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모, 오일장에 가다
[맹모, 제주에 가다 - 이진주의 탐라일기·7]
서울 '마마토모'에서 제주 '맹모'가 되기까지
기념일들이 굴비두름처럼 꿰어 있던, ‘쇼핑의 계절’ 5월도 벌써 끝물입니다. 선물할 데는 많은데 쇼핑할 거리는 마땅찮아, 퍽 고민스런 한달이었어요. 육지의 지인들은 뭐니 뭐니 해도 제주 특산물을 가장 반기시는데, 하필이면 이 달엔 대표선수라 부를만한 게 없었거든요.
‘먹방(먹는 방송)’의 원조 이영돈 혹은 이엉돈 PD처럼 “제가 직접 먹어 본” 바에 따르면, 10월엔 황금향, 1월엔 레드향, 2월엔 천혜향, 3월엔 한라봉이 제철입니다. 4월엔 딸기가 무르익고, 6월부터는 애플망고가 나지요. 설에는 신맛 단맛을 즐기는 취향에 따라 황금향이나 레드향, 천혜향을, 추석에는 애플망고를 보내드리면 딱 맞습니다. 그런데 먼저 나온 과일들은 물이 말라가고 새로 등장한 과일들은 물량이 달리는 제주의 5월엔, 제 아무리 쇼퍼홀릭이어도 쇼핑이 낙이 아니라 고역이 되고 맙니다.
쇼퍼홀릭의 진검승부, 제주오일장 제주 맹모들이 아직 ‘차도녀(차가운 도시 여자)’이던 시절, 그녀들의 선물 리스트에는 귤이나 생선 대신 향수나 초콜릿 같은 물건들이 담겼습니다. 육지에서는 브랜드가 ‘선물의 품격’을 좌우하잖아요. <펜할리곤스> 향수나 <피에르 마르콜리니> 초콜릿, <라뒤레> 마카롱을 선물한다는 건, “나는 당신을 이만큼 존중한다” 또는 “우리는 청담동 라이프를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었지요. 그러나 이곳엔 갤러리아도 애비뉴엘도, 신세계 명품관도 없습니다. 브랜드도 취향도 무의미해지는 곳에서, 바야흐로 쇼핑의 진검승부가 펼쳐지는 셈이죠.
시중의 뜬소문에 따르면, 제주국제학교 엄마들은 외제차 일곱 대를 요일별로 갈아타고, 비행기 타고 다니며 서울-부산-도쿄-홍콩에서 쇼핑하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요, 실제로는 아이들 끼니 챙겨 학교 보내고 숙제 봐주면서 시내 한 번 나가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마트 (혹은 저 마트) 장보기조차 작정하고 나서야 하는걸요.
젖먹이까지 딸린 제가 대안으로 선택한 건 인터넷 쇼핑입니다. 아이들 재워놓고 ‘분노의 검색질’을 통해 가격비교도 하고, 아마존이나 알라딘 같은 해외 사이트에도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들락거립니다. 여기선 구하기 힘든 <레고>의 초록 닌자 ‘로이드’ 열쇠고리도 아마존에서 대량 구매해 큰애 소구리 친구들과 나눠 가졌고요, 체육시간에 필요한 럭비용 마우스피스도, 한정판 ‘싱거’ 미싱이며 100주년 기념으로 모양이 다 다른 ‘로얄 알버트’ 찻잔도, 모두 거기서 싸게 샀습니다. 제주도는 국내 쇼핑몰에선 ‘산간도서지역’으로 분류돼 배송비도 3000원, 5000원씩 더 붙고 배송 기간도 더 늘어집니다. 어차피 그럴 바에야 , 전 세계의 쇼핑몰이 제 손에 있는 듯 주물럭대고 있는 참입니다.
제주시 민속오일장은 2일과 7일에 열립니다. 지난 22일 오후 여섯 시, 파장 무렵 장마당에는 일주일 찬거리를 싸게 사러온 알뜰 주부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습니다. (사진=이진주)
그러나 역시 쇼핑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가며 하는 것이 맛이잖아요. 학교 앞 ‘구억리 주민들’도, 그녀들이 농담 삼아 ‘읍내’라 부르는 제주시나 서귀포시의 엄마들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오일장입니다. 육지에서 내려온 전직 쇼퍼홀릭들에게 이만한 구경거리도 없거든요. 오일장에서 싸게 산 물건으로 ‘요리 배틀’도 벌이고, 동네방네 인심도 쓰고, 소소한 자랑도 하는 게 제주 맹모들의 낙이랍니다.
제주시에서는 2일과 7일, 서귀포시에서는 4일, 9일에 장이 섭니다. 저는 제주시 민속오일장에만 몇 번 가봤는데요, 우선 주차공간이 넓은 것이 육지의 재래시장과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주차 문제만 해결되면, 재래시장 장보기만큼 활력 넘치는 오락이 또 있을까요. 요즘 이른바 ‘패피(패션피플의 줄임말로 연예인 등 패션에 민감한 종족들)’들의 해외여행 트렌드도 이스탄불의 재래시장 ‘그랜드 바자르’나 두바이의 금시장 ‘골드수크’ 체험이라면서요. 워낙에 제가 아이쇼핑은 청담동 갤러리아에서 하고, 레알쇼핑은 동대문 두타(두산타워)에서 하는 시장 마니아이기도 하지만서두요. 엇비슷한 유러피안 꽃다발도 신세계 <제인 패커> 매장에선 10만원인데, 백화점 회전문 앞 지하상가에선 3만원이면 사는 걸요. 오리지널리티도 물론 중요하지만, ‘살림하는 뇨자’가 시장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오일장은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문을 엽니다. 주말과 겹치는 날엔 손님이 많아 차량을 시장 밖에다 세워야 해요. 저도 첫 오일장 나들이 때는 남편이 쉬는 주말에 함께 갔지만, 그 다음부터는 평일 파장 무렵에 혼자 가는 걸로 전략을 바꿨습니다. 큰애 소구리에게 둘째 요구리를 맡기고서요. 파장 무렵에는 주차도 한결 쉽고, 뭐든지 떨이거든요. 아기 손바닥만한 황돔(뱅꼬돔) 13마리를 5000원에도 사봤고, 어른 손바닥만한 뱅꼬돔 9마리를 9000원에도 득템(아이템을 획득한다는 뜻의 게임용어)했지요. 이번 장에선 가재처럼 앞발이 달린 꼬막새우 50마리(에 덤으로 딸려 온 불가사리 한 마리)를 1만원에 싹쓸이해왔습니다. 큰놈은 나중에 구워 먹으려고 밀폐용기에 착착 담아 냉동실에 넣어두고, 작은놈으로는 된장찌개를 끓였는데, 어찌나 뿌듯하던지요. 결혼생활 십 년 만에 살림 우등생으로 거듭난 느낌이었어요.
명품관 헬렌 카민스키 VS. 오일장 고사리 모자
오일장 나들이 미션 클리어! 손에 든 헬렌 카민스키 st. 모자 세 개와 UV 코팅 천 모자 두 개, 고사리 딸 때 쓰는 일 모자까지 도합 여섯 개를 7만 5000원에 사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물론 제가 다 쓰는 거 아니고요, 골고루 선물해 나눠 쓸 겁니다. (사진=<뽄쟁이모자> 황순매 아지매)
사실 이번 오일장 나들이의 미션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모자를 사는 것이었죠. 아이 둘 낳고 나이 마흔을 향해 달려가면서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가르마가 훤해져서 그런지, 요즘 들어 모자에 더 집착하게 됐습니다. 본래도 ‘헬렌 카민스키(호주산 명품 밀짚모자. 헐리우드 여배우들이 좋아한다죠.)’며 ‘루이엘(국내 모자 전문 브랜드. 호텔신라 제주의 부티크에서도 판매해요.)’ 같은 모자 브랜드에 환했는데요, 제주 아지매가 모자를 쓴다는 건 전혀 다른 의미였어요. 파티장이나 휴양지에서 하루 이틀 멋내기용으로 걸치는 게 아니라, 일상을 함께 할 피부 같고 내복 같은 모자가 필요했던 거죠. 제주의 바람, 제주의 습기, 제주의 햇빛에 견딜 수 있는 싸고 괜찮은 모자 여러 개 말이에요.
제주의 햇빛은 말 그대로 수직으로 내리꽂는 ‘직사광선’이어서요, 한나절만 방심해도 일주일 필드 나간 것처럼 타버립니다. 매양 뛰어노는 소구리는 안경 쓴 자리만 허옇게 남기고 새까매졌지요. 처음엔 유기농 매장에서 산 <캘리포니아 베이비> 선크림이며 선컷스프레이를 살금살금 발라주다가,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마트에서 원 플러스 원으로 파는 저렴이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있습니다. 자외선 차단지수 30으론 어림도 없고요, 50은 돼야 한 삼십 분 견디는 정도지요. 운전하는 ‘김 여사’도 마찬가지에요. 처음엔 모양 내며 선루프 열고 다니다가도 결국 차 유리창마다 UV 코팅을 하고, 팔 토시를 끼고 다니게 되지요. 급기야는 망사로 만든 흰 장갑도 장만하는 지경이 됩니다. 오뉴월 땡볕이 살갗을 파고드는 것처럼 아프니 김 여사라 욕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훌쩍.
이렇게 어여쁜 일 모자를 보셨나요? 사방팔방 자외선 차단되는 완벽 시스템을 자랑하지요. 노동요 한 자락이 절로 나올 영국풍 장미꽃 모자, 줄리아 로버츠도 탐낼 물방울 무늬 모자, 귀여운 체리 모자가 단돈 1만원. 귀 옆으로 늘어진 천을 묶으면 귀족 아가씨 '본네트' 못잖습니다. (사진=이진주)
지난 22일 수요일 오후 6시, 파장 무렵의 오일장은 한산했습니다. 되는대로 차를 세우고 모자 매장으로 달려갔지요. 오일장에는 모자 가게가 몇 군데 있는데요, 손수건을 사는 여중생들이 몰려 있는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여기서도 사람 많은 데가 진리였어요. 처음 골라든 건 고사리 모자였습니다. 고사리 뜯는 아지매들이 뒤집어쓰고 다니는 꽃무늬 잔잔한 모자 말이에요. 제주 사람들이 부르는 정식 명칭은 ‘일 모자’인데요, 밭일 할 때도 쓰고, 귤 딸 때도 쓰고, 나물 캘 때도 쓴답니다. 헐리우드 여배우들의 ‘본네트’ 뺨치는 넓은 챙은 물론, 뒷목을 가리는 천에, 마스크까지 장착한 완벽한 UV 차단 시스템! 이런 모자가 단돈 1만원이라니 믿어지지 않으시죠? 더구나 길에서 흔히 마주쳤던 다소 촌스런(?) 디자인도 아니었어요. 전설의 명화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 찜 쪄 먹는 물방울 무늬부터 영국 스타일 장미 패턴까지 화려하고 대담한 문양이 눈에 띄었습니다. 주말농장 하시는 시엄니께 상납하면, 몇 년 채소농사는 근심 없이 지으시겠더만요.
그 다음에는 제가 쓸 것. 평소 봐놨던 헬렌 카민스키 st.(스타일을 가리키는 인터넷 용어) 모자들이 가게 한쪽에 쌓여 있었어요. 시장에서 이런 이쁜이들을 발견하다니, 저는 ‘깔별로(색깔별로라는 뜻의 시장 은어)’ 늘어놓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파리지엔느를 지향하는 잡지 용어)’ 이것저것 써 보면서 가격 흥정에 들어갔습니다.
살림하는 뇨자 곰도리 마누리(35, 이하 마): “이모, 이거 얼마에요?” <뽄쟁이 모자> 황순매 아지매(57, 이하 아): “하나 1만 3000원.” 마: “파장인데 싸게 주시지?” 아: “모자가 배추냐, 파장이게.” 마: “(1차 깨갱) 더 얌전한 색은 없어요? 깔별로 사게.” 아: “얌전한 사람은 이 모자 안 써.” 마: “(2차 깨갱) 네에~ 그냥 다 주세요오~”
챙의 넓이며 둘레가 잘 맞는 밀짚모자 세 개(1만 3000원*3=3만 9000원. 하나는 제가 쓰고, 하나는 친구 주고, 하나는 아이들 고모 생일선물로 서울에 올려 보낼 겁니다.)와 마구 구겨도 상관없는 UV 코팅 천모자 두 개(1만 5000원*2=3만원. 이것도 하나만 제가 쓰고, 다른 하나는 선물용입니다.), 고사리 모자(1만원. 시엄니 주말농장용.)까지 여섯 개에 7만 9000원. 모자가 배추냐고 대번에 받아치셨던 우리 이모는 7만 5000원으로 깎아주시는 것도 모자라, 3000원짜리 국방색 카무플라주 패턴 팔 토시와 감물 들인 손수건까지 덤으로 끼워주셨어요. 대박!
아까 자랑했던 어물전 떨이입니다. 저 곱닥한 아지매가 어른 손바닥만한 황돔(뱅꼬돔) 9마리를 9000원에, 왼쪽에 쌓여 있는 꼬막새우 50마리를 1만원에 주셨어요. 아싸, 가오리! (사진=이진주)
미션을 마치고 시장을 마저 돌며, 평생 동안 감물만 들이셨다는 변순오 할머니(83)네 <갈옷집>에서 곰돌이가 수놓아진 아기 모자를 1만원에, 제주산 햇양파 10개와 파 10뿌리를 5000원에 떨이로 샀습니다. 야채전을 털고 일어나시던 아지매가 “양파가 흉작이라 전부 육지로 올라가는 바람에 너무 비싸졌다”며 미안해 하시더니, 딱 한 단 남은 파 2000원 어치를 덤으로 주신 겁니다. 시장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런 인심, 부러우시죠? 부러우면 지는 겁니다요. 이번 주말엔 서울 재래시장에도 들러보세요. 아직 살아있을 겁니다, 시장 인심.
이 분이 바로 <땅꼬>의 김미남 아지매. 이집 매운 떡볶이가 얼마나 맛있는지 하루 지나면 또 생각납니다. 다음 오일장을 기다리게 만드는 명물이지요. (사진=이진주)
덕분에 기분이 좋아져서 마지막 정리 중인 <땅꼬>에 들러 6000원 내고 옛날 매운 떡볶이 2인분도 사들었고요. 떡볶는 김미남(연세를 여쭈니 그저 마흔살로 추정된다고 써달랍니다.) 아지매에 따르면, 땅꼬는 ‘딸부잣집’이라는 뜻이라는데요, 중독성 있는 시장표 먹을거리의 대표주자입니다. 이거 먹으러 오일장 가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요. 앞서 자랑한 꼬막새우까지 사들고 나니 팔뚝이 울뚝불뚝해지더만요. 다음부턴 꼭 휴대용 돌돌이를 끌고 다녀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소구리 좋아하는 과일전 앞은 그냥 못지나가겠더라고요.
12개에 1만원 짜리 참외를 사며 총각에게 실 없이 농을 걸었죠. “진짜 열두 개만 넣으셨어요?” 그랬더니 아따 이 총각, 엄마 눈치 슬쩍 보며 “열세 개 넣었어요.” 소근거리더군요. 총각 엄마는 픽, 하니 웃으시고요. ‘말빨’ 센 아지매 아자씨들과 수줍은 처녀 총각들이 어울렁 더울렁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곳, 여기는 제주오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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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서울대 국어교육과와 같은 대학원 언론정보학과에서 공부했다. 서울에서 중앙일간지 기자로 일하다, 지난해 남편과 제주로 내려와 두 아들을 키우고 있다. 왕년의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성과 모성에 관심이 많다. 도 닦듯 엄마 노릇을 마친 뒤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독립할 작정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학교를 짓고,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며 동화를 쓰는 것이 꿈이다.[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