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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 전 '고춧가루 물고문'…여전히 켁켁대며 잠에서 깨요"

[5·18 정신적 손해배상㉙] 총기 소유했다고 고문받은 이행용씨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이수민 기자 | 2022-06-18 10:00 송고
편집자주 '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17일 광주 서구 쌍촌동 시영아파트 자택에서 만난 5·18 피해자 이행용씨가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고 있다. 2022.6.18/뉴스1 © 뉴스1
17일 광주 서구 쌍촌동 시영아파트 자택에서 만난 5·18 피해자 이행용씨가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고 있다. 2022.6.18/뉴스1 © 뉴스1

"생업 때문에 약속 시간을 옮겨야 할 것 같아요."

인터뷰 일정을 계속 연기했다. '생업 때문'이라고 했다. 5·18민주유공자 이행용씨(68). 일주일여 간 4차례 일정 변경 끝에 17일 광주 서구 쌍촌동 시영아파트 자택에서 어렵게 만났다.
그는 취재진을 만나자 약봉지 2개를 꺼냈다. '국립나주병원 정신과' 글씨가 적힌 약봉지에는 3개씩 6알이 들어 있다.

트라조돈염산염정, 파록스씨알정, 에이피질정 등…. 우울증과 공황장애, 치매 치료제라고 했다. 익숙하게 물 한 모금에 알약을 한입에 털어 넣고 삼켰다.

"죄송해요. 정신 착란이 심해서요. 발작을 일으키면 바로 병원에 가야 하니…. 아직도 고문 후유증이 악몽처럼 따라다녀요."

그는 42년 전 그날 '고춧가루 물고문'의 고통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이씨는 국민학교(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열네 살 때부터 비석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스물두 살이던 1976년 그동안 모은 돈에 부모의 도움을 보태 남구 진월동에 '월산 석재공장'을 열었다.

스물여섯 살이던 1980년 5월쯤에는 직원을 여섯 명이나 뒀다.

5월17일. 총을 든 군인들이 갑자기 이씨의 공장 안으로 들어와 곳곳을 살폈다. 깜짝 놀란 이씨와 직원들이 일하다가 말고 뛰어나왔다.

"기분도 묘하고, 참…. 깜짝 놀랐죠. 그땐 군인들이 시민들을 때리지도 않았을 때라 그냥 놀라서 나온 거예요. 아마 군인들이 주둔지에 적합한 곳을 찾으려고 왔던 것 같아요."

군인들이 돌아간 뒤 이씨는 한 직원으로부터 금남로에서 데모가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 호기심 반, 궁금함 반에 곧장 시내로 향했다. 전일빌딩 골목에 도착했을 때 이씨는 계엄군이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사내를 곤봉으로 때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시민을 지켜야 하는 군인들이 애꿎은 시민을 폭행하는 걸 보고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이대로 보고 있어선 안 되겠다 싶어 그 길로 데모 시위에 참여했죠."

낮에는 보도블록을 깨 군인들과 투석전을 벌였다. 짱돌은 황금동 유흥가 여인네들이 건넸다. 저녁엔 트럭을 타고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러 다녔다. 밤엔 일신방직 공장에 가서 잠을 잤다.

5월26일 광주 농성동 '죽음의 행진'. 시민수습위원들이 계엄군과 협상하고 있다. 2021.5.6/뉴스1 © News1 이수민 기자
5월26일 광주 농성동 '죽음의 행진'. 시민수습위원들이 계엄군과 협상하고 있다. 2021.5.6/뉴스1 © News1 이수민 기자

5월21일이었다. 오후 1시 옛 전남도청 앞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금남로 시민을 향한 집단 발포가 이어졌다. 대학생들은 군인들이 총을 들고 있으니 우리도 총을 갖고 싸워야 한다며 무기를 구하자고 했다. 그날 오후 이씨는 광주공원에 가서 카빈총 한 자루를 받아 어깨에 멨다. 총알은 받지 않았다.

"혹시나 제가 오발을 날릴까 두려워서 저는 탄창도 받지 않았어요. 그냥 호기심에 모양만 낸 거죠. 그런데도 총을 메고 다니니까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그렇게 며칠간 이씨는 총을 메고 광주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운이 좋은 것인지 직접 전투에 참여할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24일 전남도청 대책위원회에서 회의가 열렸다. 무기를 반납할 것인지, 계속 들고 싸울 것인지 논의했다고 했다. 하루빨리 광주가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 이씨는 무기 반납에 찬성했다. 광주공원으로 가 총기를 반납했다.

"총기를 나눠줄 때는 아무런 신원 확인이 없었는데 반납할 때는 대뜸 이름을 적으라고 하더라고요. 총탄을 받은 적도 없으니, 탈 날 일도 없겠다, 별일 있겠냐 싶어 별생각 없이 이름을 적었죠."

사흘 뒤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함락했다. 도청에 남아 끝까지 무기를 들고 싸우겠다고 했던 다른 시민군은 죽거나 연행됐다.

"죄책감도 컸죠, 그건 '살아남은 자들의 숙명'이에요. 지금은 죄책감이 큰데 그땐 사는 문제가 더 급했어요. 군인들이 시민군 활동했던 사람들을 잡으러 다닌다는 소리를 듣고 도망 다니기 바빴어요."

광주와 전남지역을 떠나야 군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것 같았다. 이씨는 경기도 포천에 있는 석재공장에 취직해 몇 달 간 일했다.

"그래도 불안했어요. 전두환 군사정권이 시작됐는데, 대한민국에 신물이 났어요. 사우디아라비아로 기술직을 파견한다길래 이 나라를 뜨자고 생각했죠."

마지막으로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 광주로 돌아왔다. 12월6일 오전 10시쯤, 이씨는 자신의 공장에 들렀다가 서부경찰서 정보과 소속 형사 2명에게 걸렸다.

"그놈들은 이름도 안 까먹어요. 군인들보다 형사 놈들이 더했어요. 정X택과 김X식…. 영원히 잊지 못해요."

경찰은 이씨를 서부경찰서 정보과 사무실로 연행했다. 그들은 이씨의 양손을 등 뒤로 수갑 채우고 사무실 탁자 위에 눕혔다. 얼굴에 수건을 덮고 주전자에 고춧가루를 탄 물을 담아 부었다.

"숨이 켁켁 막히고 죽을 것 같은데 고문은 계속됐어요. 배후가 누군지, 어디로 숨었다가 이제 왔는지를 계속 물었죠."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인 민주인권기념관 모습 © News1DB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인 민주인권기념관 모습 © News1DB

며칠 뒤 서구 화정동에 있던 505보안부대 지하실로 옮겨졌다. 그곳에선 군복을 입은 남성 4명에게 조사를 받았다. 보안부대는 더 심했다.

군인들은 "총을 어디다 숨겨 놨느냐", "북으로 빼돌린 것 아니냐"고 물었다. 이씨가 아니라고 하면 주먹이 날아왔다.

당시 시민군은 총을 두 자루 이상씩 메고 다녔다. 이씨처럼 총을 한 자루만 받거나 탄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군인들은 총기를 반납할 때 이름을 적었던 명단을 꺼내며 "이것이 네가 간첩 생활을 했던 것을 보증하는 서류다", "인정하지 않으면 평생 감방에서 못 나오게 해주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계속해서 대답하지 않자 동구 산수동 부근에 있는 한 주택 공사 현장으로 이씨를 데려갔다. 손에 수갑을 채우고 일명 통닭구이 자세를 만들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곤 물고문을 했다.

"그 군인들은 계급장도, 이름표도 없는 옷을 입고 있었어요. 경찰들과 달리 원망할 대상도 난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더 미치겠죠. 그 당시엔 '제발 죽이려면 곱게 죽여라'는 생각만 했어요.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죠."

이씨는 이듬해인 81년 2월 계엄령이 해제되고 난 후 석방됐다.

그는 출소 후부터 다리를 절고, 팔을 떨었다. 석재 일을 하지 못했다. 잦은 정신 질환으로 남들과 어울리기도 쉽지 않았다.

"42년간 사람 같지 않은 삶을 산 거죠. 속으로 골병이 들어 일상생활을 하기조차 어려웠고, 사람들과도 어울리지 못해 은둔 생활을 한 거죠."

1987년 가족들의 소개로 결혼을 하고 두 남매를 뒀지만 정신적 고통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밤이 되면 무서움이 들어 잠도 오지 않았다. 잠을 자려고 매일 소주 두어 병을 마셨다. 불면증은 극심한 알코올 의존증으로 이어졌다.

술을 마셔도 꿈에선 악몽이 계속됐다. 서부경찰서 정보과 사무실에서 받은 고춧가루 물고문, 통닭구이, 폭행…. 화들짝 깨어보면 식은땀이 흥건했다.

"악몽이 너무 생생해요. 고춧가루 물이 코에 들어가서 켁켁거리면서 깨는데 깨고 나면 코가 아파요. 난 42년째 계속 고문을 받는 거예요. 평소에 '멍때릴' 때도 영화 슬로비디오처럼 자꾸자꾸 그때가 기억나요."

이씨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고문 악몽에 '복수'를 꿈꾸기도 했다.

"전두환이는 죽었고, 다른 군인들은 모르잖아요? 정X택, 김X식 그 경찰 놈들은 내가 이름을 아니까. 찾아가서 죽이겠다고 마음도 먹었었어요. 어디 사는지도 찾아냈죠. 죽이고 싶었지만 실행하진 못했어요. 다른 5·18 동지들을 위해 참은 거죠."

그들도 직업상 한 일이니 어쩌겠냐 싶었다. 이씨의 행동으로 다른 동지들이 손가락질 받진 않을까 하는 우려가 더 컸다.

"지금은 그놈들이 죽었는가 살았는가도 몰라요. 그냥, 이제는 그러려니, 내가 운이 나빴었다, 생각하는 거죠."

1994년 국가로부터 5·18 피해자 기타 2급에 분류돼 보상금 800만원을 받았다. 항쟁 기간이 한참 지난 겨울에 붙잡혀 구금 기록이 부족해 보상액이 적었다.

"표도 안 나는 돈이죠, 한 번에 그렇게 '보상금'이랍시고 주고 끝내니까. 약값이나 내고, 술 먹고, 생활비 쓰니까 끝났어요. 지금 5·18 피해자들이 연금 받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연금 그런 거 없어요. 연금이나 받아봤으면 억울하지도 않죠."

그는 2000년대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돼 매달 수급비 60만원을 받는다. 시영아파트에 살고 있어 한 달 월세가 6만원, 관리비는 약 15만원이다.

월세와 관리비를 제외한 약 40만원이 그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다. 자녀들은 독립했지만 이씨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고, 아내는 이씨 병원비를 위해 일을 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낸다고 했다.

인터뷰 도중에도 그는 몇 번이나 정신착란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그의 눈가에 마침내 굵은 눈물이 맺혔다.

"너무 빠듯하죠. 근데 이 와중에 정신착란이 오면 다른 건 생각할 틈도 없어요. 정신적 손해배상금이 나오면 이 생활이 끝날까요? 병원도 좀 다니고, 아내도 제 뒷바라지를 멈출 수 있을 텐데…."


breat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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