당 대표를 맡게 되자 김 대표는 당 사무총장, 유 원내대표가 비서실장, 이 실장이 여의도연구소 고문을 맡으며 '원조 친박' 그룹을 형성했다.

현 친박계 핵심 최경환 의원, 허태열 전 대통령 비서실장도 박근혜 대표 체제 아래서 함께한 원조친박이다.
박 대통령은 2004년 비례대표로 국회에 등원한 초선인 경제학자 출신 유 의원을 '삼고초려' 끝에 비서실장으로 발탁해 자신의 지근거리에 뒀다.

2005년 10월 대구에서 재보궐 선거 자리가 생기자 유 의원이 공천을 받는 일종의 '특혜'를 입었는데, 이 배경에도 박 대통령의 든든한 지원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박근혜 사람'으로 거듭난 유 의원은 은혜에 보답이라도 하듯 2007년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 나와 이명박 당시 후보와 경쟁할 때 박 후보 캠프 최선봉에 섰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유 의원은 친박을 자처하며 '이명박 저격수' 행보를 이어갔다. 이명박 정부 후반기에 치러진 2011년 7월 전당대회에서는 "박근혜를 위한 1표를 달라"는 프레임을 내걸어 전당대회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정치권은 유 의원이 이처럼 박 대통령의 후광을 업고 정치적 몸집을 키운 2011년을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한 결정적 시기로 꼽는다.

2012년 대선을 1년 앞둔 2011년 10월, 한나라당은 서울시장 선거 패배와 '디도스 공격' 파문으로 위기에 놓여 있었다.

당내에서는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하고 2선으로 물러나있던 박 대통령이 '조기 등판' 해야한다는 요구가 나왔는데, 박 대통령은 당시 이미 대세론이 형성된 상황에서 조기 등판을 꺼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 의원이 "당 쇄신"을 외치며 최고위원 사퇴를 감행하며 홍준표 대표 체제 붕괴를 초래했다. 이는 박 대통령의 조기 등판을 앞당긴 결과를 낳았다.

원치않게 당 비상대책위원회를 맡게 된 박 대통령은 이때에 자신의 의중을 알고도 정반대의 행보를 한 유 의원에 대해 갸우뚱 했다고 한다.

이어 박근혜 비대위 체제에서 당명 개정과 관련 논란이 일어날 당시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개정하자는 박 대표의 제안을 유 의원이 공개비판하며 두 사람 사이에 큰 파열음이 났다.

친박계 내부에서는 박 대통령과 유 의원이 틀어진 시기가 사실 2011년이 아닌 2007년 대선 경선 때부터였다는 말도 나온다. 경제학자 엘리트이면서 자기 주장이 강한 유 의원의 직언과 주변 참모들과의 트러블에 대해 박 대통령이 일찍부터 불편해했다는 것이다.

2012년 말 치러진 18대 대선에서 유 의원은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중책을 맡지 못하고 겉돌았다.

유 의원은 19대 국회 초반에는 물밑에서 정중동 행보를 펼쳤지만 그의 입에서 이따금 튀어나오는 '반박'(反朴) 발언들은 박 대통령의 심기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친박계가 유 의원이 일찍부터 언론 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의도적으로 '반박 플레이'를 했다고 의심하는 지점이다.

일례로 2013년 10월 국회 국방위원장이었던 유 의원은 박 대통령의 핵심 공약인 비무장지대 세계평화공원에 대해 "굉장히 황당한 단계"라는 작심 비판을 쏟아냈다.

같은해 철도파업에는 박 대통령이 주변 참모들의 잘못된 조언을 따르고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고, 2014년 초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조작 논란' 때는 여권 핵심부의 기류와 달리 남재준 당시 국정원장의 해임론에 힘을 실었다.

유 의원이 19대 국회 후반기에 원내대표에 출마할 것이라는 설이 기정사실화한 때에 청와대와 박 대통령을 향한 비판이 잇따라 내놓으며 '독자행보'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다 2015년 2월 유 의원이 여당 원내대표에 올랐다. 

유 원내대표는 첫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박 대통령을 향해 "증세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정면 비판했다. 이는 박 대통령에 대한 반기로 해석됐다.

친박계에서는 "유승민을 그냥 두면 안되겠다"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유 원내대표는 또한 사드 이슈, 정무특보 임명 등 거의 모든 현안서 청와대와 다른 톤의 목소리를 냈다. 

쐐기를 박은 사건은 국회법 파동이다.

청와대가 "공무원연금개혁 처리를 미뤄도 좋으니 국회법 연계는 안된다"고까지 반대했는데도 여야 협상이 타결됐고, 그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결국 박 대통령은 '거부권'을 선언하는 초강수를 내던졌다. 

박 대통령은 유 원내대표를 배신의 정치로 몰아세웠고, 유 의원은 결국 원내대표 당선 4개월여 만에 내려와야했다.

유 의원은 사퇴의 변에서도 박 대통령을 한마디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조항을 읊었다. 친박계가 박 대통령을 반헌법적인 지도자로 매도하는 것이냐고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유 의원의 원내대표 사퇴 후 정치권의 이목은 그의 새누리당 20대 총선 공천 여부로 쏠렸다.

유 의원은 강연 등에서 "내가 TK적자", "상향식 공천이 원칙" 등이라며 물갈이 칼끝을 방어했지만, 결국 박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지 10년 만에 완전한 결별을 하게 됐다.

청와대와 친박계 핵심부에서는 유 의원을 공천에서 배제시킬 때 초래될 여론 역풍에 대해서도 상당한 고민을 했으나 결국 '아웃'을 택한 이유는 총선 후 여권 권력 지형과 맞닿아있다.

유 의원이 가까운 의원들과 함께 20대 국회로 귀환한다면 19대 때 보다 더 큰 세 규합을 하며 박 대통령과 각을 세울 것이 뻔하다.

특히 유 의원이 차기 당권 주자 겸 대선 주자로 분류되는 데 대한 경계심도 팽배한 듯하다. 박 대통령과 연고지가 같은 유 의원이 지지도를 끌어올 경우 박 대통령의 레임덕을 가속화하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제기돼왔다.


eriw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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