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국제학교 "영재교육? 대안교육!"
[맹모, 제주에 가다 - 이진주의 탐라일기-4]
서울 '마마토모'에서 제주 '맹모'가 되기까지
영재교육이라는 하나의 유행
“죄송합니다만, 선생님. 저는 사교육을 신뢰하지 않습니다.”“그럼, 어머니, 공교육은 신뢰하세요?”
한 ‘영재학원’의 원장님과 제가, 이런 우스꽝스런 대화를 나눈 건 지난해 이맘때쯤이었습니다. 큰아이 ‘소구리’의 ‘남다름’을 제도권 교육 안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댈 무렵이었죠. 제 능력이 닿는 범위 안에서 영재와 관련된 일을 하는 분들을 닥치는 대로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날도 아기동생 ‘요구리’를 하얼빈 이모에게 맡기고 무턱대고 길을 나섰습니다.
아무런 ‘사전정보’가 없었기에 학원가 일대를 돌며 수습기자 빌딩 타듯(빌딩 일층부터 꼭대기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혹은 그 반대 순서로 사람들을 만나는 영업사원 방식)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녔습니다. 예약도 잡지 않고 무턱대고 찾아간 곳에서 원장님을 만날 수 있었던 건 작은 행운이었다고 할까요. 그날 처음으로 뵌 분과 영재교육의 목적과 방법, 대상, 시점 등을 놓고 얼굴이 벌게지도록 말씀을 나누다가, 제가 먼저 그분의 급소를 푹 찌르자, 원장님 역시 제 약점을 확 찔러버리고 만 겁니다.
사교육을 신뢰하지 않는다면서, 학원 빌딩을 타는 엄마라니요. 스스로도 제 꼴이 어이없어서 그만 픽 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저 분의 이어지는 말씀은 이랬습니다. “어머니, 제가 비록 사설 학원을 운영하고 있지만, 영재교육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강한 신념과 노하우가 있습니다. 공교육보다 사교육이, 영재아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슬프지만, 그 말씀에요,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봉으로 알고 학부모에게 공포 마케팅을 펼치는 다른 학원들과는 달랐어요. 만일 서울에 남아 있었다면, 저도 이 양반을 ‘믿고’ 기꺼이 아이를 맡겼을 겁니다.
제가 살던 강남권에만도 사설 영재학원은 몇 군데나 됐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학원은 과학과 실험 분야에서 이름난 곳이었지요. 교육청과 대학 등에서 선발하는 영재원 입시는 물론, 과학고등학교와 과학영재학교 진학, 각종 경시대회 등에서 전국적으로 탁월한 성과를 거뒀다고 합니다. 수강생 몇 백 명, 몇 천 명의 이름이 깨알처럼 인쇄된 합격 자료를 보니 대단하긴 한가 보았습니다. 한쪽에 쌓여 있는 포트폴리오와 커리큘럼도 꽤 그럴 듯 하더군요. 무엇보다 아이들이 직접 쓴 ‘체험기’가 마음을 울렸습니다. 적지 않은 아이들이 학원에서 멘토를 만났다고 증언하고 있었거든요. 도대체 공교육이 어느 지경이기에, 아이들은 인생의 스승까지도 사교육에서 찾아야 할까요?
학원은 일종의 ‘레벨 테스트’를 통해 아이의 지능과 현재의 학습상태를 파악한 뒤 우수한 학생은 학년과 상관없이 따로 모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원들이 그랬어요. 기프티드반이나 GT반, 영재반 같은 이름의 우수반이 있었고, 거기 들어가는 건 영재원이나 과학고를 향한 첫 발자국을 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요. 한 일간지는 이런 대치동 영재교육의 풍속도를 다루며 “서울교대 영재원 들어가기가 서울대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원장님은 말했습니다. “어머니, 요즘 어머니들은요, 지능검사 결과가 상위 10%만 나와도 아이의 영재교육에 목숨을 겁니다. 이 아이들이 영재교육을 몇 살 때부터 시작하는지 아십니까? 이제 영재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건 ‘아이를 내팽개치고 일했던’ 무심한 엄마를 나무라는 말씀이기도 했고, 요즘 엄마들의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습니다.
아이의 영재성이란 것이 타고나는가,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0세(또는 태아기)부터 3세까지 자극과 훈련을 통해 모든 아이를 영재로 만들 수 있다”는 이론도 있고요. “영재성, 특히 고도의 영재성은 ‘혈통’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관점으로 가계도와 유전자를 연구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노벨상을 대를 이어 수상한 퀴리 가문의 경우가 그렇겠지요.
여러 연구서들에 따르면, 미국에서 영재아에 대한 연구나 영재교육 분야에 대해 집중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 이후라고 합니다. 소련에 뒤진 과학기술 분야를 급속히 발전시키기 위해 영재의 발굴과 육성에 눈을 돌렸고, 각급 영재기관을 설치하며 맹렬한 실험들을 했습니다. 미국엔 한국 같은 교육열이 없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오바마 대통령만 모르고 남들은 다 알던데요.
거기서도 아이 하나 제대로 교육시켜 아이비리그 보내려면 기둥뿌리가 흔들린다고 하더군요. 특히 영재교육에 나선 엄마들의 열성은 한국과 별반 차이가 없어서, 요즘엔 학과 선행학습과 족집게 문제풀이를 전파하는 한국식 영재학원도 인기라고 합니다. 오죽하면 영재원 측에서 전형방식을 바꿔버릴 정도일까요. 어느 책에는 엄마의 강요 때문에 지능검사지를 통째로 외운 아이의 사례도 등장합니다. 그 아이는, 기존 천재들의 아이큐를 뛰어넘는 초천재가 나왔다고 미디어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추락했는데, 정말이지 끔찍했습니다.
영재성이나 영재교육에 관해 공교육적 접근이 뒤진 편이었던 우리나라의 경우는, 엄마들이 각종 육아법을 몇 세대에 걸쳐 몸소 실험하면서 영재교육의 한 축을 이끌어온 것 같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영재”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유독 ‘(공)교육에서의 평등주의’ 관점이 강한, 그러면서도 자기 자식만큼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엄마들의 모순을 묘하게 파고들며, 교육열에 불을 지폈죠.
‘과학영재’ S군의 편지
개인적으로 한국식 영재교육의 사례를 수집하던 중, 며칠 전에는 스물일곱 살 청년 S군의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조금 있으면 미국에서 치과의사가 될, 세속의 기준으로는 무척이나 ‘전도유망한’ 청년이지요.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 어머니들이 부러워하실, 옆집의 ‘엄친아’일지도 모릅니다. S군은 “인생의 목표가 치대 입학”이었다고 합니다. 꿈을 이룬 지금, 그는 행복할까요? 어렵게 털어놓은 그의 마음 속 이야기를 조금 나눠드릴까 합니다.
“요즘 제 문제는 목표를 잃었다는 겁니다. 남들이 오고 싶어 하는 전문직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니, 막상 공부는 졸업할 정도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제까지 저는 내신 1%, 특목고, 명문대, 전문직 등 철학이 없는 목표만 추구해 왔습니다. 부모님께서 그런 삶이 행복한 거라 하시니 그런가 보다 하고 따라왔는데, 막상 여기 오니 ‘이제 뭘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정을 마치고 나서도 행복해지지 않으면 어쩌지?’ ‘이만큼 고생했는데 보상받지 못하면 억울하겠다’ 이런 감정들도 몰려오고요.
풀어야 할 인생의 숙제는 끊임없이 생겨나는데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한 일에 몰두하지 못하고, 다른 누군가가 제시하는, 이론적으로는 옳고 안전한 길만 골라 오다보니, 제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이 이거였나, 치대에 정말 오고 싶었나 하는 고민이 드는 거죠.
“나이도 들었는데 끝까지 마마보이처럼 살 순 없잖아요. 마마보이와 효자의 차이는 한 끗인 듯 합니다.”
S군은 흔히 말하는 ‘영재’였습니다. 그것도 서울시가, 수학이나 과학, 발명 등의 분야에서 남다른 재능과 가능성을 보이는 고등학생들 중에서 가려 뽑은, 이과 분야 최우수학생들 중 하나였죠. 별도의 시험을 거쳐 한 해 100여 명만 선발했으니, 거칠게 따져도 ‘상위 1%’보다야 훨씬 안쪽에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가 만약 영재라면, 저는 ‘타고난 영재’라기보다는 ‘만들어진 영재’입니다.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는 승부욕이나 뒤떨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심, 그것을 이겨내려는 욕구 같은 것도 재능일까요? 저는 머리가 좋다 나쁘다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왔고, 제 유전적인 재능은 다른 곳에 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중간 중간 공부가 아닌, 다른 걸 하고 싶단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영재로 만들어지기 위해 저는 많은 경쟁을 해야 했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세밀히 파악하셨기에,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섞은 환경을 제공하셨습니다. 경시대회에 나가기 위해 대치동 학원에도 다녔고, 불법인 줄 알면서도 특목고 선생님께 과외를 받기도 했습니다. 유전과 환경의 비율을 굳이 따지자면, 환경 쪽이 60%는 되겠네요.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학부모들이 그만큼 교육을 위해 어떤 것이든 감수하려 했다고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좋은 학원을 찾는 건 학부모들 사이의 전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자기 아이 보낼 학원 따로, 다른 엄마들 추천해줄 학원 따로 있었겠어요. 그런 부모님의 열성을 무시하고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하기엔 너무 멀리 왔고,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부모님을 위한 것이고, 나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에 공부한 듯 합니다.”
아무래도 서면이라 겸양을 섞어서 그렇지, 친누나가 경시대회에서 입상하고 특목고에 들어갔던 걸 보면, S군 역시 일종의 ‘유전자’를 타고났을 거라 짐작됩니다. 그런데 어떤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아마도 인생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렇게 만들었겠지만, S군은 과학고 입시에 실패하고 맙니다. 물론, 과학고에 들어갔다고 다 영재는 아닌 것처럼, 과학고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영재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요. 영재의 스펙트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으니까요.
그러나 과학고에 진학하지 못한 일과 더불어, ‘진짜 영재’ ‘타고난 영재’인 누나의 존재는 S군에게는 거대한 그림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부모님의 기대와 누나의 그림자를 의식하면서 스스로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했다는 거지요. 그는 군대에서 자기성찰의 시간을 보낸 뒤에야 스스로 만든 족쇄를 비로소 풀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S군은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평가하며 열패감에 사로잡혀 세월을 보낸 것이, 지금도 자기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함께 영재교육을 받았던 친구들 대부분이, 사실은 자신처럼 ‘공부가 아닌 다른 것’을 꿈꿨을 거라고 했습니다. 안 그런 친구들을 찾기가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고요. 부모님의 ‘인생 설계’에 순종해 영재가 되었지만(영재로 만들어졌지만), 머릿속으론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소년들이라니요. 그 에너지를 한 번 상상해보세요. 얼마나 불안하고, 불온하며, 불운한가요.
저는 S군을 직접 알지 못합니다. 십여 년의 세월을 두고 비슷한 공간에서 공부했다는 것 외에는 겹쳐지는 것도 없고, 직접 만나본 일도, 대화를 나눠본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얼굴도 모르는 제게 이런 고백을 했던 걸까요. 어쩌면 그동안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응어리졌던 마음을 털어버리려던 건 아닐까요. 아무도 그의 생각을, 그의 기분을 묻지 않았기 때문에, 묻지는 않고 그저 달리라고 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상처를 몰라주었기 때문에, 혼자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을 이렇게 탁! 아마도 해원처럼, 살풀이나 푸닥거리처럼.
그리고 또 어쩌면 이렇게 그는, 제가 아는 사람 같은지요. 그 고민의 어떤 부분들은 흡사 십 년 전, 이십 년 전 제 모습 같기도 하고, 제 친구들이나 동생들을 보는 것도 같아 편지를 읽는 내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쩌면 저는 제 아들 소구리만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토록 비싼 대가를 치르며 이곳에 왔는지도 모릅니다.
S군이 영재교육을 받았던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옛 서울과학교육원)은, 역사가 일천한 공적 영재교육의 장에서 26년이라는 기록할만한 전통을 가진 곳입니다. 서울시가 주도하는 과학영재육성사업은 1987년부터 시작됐습니다. 시는 선발된 영재들을 남산의 교육관에 불러 모아 일주일에 한 번씩 특수교육을 제공했습니다. 유명 과학교사들을 모셔와 실험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카이스트와 서울대 등 국내 유수의 대학교수들의 특강을 들려주며, 고등학생들이 과학기술 분야의 꿈을 키우도록 도운 겁니다.
국내 최초의 과학고등학교가 세워진 건 경기과학고가 설립된 1983년이었지만, 서울에는 1989년이 돼서야 서울과학고(현 서울과학영재학교)가 들어설 수 있었지요. 선생님들은 “서울과학교육원이 서울과학고의 전신”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고, 1,2기를 중심으로 한 동문회 선배들의 면면은 진심으로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서울과학고가 생긴 뒤에는, 과학고 입시에 실패하거나 여러 이유로 시험을 보지 못했던 학생들을 수용하는 창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과학영재들의 ‘패자부활전’ 같은 것이랄까요?
한데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느냐고요? 실은 저도, 그들 중 하나였으니까요. 저도 S군처럼, 한 때 ‘과학영재’라 불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중학시절, 2년 동안 학생회 일을 하느라 공부는 뒷전이었습니다. 그러다 입시철이 돼서야 뒤늦게 과학고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과학과 과학자들을 숭상하는 집안 분위기 때문에, 특목고를 간다면 외국어고가 아니라 과학고가 좋겠다고 혼자 생각했던 거죠. 제 밑으로 올망졸망한 남동생을 둘이나 두신 엄마는, 생활에 쫓겨 제 학원이나 진학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모든 걸 제가 알아서 해야 했지요.
그런데 당연히 원서를 써주실 거라 생각했던 담임선생님은 “학생회장인 네가 양보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같은 반에, 소녀가장에 가까운 친구가 있었거든요. 저희 학교는 방배동과 사당동이 맞물린 지역에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형편이 두루 섞여 있었지요. 공부를 잘했지만 상고에 가는 친구도 있었고, 장학금을 준다는 경기도의 비평준화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폭력적인 아버지를 떠나 기숙사에 들어가야 했던 그 친구에 비하면, 제게는 선택지가 많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과학고에 학교별 T/O가 있었던 것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담임선생님의 말씀을 듣자 쉽게 포기가 됐습니다. 제가 유달리 순했다기보다는 학교의 분위기가 그랬어요.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교사용 문제집을 챙겨주셔도 드러내 질투하는 아이도 없었고, 날라리들이 가출해서 카페골목을 떠돈다고 따돌리는 아이도 없었지요. 다름에 대한 관용, 교사에 대한 신뢰가 살아있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일반고 가면 입시는 망한다”는 사회적 분위기 따위는 없었습니다. 저나 제 부모님이 과문했던 탓인지는 모르지만, 특목고 입시를 위한 사교육 같은 것도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고요. 과학실험을 가르치는 학원이나 경시대회 준비반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수학선생님의 권유로 한두 번 경시대회를 나가보기는 했지만, 제가 영재라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영재란 표현이 지금처럼 광범위하게 알려지지도 않았었지요. 교사들도 학생들도 설립 초기의 특목고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꼭 가야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지켜보자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일반고에 진학해 보니 상황은 사뭇 다르더군요. 중학교 때와는 재단이 다른 곳에 배정을 받아 가보니, 그곳은 ‘신세계’였습니다. 첫 수업시간에 어느 선생님은 “특목고에 가지 못한 너희들은 쭉정이”라는 폭탄발언을 했습니다. 약간의 과장을 섞은 숫자이긴 합니다만, 매년 서울대에 10명, 연ㆍ고대에 30명, 이화여대에 200명씩 진학시키는 명문사립이라면서 말입니다. 그만큼 각오를 다지고 열심히 하라는 뜻이었을 테지요. 그러나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때 느꼈던 학교에 대한 분노와 모멸감,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을 해소한 곳이 과학영재 모임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란셋(채혈용 바늘)을 써봤고, 천재 수학자 아벨이 성경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유딩(유치원생)들도 과학학원에 다니며 실험기자재를 다루고, 아벨이나 파인만 같은 천재들의 이름이 하버드나 예일 같은 남의 나라 명문대 이름만큼이나 흔해진 요즘 상황에 비하면 전설의 고향 같은 얘기겠지요.
거기서 만난 어떤 친구는 스티븐 호킹의 책을 설명해줬고, 또 어떤 친구는 <퀸>이나 <레인보우> 같은 음악을 카세트테이프에 ‘직접 녹음해’ 선물해주기도 했습니다. 어떤 친구는 학교 대표로 퀴즈쇼에 나가 우승을 거뒀지요. 그 아이가 맞춘 마지막 문제가 ‘비스무트(원소기호 83번 Bi)’였던 것도 기억납니다. 농구를 굉장히 잘하던 누군가에게 반했던 생각이 나는 걸 보면, 아마도 누군가는 제 단발머리와 교복 차림을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겠군요. 지금은 작고하신 카이스트의 이진주 교수님이 특강을 오셔서, 이름이 같은 저를 친히 불러주시기도 했고요. 과학 경시대회에 나가면, 친구들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어 신이 났습니다.
아이들은 남녀를 떠나 각 학교 ‘대표선수’인 서로를 인정했습니다. 이제 막 도원결의를 맺거나 연애를 시작하기 직전의 설레고 흥분되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우리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더구나 과학고 입시에 물을 먹었던 경험 때문인지, “어디엔가 항상 우리보다 더 나은 누군가가 있다”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열등감이 아니라 겸손함이요. 사춘기의 그 따뜻하고 훈훈한 기억이, 지금까지도 저를 지탱해준다면 믿어지시나요? 제가 지금까지도 ‘호모지니어스(균일한 상태)’한 집단보다 ‘헤테로지니어스(불균일한 상태)’한 집단이 더 행복하고 창조적이라고 믿고 있는 근거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진짜 특별한 아이들을 만나니까, 제 자신이 영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S군처럼 자아를 발견하기 시작한 거지요. 그 전까지 저는, 노력과 성실성이 절대적인 내신에서는 전교 1등이 아니었지만, ‘머리 좋기로는’ 학교에서 한두 손가락 안에 꼽혀온 터였습니다. 교과서든 문제집이든 그림처럼 외워지는 (단기) 기억력 덕분에, 놀 거 다 놀고도 일정 수준 이상은 성적이 나왔습니다(재수 없다고 뭐라 하지 말아주세요. 아이를 둘이나 낳은 지금은 뽑혀나간 머리카락만큼이나 머릿속도 휑합니다요, 어흑.).
그런데 영재들의 세계에서 그 정도는 ‘재롱’ 수준이더군요. 암기력은 영재성의 여러 측면 중에서도 레벨이 한참 저 아래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수학이나 과학 문제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복사하듯 외워 풀었던 겁니다. 진짜 고수들과는 게임이 되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자, 아버지나 작은아버지를 보며 품었던 과학에 대한 막연한 동경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요. 어쩌면 저의 재능은 다른 데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춘기적 방황을 겪고, 재수를 하고, 어찌어찌 문과로 전향해 대학을 갔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시작한 방황을 졸업하고도 서른이 넘을 때까지 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저도 한때는 과학영재였지만, 잠정적으로는 실패했습니다. 전생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것이 아직 섣부를 수 있겠지요만, 과학 분야에서의 성취만 놓고 본다면 명백한 실패였지요. 제 동기들 중에선, 이름도 찬란한 존스홉킨스 의대를 거쳐 M.D.앤더슨 암센터에 자리를 잡은 녀석도 있고, 삼성이건희장학금을 받으며 캘리포니아공과대학(칼텍)에서 공부하고 있는 친구도 있고, 프랑스에서 물리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아이도 있습니다. 발레리나를 꿈꾸다 의대 교수가 된 친구도 있고, 명문대 치대를 그만두고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는 아이도 있고요. 카이스트 오준호 교수님 연구실에서 휴머노이드 로봇 ‘휴보’를 개발한 친구는 무려 같은 반, 같은 조 ‘절친’이었습니다. 지금 그 녀석들은 제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들을 하고 있어도, 한때나마 그 친구들과 합을 겨루었다는 것은 제 인생의 큰 자랑이자 보람입니다. 지금은 “붓으로 먹고 살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만, 한 번 잘못 세워진 목표를 수정하고 재설정하는 데, 정말로 오랜 시간이 걸리더군요.
귀족학교? 대안학교!
여러 학자들은 아이의 영재성, 특히 창조성이 폭발하는 시기를 길어야 10세까지로 봅니다. 그 이후에는 지속적인 노력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지, 새롭게 계발하기는 어렵다는 거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공교육에서 영재를 선발해 교육하는 시점인 초등학교 3학년은 이미 늦습니다. 우리 엄마들이 머리가 가장 말랑말랑한 유딩들에게 가베를 쥐어주고 학원에 실어나르며 실험ㆍ실습을 가르치는 건, 공적 영재교육의 암흑기를 나름대로 돌파해내려는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큰아이의 영재성을 발견한 시기는 10세의 절반이 지난 후였습니다. 미국에서 발간된 책에는, 뒤늦게 아이의 영재성에 눈뜬 부모들이 “내 자식의 시간을 낭비한 걸 참을 수 없다”며 울부짖는다는 사례도 등장합니다. 비웃을 일이 아니라, 처음엔 저도 딱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한 교수님이 “엄마가 무심해 아이를 진흙탕에 방치했다.”고 할 때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펑펑 울었으니까요. 제 자신이 실패한 영재였기에, 새끼도 그런 실패를 겪고 싶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기 내려왔을 때, 저는 또 한 번 과학영재 시절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소구리의 남다름은 남다름 축에도 못 들었던 거죠. 지능지수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같은 반 어느 친구는 지능지수도 160이 넘을 정도로 탁월했지만, 전 분야에서 고루 완벽에 가까운 발달상황을 보이고 있었습니다(짐작하셨겠지만, 딸아입니다. 요즘 알파걸들은 정말 새로운 차원의 인종인 것 같습니다. 반면 초딩 아들들은 어찌나 하는 짓이 ‘모지라는지’, 혀가 절로 차지는 걸 꾹꾹 눌러 참아야 하지요.). 어떤 친구는 ‘비밀 수학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에게 수열의 기본원리를 가르쳐 주었지요.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한 것이 아니라 카이스트를 나온 엄마에게 배운 것이랍니다. “OO이는 진짜 똑똑하다”며 소구리가 어찌나 흥분하던지요.
그 뿐이 아닙니다. 홈스쿨링을 했다는 어떤 누나는 영어와 불어,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고 하고, 또 어떤 누나는 유치원 다닐 때 초등학생 대상의 영어 스피치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너의 꿈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였는데, “왜 꿈이 꼭 한 가지여야 하느냐?”고 반문하며, 여러 가지 미래를 그린 발상의 전환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지요. 어떤 형아는 축구는 물론, 럭비, 농구까지 학교 대표팀으로 뽑혀 아이들의 우상이 되었는데요, 열이면 열 스트라이커만 하려 드는 초딩 축구선수들 사이에서 스스로 골키퍼를 자처하며 팀워크와 자기희생에 대해 설명할 정도로 남다릅니다. 그 형아가 등장한 이후, 골키퍼 자리를 두고 주전경쟁이 벌어졌다고 하니까요, 가히 초딩축구계의 패러다임 시프트라 할 만 하지요.
또 어떤 친구는 요요를 엄청나게 잘 다루는데, 처음 배울 때 손목에 물혹이 생길 정도로 연습을 했다고 해요. 훌라후프를 처음 본 날엔 가겟방에 서서 2시간이나 후프를 돌렸다는 말에 감탄을 했습니다. 아이도 대단하지만 집중을 깨지 않고 그대로 두고 본 그 엄마도 보통 분이 아니신 거죠. 알고 보니 역시 ‘상담’을 전공하셨더군요. 소구리보다 어린 어느 동생은 유치부 바둑대회를 석권하고, 인라인 스케이트 대회에서도 우승을 했다는데요, 번쩍번쩍한 장비에 기죽어 있다가 막상 본인이 우승을 하자, 한 시간 동안이나 신이 나서 트랙을 돌더랍니다. 이런 게 바로 진짜 영재성입니다. 영재아를 판별하는 가장 결정적인 기준이 과제집착력인데요, 아이가 어떤 일에 얼마나 집중하고 열정을 보이는가를 말합니다. 누가 강요하거나 이끌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뿌리를 캐는 능력 말이죠.
그럼, 이 아이들이 하나같이 잘나서 다들 자기만 알고 못되게 구느냐.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이 아이들의 작은 사회에는, 서로 인정하고 먼저 한 수 접어주는 미덕이 있더라고요. 봄 마중을 하려고 그랬는지, 소구리는 개학 첫 주부터 개구리처럼 돌담에서 벌떡 뛰어내리다 무릎을 찢어먹었는데요, 2주 넘게 축구를 하지 못하고 쉬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이 찾아낸 해법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바로 ‘심판’을 보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왜 우리 어릴 적에 ‘깍두기’라고 있었잖아요. 나이가 어리거나 운동을 못하거나 장애가 있는 아이를, 우리 편에도 넣어주고 너네 편에도 넣어주는 거지요. 여기서도 빼내고 저기서도 내치는 왕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문화였잖아요. 그런 고운 심성이, 여기에는 아직 살아 있더라고요.
일부에서 들리는 ‘귀족학교’라는 비난에도, ‘있는 사람들 돈XX’이라는 막말에도, 평범한 엄마들이 못 입고 못 쓰면서 꿋꿋이 이 학교를 보내는 이유 중 한 가지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비슷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자유로운 커리큘럼 속에서 다른 친구들의 장점을 인정하고 서로의 지혜를 나눕니다. 저 아이가 잘나서 내 아이가 못나지는 게 아니라, 내 친구가 나의 일등 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요. 제가 학교 다닐 때 ‘만년 전교 2등’이 있었는데요, ‘만년 전교 1등’의 등 뒤에서 뭐라고 했는지 짐작이라도 되시나요? “저 X년은 교통사고도 안 나나?”였어요. 한창 예쁜 여학생의 입에서, 자기가 인생의 봄날을 사는 줄도 모르고, 그런 말을 내뱉도록 하는 교육이 과연 정상일까요? 저와 십년 차이가 나는 S군의 편지를 읽으며, 이십년이 지난 지금은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덜해지진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제 아이가 전교 1등을 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국제학교에는 그런 개념도 없고요. 이곳의 시스템에 적응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국제중이나 특목고 같은 ‘한국식 영재코스’로 돌아가기 힘들 거라는 것도 압니다. 그렇다고 하버드나 옥스퍼드를 쉽게 갈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요. 대학 진학이 코 앞에 다가온 고학년 선배맘 중에선 그 문제로 고민하는 분도 꽤 된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제 아이가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유예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냥 뛰어놀아야 할 때 뛰어놀며, 훗날의 멋있는 동문들과 합을 겨뤄보는, 인생의 봄날을 만끽하게 해주고 싶을 뿐이죠. 그러니까 여긴 적어도 제게는, 귀족학교나 영재학교라기보다는 일종의 ‘대안학교’인 겁니다.
제주에 처음 내려올 때, 서울 학교에서 만났던 멘토 언니에게 말했습니다. “언니, 여기도 교육열 장난 아니에요. 학원도 있을 것 다 있어요. OO영재원도 있고, XX수학학원도 있고...” 그 양반이 그러더군요. “소구리 엄마, 내가 아들 셋을 키워보니,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제일 중요합디다. 큰애, 둘째 때는 내 새끼 똑똑한 것만 생각하고 더 특별한 교육만 추구했었는데 지금은 정말 후회돼요. 내가 소구리 엄마라면 이렇게 하겠어요. 좁은 학원가 빙빙 돌리지 말고, 데리고 나가서 바다도 보여주고 말도 태워줘요. 남자의 그릇을 넓히는 일을 해주세요. 왜 제주에 갔는지, 그 첫 마음을 잊지 말아요.”
몽골에서 홈스쿨링을 했다는 <악동뮤지션>에게, 한 기자가 “몽골의 너른 초원과 자연환경이 키워낸 음악천재” 운운했더니, “아유, 저희도 아파트 살아요. 초원은 좀 나가야 있어요.” 그랬다지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제주도 비슷합니다. 제주는 학력고사 시절부터 전국 수석들을 수두룩하게 배출했고, 지금도 고등학생 수능 평균이 전국 1등이라지요. 전반적으로 소비 성향이 검소하지만, ‘육지’와 떨어져 있다는 막막함 때문인지 교육만큼은 살벌하게 시키는 엄마들도 많습니다. 도심의 ‘명문초등학교’ 앞 빵집에 갔더니, 학원 보내놓고 기다리는 엄마들 풍경이 대치동하고 똑같더라고요.
그러나, 여름이면 아무 바다에서나 물장구치고, 겨울이면 아무 오름에서나 눈썰매를 타는 이 환경은, 분명히 아이들 마음의 고향이 될 겁니다. 우리 민족의 핏줄 속에는 대륙에서 말 달리던 DNA가 있다면서요, 그런데 왜 경쟁은 옆집 아이와 해야 하나요? 영재를 가리켜 영어로는 ‘gifted’라 표현하더군요. 신으로부터 아무 조건 없이 선물받은 재능이라는 뜻이지요. 정말로 머리가 좋은 아이라면, 랜덤으로 받은 그 선물을 많은 이들을 위해 쓰는 법을 배워야 할 겁니다. 그렇지 못하면 세상을 파괴하는 ‘닥터 이블’ 밖에는 되지 못할 테니까요.
다음에는 조금 묵직해진 분위기를 바꿔볼까 합니다. 쇼핑의 계절(?) 5월을 맞아 ‘산간도서지역’ 제주 아지매의 좌충우돌 쇼핑기와 좀 모자란 둘째 ‘요구리’의 조금 이른 어린이집 적응기를 들려드릴게요. 제주는 지금, 한창 예쁘답니다. 한 번 놀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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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서울대 국어교육과와 같은 대학원 언론정보학과에서 공부했다. 서울에서 중앙일간지 기자로 일하다, 지난해 남편과 제주로 내려와 두 아들을 키우고 있다. 왕년의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성과 모성에 관심이 많다. 도 닦듯 엄마 노릇을 마친 뒤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독립할 작정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학교를 짓고,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며 동화를 쓰는 것이 꿈이다.[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