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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법정]⑥'존엄한 죽음' 인정한 13년 전 판결…웰다잉 논의는 지속

무의미한 생명 연장보단 헌법 명시된 행복추구권 존중
연명의료결정법 개정안 '조력 존엄사' 두고 찬반 논란

(서울=뉴스1) 온다예 기자 | 2022-07-30 08:00 송고 | 2023-07-14 10:40 최종수정
편집자주 판결은 시대정신이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가치와 때론 나아 가야할 방향을 담고 있어서다. 우리 사회는 짧은 기간 압축적으로 성장하면서 여러 차례 격변기를 거쳤다. 이 때문에 1년 전에는 옳다고 믿었던 시대정신이 오늘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과거와 정반대의 판결이 많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건의 판례를 통해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짚어봤다. [편집자 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 2022.3.14/뉴스1 © News1 김명섭 기자
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 2022.3.14/뉴스1 © News1 김명섭 기자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2009년 대법원의 존엄사 인정 판결은 헌법 10조에 명시된 인간의 존엄과 행복추구권에 주목했다. 회복 가능성 없는 환자에게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강요하는 것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신의 결정에 의해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게 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부합하는 죽음이라고 봤다.
대법원의 판결은 우리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어떻게 인간답게 죽을 지 사회적 논의를 이끄는 계기가 됐고 이후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돼 존엄사의 법적 제도가 마련됐다.

◇ 2008년 김모 할머니 가족의 소송…존엄사 논의 불씨 당겨

뇌사상태에 빠진 김모씨(당시 76세) 가족은 2008년 6월 김씨에 대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라며 신촌세브란스병원의 운영주체인 연세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김씨는 그해 2월 폐암 발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조직검사를 받던 중 과다출혈로 인한 심정지로 뇌손상을 입어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

자녀들은 평소 어머니가 기계장치에 의한 생명유지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며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1심은 "헌법이 보장하는 개인의 인격권·행복추구권에는 자기운명결정권이 전제된다"며 "생명연장 치료가 회복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준다면 의사는 환자의 자기결정에 따른 치료중단 요구를 따라야 한다"고 밝혔다.

1심은 연명치료 중단 결정을 내릴 때에는 △치료가 의학적으로 무의미한지 △환자의 치료중단 의사가 있는지를 먼저 따져야 한다고 했는데 김씨의 경우 가족에게 기계장치에 의지하지 않겠다는 점을 미리 구두로 표시한데다 평소 생활 태도 등을 볼 때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을 의사를 추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심은 김씨의 상태가 거의 뇌사상태에 가까워 회복가능성이 적다는 판단 하에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판결했다.

2심도 다르지 않았다. 김씨가 이미 회생가능성이 없는 비가역(非可逆·본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음)적 사망과정에 진입한 데다 김씨가 사전에 표시한 의사를 보면 인공호흡기 제거 판결을 내린 1심 판단이 정당하다고 봤다.

2심은 "인간의 생명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라는 근원적 가치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보호돼야 한다"며 "환자에게 의학적으로 무용한 처치를 계속받게 하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09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법관 13명 중 9명의 의견으로 존엄사를 인정하고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회복불가능한 사망 단계에 이른 후 환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기초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연명치료 중단이 허용될 수 있다"고 밝혔다. 

대법원 판결 이후 무의미한 연명 치료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해졌고 2016년 2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단계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됐다.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생명연장 치료를 받고 있다고 의사가 판단하면 환자의 의사를 존중해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2017년 당시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이행 기관에서 사용된 연명의료계획서.(자료사진) 2017.10.23/뉴스1 © News1 박지혜 기자
 2017년 당시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이행 기관에서 사용된 연명의료계획서.(자료사진) 2017.10.23/뉴스1 © News1 박지혜 기자

◇ 잘 죽는 법 '웰다잉'…방법·허용범위 두고 논란 지속

2018년 2월 연명의료결정제도가 본격 시행된 이후 연명의료계획을 등록한 인구는 꾸준히 늘고 있다. 말기환자 또는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는 담당의사와 상의해 연명의료 유보·중단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연명의료계획서로 남길 수 있다.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따르면 연명의료계획서 연간 등록건수는 2018년 1만5207건, 2019년 2만923건, 2020년 2만2060건, 2021년 2만2868건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등록 건수는 남성(5만596건)이 여성(3만533건)보다 1.7배 많고 특히 60대와 70대 남성에게서 높게 나타났다.

연명치료에 대한 의사를 미리 남겨둘 수도 있다. 19세 이상 성인이라면 누구나 작성할 수 있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지난해 누적 116만건 이상을 달성했다. 여성(80만4717건)이 남성(35만7077건)에 비해 2배 이상 많다.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는 확산하고 있지만 그 방법과 허용 범위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연명의료결정법 개정안 '조력 존엄사법'이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이 법안은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말기환자가 담당의사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의료계와 시민단체들은 "조력 존엄사가 생명경시 풍조를 만들어 결국 자살률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며 즉각 반발했다.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는 "조력 존엄사는 투약 등의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죽음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 사실상 안락사와 같은 개념"이라며 "경제적 어려움과 우울감에 빠진 말기환자가 잘못된 결정을 하도록 내몰릴 수 있고 결국 자살을 '죽음의 선택'으로 미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된지 4년이 지났지만 현장에선 환자 가족과 의사 사이 이견이 생길 경우 분쟁으로 비화하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기 앞서 현행 제도의 문제점을 돌이켜보고 사회적 합의가 우선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의료법 전문의 한 변호사는 "현실에선 삶을 마감하는 방법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며 "죽을 권리가 죽어야 할 권리로 변질되지 않기 위해선 법적 절차를 명확히 하고 시스템에 대한 감시 체계를 엄격하게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hahaha8288@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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