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강간죄 인정… "시대에 부합한 판결"

대법원, 정상적인 혼인관계서도 강간죄 인정 판결

18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부부 사이의 '강간죄 성립' 여부에 관해 공개변론을 열고 있다. 대법원이 부부강간죄를 인정하게 되면 혼인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부부에 대해 처음으로 강간죄를 적용하는 사례가 된다. 2013.4.18/뉴스1 © News1 박지혜 기자

사회적으로 논란이 일었던 부부강간죄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16일 내려졌다. 대법원의 판단은 '부부간에도 강간죄가 성립된다'다.

이날 대법원은 지난 2011년 아내를 부엌칼로 위협해 강제로 성관계를 가진 혐의(특수강간 등)로 기소된 강모씨(45)에 대해 징역 3년 6월과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명령 10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번에 대법원이 강씨에 대해 강간죄를 인정한 이유는 형법상 강간죄의 객체인 '부녀'에 법률상의 처도 포함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행 형법 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오는 6월부터 '부녀'를 '사람'으로 고친 개정안이 시행된다.

대법원은 또 '부녀'에 법률상 처가 포함되는 경우 혼인관계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가 성립된다고 봤다.

강씨는 피해자인 아내와 한집에서 부부로 살아왔다. 자녀도 두 명 있었다. 범행이 있기 2, 3년전부터 부부싸움을 자주 해왔지만 각방을 쓰는 정도에 머물렀을 뿐 이혼에 합의하거나 따로 떨어져 지내지는 않았다.

강씨 사건에 대한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혼인관계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가 성립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지난 2009년 대법원은 배우자에 대한 강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지만 이때는 이혼할 의사를 서로 확인하는 등 혼인관계가 파탄나 실질적인 부부관계로 인정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됐다.

대법원은 강씨 사건에 대한 판결문에서 "혼인관계가 실질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부부 사이에서 발생하는 강간죄의 수사와 재판에는 특별한 고려가 필요하다"며 "수사나 재판과정에서 모멸감, 배신감 등으로 부부 사이의 정신적 상처가 덧나거나 혼인의 파탄이 촉진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부부 모두 가정을 유지하려는 의사가 확고할 때는 이를 수사나 재판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반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앞으로 남편이 아내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적으로 성관계를 가진 경우 형법상 강간죄 혹은 가정폭력특례법에 따른 가정보호사건으로 처리된다.

대법원은 이와 관련해 "검사와 법원은 아내에 대한 강간죄를 가정보호사건으로 처리할 것인지, 형사사건으로 처리할 것인지 결정할 때 부부 사이에서 발생한 성폭력범죄라는 특수성과 강간죄의 법정형을 고려해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해외의 경우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부부 강간죄를 인정한다. 특히 프랑스는 일반 강간보다 부부 강간을 더 무겁게 처벌한다. 유엔에 따르면 아시아에서 부부 강간을 처벌하는 나라는 8개국이다. 지난 1999년 유엔인권위원회는 한국이 부부 강간죄를 범죄로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해 '깊은 우려'를 표시한 바 있다.

지난 1953년 제정된 형법을 보면 강간죄를 규정한 297조를 담은 제2편 32장에 '정조에 관한 죄'란 제목이 붙어있다. 40년 넘게 이어져 온 이 제목은 1995년 형법이 개정되면서 '강간과 추행의 죄'로 바뀌었다.

대법원은 이에 대해 "강간죄를 통해 보호하는 대상이 현재 또는 장래 배우자가 될 남성의 입장에서 인식될 수 있는 '여성의 정조', '성적 순결'이 아니라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이란 사회의 보편적 인식과 법감정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번 부부강간죄 인정 판결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여성이 갖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법조계로부터 '시대를 반영한 판결'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결혼이 곧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포기했다는 의미로 볼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박상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실상 별거 상태에 있는 사람들도 폭행을 일삼는 경우가 있고 이 경우 남보다도 무서운 관계일 수 있다"며 "부부강간죄 인정은 타당하다"고 밝혔다.

이어 "강압적인 부부관계에 시달리던 배우자들이 고소를 많이 할 거라 본다"며 "시대가 바뀌었고 부부관계라 하더라도 이번 사건처럼 흉기로 위협해 성관계를 맺는 것은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아니다"고 덧붙였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혼인관계든 아니든 폭력을 통해서 성관계를 강요하는 것은 자유로운 성행위가 아니라 폭력"이라며 "부부관계라 할지라도 성적 자기결정권을 철회한 것이 아니므로 이번 판결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고 밝혔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부부라도 남녀가 대등한 지위에 있는 시대 흐름에 부합한 판결"이라며 "법원이 성적자기결정권을 존중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법원의 또 다른 부장판사는 "성(性)에 대한 사회 통념에 부합한 판결이 아닌가 싶다"며 "다만 부부 사이는 성관계에 대한 의무가 있으므로 의사에 반한다고 무조건 강간죄가 성립되는 게 아니라 폭력이 수반될 때에 한해 적용될 것"이라 내다봤다.

hyu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