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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방문지]<4>서소문 순교 성지…시복 124위 중 27위 순교

정약종·강완숙·정철상 등…평신도 대표 순교지,103위 성인중 44위 순교

(서울=뉴스1) 염지은 기자 | 2014-08-09 10:18 송고 | 2014-08-11 10:47 최종수정
서소문 성지.(약현성당 제공)© News1
서소문 성지.(약현성당 제공)© News1

교황 방한 3일째인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릴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시복 미사'에 앞서 서소문순교성지를 참배한다.

교황은 이날 숙소인 주한 교황청 대사관을 출발해 오전 8시55분 서소문순교성지에 도착, 현양탑에서 순교자들을 참배한 후 오픈카를 타고 광화문 광장으로 이동한다.
서소문순교성지는 천주교 평신도가 처형된 대표적인 장소다. 한국 103위 성인 중 44위, 이번에 시복되는 124위 중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 여성 평신도의 대표적 인물인 강완숙, 조숙·권천례 동정부부 등 27위가 순교한 곳이다.

서소문 밖은 바로 임금의 궁성이 있는 한양의 공식 처형지였다. 사형수들은 주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형이 집행됐는데 유교 경전에 따라 형장은 사직단 우측에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다. 경복궁에서 바라볼 때는 서소문성지는 바로 사직단(지금의 사직 공원에 위치) 우측이었다.

또한 서소문은 광희문(남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신을 밖으로 운반할 수 있는 시구문 역할을 했으며 칠패 시장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으로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는 효과도 있었다.
최종 판결을 내리는 형조나 의금부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형장으로는 적격인 곳이었다.

서소문 밖 형장에서 한국 천주교회 순교자들이 순교하기 시작은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초기부터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들인 정약종(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최창현(요한), 강완숙(골룸바) 등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한국 교회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베드로)도 바로 이곳에서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구쳐도 연못에서 다한다.(月落在天水上池盡)"라며 굽히지 않는 신앙을 증거했다.

이들 외에도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달레 신부(1829~1878)의 '한국 천주교회사'에서는 서소문 밖 처형장에서 순교하신 순교자들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처형이 결정된 신자들은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한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렸다. 십자가의 높이는 여섯 자 정도로, 신자들은 양팔과 머리칼만 잡아 매인 채 발은 발판 위에 놓여지게 된다. 수레가 광화문통을 옆으로 지나 서소문에 이르면 그다음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이때 사령들은 신자의 발이 놓여 있는 발판을 빼내고 소를 채찍질하여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게 하였다. 수레는 무섭게 흔들리고 신자의 몸은 머리칼과 팔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을 받게 된다. 형장에 이르면 옷을 벗기고 꿇어 앉힌 뒤 턱밑에 나무토막을 받쳐 놓고 목을 잘랐다."

서소문 밖에서의 순교사는 대략 세 단계로 나뉜다. 첫 단계는 신유박해 초기, 지도층 신자들을 대상으로 시작됐다. 1801년 2월 26일에는 첫 순교자가 서소문 밖에서 탄생한다. 한국 교회의 반석인 이승훈과 명도회의 초대 회장인 정약종 등 6명이 순교했다.

그로부터 석 달 뒤에는 여회장 강완숙 등 남녀 신자 9명이 순교했다. 10월과 11월에는 '백서' 사건과 관련해 황사영(알렉시오), 현계흠(플로로), 황심(토마스) 등 5명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기해박해 때로 1839년 4월 12일에 성 남명혁(다미아노) 등 5명과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던 성 김아기(아가타) 등 4명이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6월 이후에도 계속 순교자가 나왔으며  8월 15일에는 성 정하상(바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이곳에서 참수됐다.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정하상은 미리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상재상서'(上帝相書)를 작성해 품 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조정 관리들이 발견해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진교(眞敎)'라는 호교론이 알려지게 됐으나 박해로 눈이 먼 그들은 이를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기해박해 때의 처형은 11월 24일에 성 정정혜(엘리사벳) 등 7명이 순교한 후 끝나게 된다. 그 이후의 처형은 설날 대목장을 처형으로 망칠 수 없다는 칠패시장 상인의 하소연으로 당고개에서 시행됐다. 

세 번째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대표적인 인물은 남종삼 성인과 전장운 성인 등이다. 

한국 천주교 역사상 최대의 박해임에도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가 적은 이유는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신자들을 체포하거나 투옥하고 처형했기 때문이며 병인양요의 영향으로 한양의 천주교도 처형이 잠두봉(지금의 절두산)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새남터가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를 비롯한 성직자들의 순교터였다면 서소문 순교성지는 평신도들의 순교터다.

서소문 순교성지에 대한 관심은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사업 중 시성식을 준비하면서 되살아나게 된다. 1984년 12월 22일 임송자(리타) 작가가 제작한 서소문 순교자 현양탑을 건립함으로써 서소문 성지 조성 사업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하지만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진 곳이 국유지인 서소문 공원 안이라는 한계로 인해 순례객을 위한 아무런 편의 시설도 갖추지 못했고 안내 체계 역시 미흡해 순교성지로서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하고 서소문순교성지는 다시 잊혀지게 된다.

이후 1997년 서소문 공원이 새로 단장되는 것을 계기로 첫 번째 순교자 현양탑은 약현성당 내 기도 동산으로 옮겨졋고 1999년 새로운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졌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조광호(시몬) 신부(화가·가톨릭 조형 예술연구소 대표)를 중심으로 건축가 임근배씨와 설치작가 전종철씨와 함께 3년 동안의 작업을 거쳐 1999년 5월 현양탑을 완성했다. 

2008년 4월 18일엔 현양탑 앞에 상설 제대가 설치 됐으며 매해 9월 순교자 대축일이면 이 현양탑 앞에서 '서소문 순교자 현양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또한 2010년 3월부터 매주 금요일 10시면 순교자를 기억하는 성지미사가 현양탑 앞 광장에서 봉헌되고 있다. 

2011년 2월 현양탑 옆에 서소문 성지 안내소가 설치되고 안내 봉사자가 배치돼 순례자의 순례를 돕고 성지를 보호하고 있다. 서소문 순교자 현양탑은 지난해 상반기에만 3만1000명이 순례하며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로 되살아나고 있다.

한편 1891년 박해가 끝나고 교회의 전통에 따라 서소문 성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에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약현성당(주임신부 이준성)이 세워졌다. 

약현성당은 명동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는 명동성당 설계의 핵심을 담아 1891년 10월 건축을 시작, 착공 1년 만인 1892년 건축했다. 1898년 종현에 세워진 명동성당 보다 6년 먼저 세워진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 교회 건축물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사적 제252호). 

당시 교구장던 뮈텔주교는 견고한 성당을 짓기 위해  왕궁의 기와를 굽던 가장 좋은 흙인 와서현(지금의 국군 중앙성당)의 흙을 사용했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해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 성인과 최형 베드로 성인의 시신이 약 43년간 묻혀있던 곳이다. 순교성인의 살과 피로 세워진 성당인 것이다. 

이후 교회의 발전 속에서 약현성당은 90여개 성당의 모태가 됐다.




senaj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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