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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메밀꽃 필무렵' 평창 대화면 박호영 집배원

강원지방우정청 오지마을 집배원 탐방⑥

(강원=뉴스1) 권혜민 기자 | 2014-06-24 02:06 송고
편집자주 강원지방우정청과 뉴스1 강원취재본부는 강원도 오지 산간마을을 다니며 우편물을 배달하는 집배원들의 하루 일과와 가족같은 사이가 된 집배원과 주민들간 미담사례 등을 매월 취재해 연재한다.
강원 평창군 대화우체국 박호영(50) 집배원(오른쪽)과 대화면 개수리 마을주민.(사진제공=강원지방우정청) © News1 권혜민 기자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흔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설의 배경이 된 곳은 강원 평창군 대화면이다. 메밀꽃이 피는 가을이 오면 평창 대화면은 메밀꽃이 하얀 물결을 이루는 장관을 뽐낸다.

기자는 강원지방우정청 관계자와 함께 산간오지마을 집배원 여섯 번째 이야기 취재를 위해 23일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 평창 대화면 개수리를 찾았다.

대화우체국에는 대화면 개수리 지역 170여가구 250명의 우편배달을 담당하고 있는 박호영(50) 집배원이 있다. 이날 박 집배원이 배달해야 할 우편물은 신문, 개별공시지가 통지서, 등기·소포 등 230여통에 달한다.

배달에 앞서 그는 “개수리는 총 12개의 큰 골로 이뤄져 있어요. 다 둘러보려면 바쁘게 다녀야 합니다. 승용차로는 힘들 텐데요”라고 말한다.

개수리는 외솔배기(외솔나무) 밑 깊은 냇물에 소(沼)가 있다고 해서 ‘개소’라 불리다 1916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개수리’라는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됐다. 이곳은 대부분이 산지로 이뤄져 있고 해발 600m가 넘는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해있다.
대화우체국에는 대화면 개수리 지역 170여가구 250명의 우편배달을 담당하고 있는 박호영(50) 집배원이 있다. (사진제공=강원지방우정청) © News1 권혜민 기자


박 집배원의 첫 번째 배달지역인 개수2리. 강한 햇살과 거목의 푸른 나뭇잎들이 여름이 왔음을 알려준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이 작은 마을에 아름다운 펜션단지가 들어섰다. 그래서 마을 주민 대부분이 외지인이다. 토박이는 5가구에 불과하다.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정년퇴직을 하고 몇 해 전 이 마을에 정착한 강경희(64), 최진수(63) 부부를 만났다. 부부는 골 끝 산 중턱까지 올라오는 집배원에게 커피라도 한 잔 대접해야 한다며 박 집배원을 붙들었다.

부부는 이곳에서 겪은 아찔한 경험을 꺼내 놓는다. 부부는 “겨울눈도 위험하지만 정말 위험한 건 여름철 폭우”라며 “이곳은 상류지역이라 비가 내리면 물이 삽시간에 불어난다. 불어난 물이 계곡을 쓸어버리기 때문에 산사태가 염려돼 잠도 못잔 적이 많다”고 토로했다.

얘기를 듣고 있던 박 집배원도 “계곡물이 조금 불어 안심하고 건넜다가 배달을 마치고 다시 나올 때는 허리까지 물이 차올라 떠내려갈 뻔했다”고 얘기를 덧붙인다.

개수리는 금당계곡 입구에 있다. 금당계곡은 금당산을 끼고 도는 계곡으로 봉평면과 대화면에 걸쳐있으며, 계곡의 유속이 빨라서 래프팅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다. 지금은 가뭄 때문에 물 양이 많이 줄었다.

두 번째 골 끝에서 만난 소철순(60) 씨. 소씨는 “여기 산 꼭대기까지 우편물을 갖다 주시니 미안한 마음 어쩔 수 없네요”라며 비포장 산길 끝까지 올라오는 집배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미안함으로 표현했다.

군무원이었던 그는 퇴직 후 이곳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고 했다. 집 앞 너럭바위에 앉아서 풍경을 잠시 감상하고 있다 보니 말로만 듣던 풍수의 길지가 이런 곳인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퇴직을 십여 년 앞두고 풍수지리를 공부하던 중에 만났다는 곳이다.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말처럼 들렸다.

계속되는 커피인심과 불러오는 배, 거절하기가 힘들다. 떠나려던 박 집배원에게 그는 “산간 오지마을 집배원은 주민들 삶에 공기 같은 존재에요. 깊은 산 중턱까지 우편물을 전해주는 집배원은 나에게 산소 같은 존재입니다”라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강원 평창군 대화면 개수리에는 지금 메밀꽃 대신 감자꽃이 활짝 피었다.(사진제공=강원지방우정청) © News1 권혜민 기자

이번에는 반대편 골짜기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비포장 길을 거침없이 올라가다보니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메밀꽃 필 무렵’ 속 메밀꽃은 9월에 절정을 이루지만 6월에 찾은 개수리에는 감자 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골 끝자락에 사는 오두막 민박집 주인을 만났다. 정자에 앉아 숨을 고르다보니 집 주인 김종식(57)씨가 나타났다.

김씨는 “손님들이 조용해서 좋다며 여름철에는 많이들 옵니다”라며 깨알 같은 자랑과 함께 민박집 광고까지 한다. 전화업무를 우체국에서 담당하는지 아는 그는 “편지는 잘 오는데, 휴대전화는 왜 안 터지는지 모르겠다”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잠시 후 도착한 집은 김종하(46) 씨의 집이다. 박 집배원의 방문에 환한 표정을 지으며 냉장고에서 얼음장 같이 시원한 캔 커피를 내왔다.

처음에는 누가 왔느냐며 경계를 하던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편안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집배원은 마을주민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김씨는 “서로를 알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맘을 조금씩 이해하는 것”이라며 대화를 이어갔다.

박 집배원이 공공요금 고지서를 내밀자 김씨는 “배달하지 말고 형님이 그냥 내시면 되잖아요”라며 농담을 건넸다. 종하 씨가 몇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을 때 박 집배원이 각종 공과금을 대신 내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일이 고마운 종하 씨는 고마움을 거친 농담으로 표현했다. 투박한 말투 속에 깊은 정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지금은 문을 닫은 개수분교 선후배 사이다.


대화우체국 박호영 집배원은 개수리 마을주민 250명의 우편 배달을 담당하고 있다. 마을주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귀한 존재다.(사진제공=강원지방우정청) © News1 권혜민 기자


박 집배원은 “시골 집배원은 뜻하지 않은 일로 기쁨을 얻을 때가 있다”며 얘기를 시작했다. 산 중턱에 있는 젖소농장을 지나다 새끼를 낳고 있는 어미소를 발견한 그는 잠시 배달 일을 접고 어미소 배에서 새끼를 끄집어냈던 일화를 들려줬다.

마지막 배달집이다. 차도 지나지 않는 산골도로 한 가운데서 우편물을 받는 김승기(69) 할아버지. 집 앞에는 장작이 쌓여있고 부엌에는 아궁이와 부뚜막, 가마솥이 있는 시골집이다.

할아버지가 방안 구들장에서 누룽지를 건네준다. 박 집배원에 따르면 김씨는 농기계 없이도 1만평이 넘는 밭을 경작하는 부지런한 농부다.

김씨는 어린 시절부터 이곳에 산 토박이다. 6·25전쟁 통에도 이 마을 지킨 터줏대감이다. 수령 500년 집 인근 외솔나무와 닮은 사람이다. 김씨는 밭에서 얻는 소득보다 미국의 유명대학 교수로 있는 자식이 더 뿌듯하다고 했다.

집 옆 2층짜리 현대식 벽돌집을 지었지만 따뜻한 아랫목과 구들장이 있는 옛집이 편하다는 김씨다. 그는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행복한 시골농부인 것 같다.


hoyanarang@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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