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의 영화읽기]미나문방구-추억은 방울방울

어릴 적 문방구는 지금의 백화점이나 쇼핑몰 같은 곳이었다. 집과 동네, 학교운동장이 세상의 전부였던 그 시절, 학교 앞 문방구에는 없는 게 없었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지만 '전과'라고 불리는 초등학생용 참고서를 거기서 팔았고, 연필·지우개 같은 각종 필기도구나 탬버린, 짝짝이, 트라이앵글, 리코더, 크레파스 같은 각종 준비물들이 즐비해 있었다.
등교시간만 되면 준비물 구입으로 그곳에선 전쟁이 벌어졌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무래도 자석필통과 흔들샤프. 세상이 아직은 많이 신기할 나이기에 그들의 출현은 놀라움 자체였고,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 탓에 소위 '있는 집 아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가끔 사각의 링에서 펼쳐지는 연필 따먹기 대전을 통해 몽땅 연필이 거대한 무게의 흔들샤프를 따먹는 인생역전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그랬다. 그 시절 문방구는 세상의 모든 즐거움이었다. 남자아이들은 만화가 그려진 종이딱지를 거기서 샀고, 여자아이들은 가위로 오려 옷을 입히는 종이인형에 열광했었다.
손톱이나 연필로 튕겨 공을 움직이는 종이축구, 팽이, 요요, 비누방울, 구슬 등에 대한 추억도 아련하다. 그 때 구슬과 딱지는 어린 우리들에게는 전재산 같은 것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비싼 '부루마블' 게임을 대신했던 서민형 '인생럭키게임'을 통해 장래 부자를 꿈꿨고, 뽑기를 하면서 한 방을 노리기도 했었다.
키가 쑥쑥 자란다는 소문에 '스카이 콩콩'이 전국적인 광풍을 일으킬 때도 문방구가 함께 했었다.
또 당시 전자오락실에 아이들이 몰려들자 오락실에서는 한 물 간 전자 오락기까지 한 쪽 구석에 비치되기도 했었다.
어울리지 않게 먹거리도 많았다. 가장 인기음식은 단연 쪽자. '달고나'라고도 불렸다.
설탕을 가득 넣은 쪽자를 연탄불에 올린 뒤 설탕이 어느 정도 녹으면 소다를 넣는다. 투명한 설탕물은 순식간에 먹음직한 황색크림으로 부풀어 올랐고, 그대로 나무젓가락으로 떠먹다가 혓바닥을 데이기도 했었다.
가끔은 핫도그를 파는 문방구도 있었고, 쫀디기, 호박꿀맛나 등도 맛있었다. 구워먹으면 더 맛났다.
요즘 말하는 일종의 불량식품이지만 어른이 돼서 미친 듯이 하는 술이나 담배보다는 조금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상은 80년대 초반 문방구와 관련된 내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다.
하지만 이렇게 오롯이 살아있는 그 시절의 추억들은 작은 동네와 학교운동장을 벗어나면서 멀어지게 됐다.
경쟁에 휩쓸리고, 살기위해 몸부림치면서 그 시절 '지상낙원 문방구'는 어느새 '문방구 따위'로 변해버렸다.
이젠 문방구에서 내가 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 그래서 갈 일도 잘 없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계속 잃어버리는 것이기도 한 가 보다.
<미나문방구>에서 주인공 미나(최강희)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아버지가 아직도 문방구를 하는 소위 방구집 딸인데도 문방구는 물론 집과도 멀어진 지 오래다.
서울서 공무원 생활하며 고된 날들을 보내지만 그래도 집에 내려가서 살 생각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쓰러지고, 자신은 고액체납자와 싸우다 대형사고를 치면서 피신 겸 고향으로 내려와 아버지가 운영하던 '미나문방구'를 떠맡게 된다.
어린 시설 자신에게 '방구'라는 별명을 붙여준 문방구가 지긋지긋하기만 했던 미나는 이참에 꼴 보기 싫은 문방구를 팔아버리려 한다.
힐링 무비로서 <미나문방구>는 막강한 위력을 갖고 있다. 이미 익숙한 포맷이지만 흡입력 있는 스토리에 남녀노소 배우들의 연기가 잘 버무려져 보는 내내 즐겁다.
하지만 <미나문방구>의 최대 히어로는 뭐니 뭐니 해도 영화상에 등장하는 '소품들'이다.
자석필통, 흔들샤프, 종이인형, 종이딱지, 종이축구, 팽이, 한물 간 전자오락기, 쪽자, 쫀디기, 호박꿀맛나 등등.
영화 곳곳에서 등장하는 깨알 같은 그 시절의 보물들에 스크린은 일순간에 타임머신으로 변한다.
과거가 현재나 미래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바로 '추억' 때문이 아닐까.
그 추억들로 인해 과거는 언제나 엄마 품속처럼 푸근하다. 그 곳에선 현재의 고통도, 미래의 불안도 없다.
심지어 아픈 기억들마저도 더듬어 보면 어느새 아름다운 추억이 돼 있다.
미나의 오랜 친구 강호(봉태규)의 말대로 어린 시절 문방구에서 사먹었던 불량식품도 순수한 시절에 대한 추억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어른이 되서 내가 잃어버렸던 것도 그 때의 보물들이나 기억이 아니라 '순수'였는지 모르겠다. 성숙해진다는 건 가끔 슬픈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가. 해피엔딩인데도 영화가 끝나고 나니 괜히 눈시울이 불거졌다.
영화가 슬퍼서 그런 건 아니니 아마도 그 시절이 문득 그리워서일 게다. 문방구에서 너무 멀리 온 것에 대한 일종의 미안함 같은 것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소품들을 다 어디서 구했을까.
그런데 영화를 보면 알게 되지만 아직도 문방구에는 그 시절의 보물들이 그대로 있는 것 같더라. 다만 내가 찾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16일 개봉. 상영시간 106분.
lucas02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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