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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다' 말해도 폭행 없으면 강간 무죄"…법원 판결에 논란 예상

"의사 반하는 유형력 사용 여지 있지만…저항 억압할 정도 아니었다"
대법 기준 따른 판결…"'성적 자유결정권 보호' 입법취지와 배치" 비판

(서울=뉴스1) 김수완 기자 | 2015-11-08 07:30 송고
© News1 최진모 디자이너

여자친구가 "싫다"는 의사를 표시했는데도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가진 남성에게 법원이 강간죄를 인정하지 않는 판결을 내려 논란이 예상된다.

상대방이 성관계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어도 반항을 억압하거나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없었다면 강간죄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 법원의 일관된 기준에 따른 판결이다.

서울고법 형사11부(부장판사 서태환)는 강간상해, 강간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에 대해 원심과 같이 상해 혐의만 유죄로 인정하면서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고 8일 밝혔다.

피해자 B씨가 주장하는 A씨의 첫 강간 범행은 뚜렷한 폭행·협박이 없는 상황에서 일어났다.

당시 A씨와 연인관계였던 B씨는 얼굴도 마주하기 싫어 등을 돌리고 누웠지만 B씨로부터 계속 성관계를 요구당했다. "하지 마라"는 의사를 분명하게 표시하고 달라붙는 A씨를 밀쳐내기도 했지만 강압적인 태도가 계속되자 결국 거부를 포기하고 성관계를 갖게 됐다는 것이다.

B씨가 주장하는 두번째 강간 범행은 폭언, 폭력적 행위가 있었던 직후 일어났다.

A씨가 "내가 네게 쓴 돈이 얼마냐, 미친 X, XX같은 X" 등의 욕설을 퍼붓고 나간 뒤 10~20분 뒤 돌아와 성관계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A씨는 욕설을 할 당시 B씨 얼굴에 담뱃불을 갖다대려는 행위를 했고 주먹으로 벽을 치기까지 했다. B씨는 혼자 남은 채 울다가 A씨가 다시 폭력을 휘두를 것이 무서워 "내가 잘못한 것 같아서 울었다"고 말했고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1·2심 재판부 모두 A씨의 이런 행위에 대해 "강간죄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피해자의 반항을 억압하거나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없으면 강간죄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 법원의 일관된 기준 때문이다.

현재 우리 법원은 형법이 정하고 있는 폭행·협박의 정도를 여러 단계로 나눠 해석하고 있다.

공무집행방해죄, 강요죄에서는 사람을 직접 때리지 않고 주변의 물건을 때리거나 위협을 가하는 '간접 폭행'이 있었어도 범죄 성립을 인정한다. 또 폭행죄에서는 사람의 몸에 직접 폭행이 가해질 경우 범죄 성립을 인정한다.

하지만 강간죄에 있어서는 유독 '피해자의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이 있어야 범죄가 성립한다고 보고 있다.

상대방이 "안된다"라는 의사를 밝혔는데도 성관계를 가질 경우 강간죄가 성립한다고 보는 상당수 국가와 비교된다.

A씨 사건을 맡은 재판부 역시 같은 기준을 적용했다. 즉 B씨가 아무리 "성관계가 싫다"는 뜻을 밝혔어도 B씨 저항을 억압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없었다면 강간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A씨가 B씨의 의사에 반할 정도의 힘을 행사해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볼 여지는 있다"면서도 "B씨 반항을 억압하거나 곤란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강간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또 두번째 강간 범행에 대해서도 "A씨 폭력 때문에 심리적으로 억압된 상태가 계속됐다면 A씨가 돌아왔을 때 방에 들어오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10~20분 사이 B씨가 심리적으로 안정돼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우리 법원의 이런 강간죄 해석론에 대해서는 법조계 안팎의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강간죄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려는 법 조항이라면 폭행·협박의 정도는 유죄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고, '성관계 여부에 대한 동의권'이 침해당했다면 곧바로 강간죄가 성립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즉 '가해자가 얼마나 심한 폭력을 행사했느냐'는 피해자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기준이기 때문에 강간죄가 보호하려는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또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당했는지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얼마나 저항이 곤란했느냐'를 제시하는 것은 '여성의 정조'를 보호하기 위해 강간죄 조항을 마련했던 가부장주의 시대 형법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반면 폭행·협박의 정도를 기준으로 삼지 않으면 실제 강간 범행이 일어났는지를 알기가 곤란하다는 의견도 있다. 피해자의 말만 듣고 '형사처벌'이라는 무거운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지적이다.

서울 지역의 한 판사는 "많은 강간 사건은 가해자와 피해자 둘만 있는 상황에서 일어난다, 물적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강간 범행을 인정하기 곤란한 경우가 많다"며 "강간죄 형량이 높다 보니 유죄를 인정하는 데에 더욱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또 "법 조항 자체가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한 요건으로 '폭행·협박'을 요구하고 있다"며 "'폭행·협박'이 없는 상황이라면 형법 규정상으로도 강간죄로 처벌하는 것은 어렵다"고 설명했다.

입법론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시각도 있다. 한 성폭력 사건 전문 변호사는 "형법 문언상 '폭행·협박'을 요구한다면 폭행·협박 없이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가 있는 상황을 처벌하는 조항을 만들면 될 것"이라며 "강간죄의 형량이 지나치게 높다면 폭행·협박이 없는 강압적 성관계에 대한 처벌 조항을 따로 마련해 형량을 조정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명숙 여성변호사회 회장은 "강간죄의 형량이 너무 높다 보니 재판부가 개별 사건 별로 유죄 판단을 신중히 할 수밖에 없는 고충도 이해한다"면서도 "강간죄에 있어 '폭행·협박'은 넓게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가해자의 평소 폭력적인 성향, 가해자와 피해자 두 사람의 평소 관계, 강간 범행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면 강간죄 성립을 인정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이 사건과 같이 연인관계, 부부관계 사이에서 일어난 범행이라면 폭행·협박을 더욱 넓게 인정해야 한다"며 "평소 친분관계가 있었다면 피해자는 가해자의 눈빛·행동만 봐도 이후 폭력이 일어날 상황을 알 수 있어 친분관계가 없었던 경우보다 피해자의 의사가 더 쉽게 억압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ability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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