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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손가락질 받느니 내 한몸 불태워서라도 바꾸고 싶었죠"

[5·18 정신적 손해배상㉘] 보훈처 앞에서 분신 기도한 문종연씨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이수민 기자 | 2022-06-11 10:00 송고
편집자주 '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10일 오후 광주 서구 5·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 사무실에서 문종연씨(63)가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80년 5월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문씨는 2006년 11월 국가보훈처 앞에서 유공자의 권리 신장을 요구하며 분신을 기도했다. 2022.6.11/뉴스1 © 뉴스1
10일 오후 광주 서구 5·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 사무실에서 문종연씨(63)가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80년 5월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문씨는 2006년 11월 국가보훈처 앞에서 유공자의 권리 신장을 요구하며 분신을 기도했다. 2022.6.11/뉴스1 © 뉴스1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2006년 11월10일 오후 3시20분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가보훈처 건물 앞. 5·18기타대책위원회 회원 100여명이 손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5·18민중항쟁 당시 구속·구금된 피해자들 중 기타 1~2등급 보상 판정을 받은 이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대책위 회장은 삭발투쟁에 나섰다.

그때 5·18피해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던 한켠에서 한 남성이 시너를 몸에 끼얹고 불을 붙였다. 시뻘건 불길이 타올랐다.

"5·18은 폭도의 소행이 아니다, 회원들의 아픔을 알아달라!"

마지막 애절한 목소리를 끝으로 남성은 푹 쓰러졌다. 깜짝 놀란 5·18구속부상자 회원들이 불을 껐다. 쓰러진 남성에게서 까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경찰과 소방대원들이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했다. 
사건 당시 기사 캡처 사진. (광주일보 제공) 2022.6.11/뉴스1 © 뉴스1
사건 당시 기사 캡처 사진. (광주일보 제공) 2022.6.11/뉴스1 © 뉴스1

당시 시너를 몸에 끼얹고 분신을 기도한 문종연씨(63). 그는 불길 속에서도 목숨은 건졌다. 

10일 오후 광주 서구 5·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 사무실에서 문씨를 만났다. 

검게 그을린 진한 피부, 군데군데 화상의 흉터가 얼룩처럼 남아있었다. 화상으로 목젖은 없고 오른손 손가락 1개도 절단해야 했다. 

그는 "여전히 80년 5월을 살고 있다"고 했다 .

문씨는 1952년 쌍둥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문씨와 형을 군대에 따로 보내기 위해 호적 신고를 달리했다. 쌍둥이 형은 그대로 호적에 올렸으나 종연씨는 신고하지 않았다. 1959년까지 7년 동안 '등록되지 않은 아이'로 살았다.

호적상 또래보다 7살이 많았다. 늘 친구들 사이에선 우두머리로 지냈다. 힘도 세고 몸을 잘 쓸 수밖에 없었다. 성인이 된 뒤에도 몸 쓰는 일을 했다.

80년 5월 문씨는 금남로에 있는 광주은행 본점 건축 현장에서 감독 업무를 맡고 있었다.

5월19일, 건물 7층에서 공사 일을 감독하고 있었다. 오후 2시쯤 공사장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던 작업자들이 군인에게 쫓기며 구타당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목격했다.

"그때 일을 하고 있던 인부 10여명이 학생들이 무차별적으로 구타당하는 모습을 본 거예요. 작업자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시위에 합세하자고 하더라구요. 나는 설비 계통 파이프 배관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대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인부들과 함께 파이프를 들고 거리로 나갔죠."

금남로4가 거리에서 시민들과 "독재 타도"를 외쳤다. 시위를 하다 늦은 밤이 돼서야 집에 왔다. 작업복을 벗고 사복을 입었다. 사측에 연락해 현장 공사를 '올 스톱'하겠다고 통보했다.

다음날 곧장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시민군에 합류해 트럭 한 대를 배정받았다. 문씨의 업무는 차를 타고 다니며 시민들에게 시위 참여를 독려하고 부상자를 옮기는 일이었다.

21일 오후 1시10분쯤이었다. 헌혈을 하겠다는 시민을 병원으로 옮기려고 전남도청 앞을 지나는데 수백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옛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금남로에 있던 시민들에게 집단 발포한 것이다.

"우리가 타고 있던 트럭에도 총알이 쏟아졌어요. 본네트에 총알이 튕겼고, 급하게 차에서 내려 차 밑으로 숨었죠. 한참 동안 숨어있다 총소리가 잠잠해질 무렵 일어나 보니 차 안에 있던 동료 6명이 총에 맞아 있더라구요. 함께했던 동료 백승일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이후 문씨는 마지막 항쟁일인 27일까지 시민군에 가담해 활동했다.

26일 밤, 전남도청에 모인 시민군들은 도청에 남을 것인지 거리에서 활동할지를 결정하도록 했다. 문씨는 거리로 나가기로 했다.

"나이를 먹었고, 가족이 있으니까요. 도청만 지킬 것이 아니다, 차라리 시내에서 시민들에게 실상을 알리고자 했죠."

27일 오전 계엄군의 마지막 진압 작전이 시작됐다. 도청에 남았던 시민군들은 전부 죽거나 잡혀갔다. 그 소식을 들은 문씨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도청 앞에 널브러진 시체는 전부 아는 얼굴들이었어요. 5·18 기간 전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들도 서너 명 있었구요. 누가 죽었고, 누가 잡혀갔는지 도청을 사수했던 기동타격대원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 27일 하루를 꼬박 보냈어요."

10일 문종연씨가 자신의 몸에 남은 화상 흉터를 보여주고 있다. 2022.6.11/뉴스1 © 뉴스1
10일 문종연씨가 자신의 몸에 남은 화상 흉터를 보여주고 있다. 2022.6.11/뉴스1 © 뉴스1

28일 오전에도 문씨는 상무관에서 기동타격대원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때 군복 차림의 남성 3명이 문씨에게 다가왔다.

"폭도 새끼, 너도 총 들었던 놈이지?"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곤봉이 날아 왔다. 그대로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문씨는 34일간 꼬박 그곳에 잡혀 있었다. 부대 안에 있는 천막에서 생활하고 낮에는 사무실에서 매일같이 조사를 받았다.

군인들은 문씨에게 "니들은 폭도다. 누구의 지령을 받았냐"고 매일 캐물었다.

"군인들의 집요한 질문에 한 번은 '너희들도 형님이 있을 것 아니냐. 난 평범한 시민이다'라고 말했다가, 진짜 숟가락도 들지 못할 정도로 맞기도 했죠."

호적상 스물한 살이지만 실제 나이는 스물여덟 살인 문씨가 으례껏 '어른'처럼 얘기했다가 오히려 맞은 것이었다.  

영창 생활이 한 달이 넘어갈 무렵, 계엄군은 시민군을 연병장에 줄 세웠다. 하얀 메리야스 뒷면에 A~D까지 매직으로 적었다. 문씨에게는 'B'가 적혔다.

"애가 둘이나 있고, 학생이 아니었잖아요. 건설 현장에서 일한다는 정확한 직업도 있었고. 그래서 B를 적은 것 같아요. A는 아예 잘못 잡아 온 애들이고요. A와 B는 얼마 뒤 훈방으로 풀려났어요."

30여일 만에 집에 돌아왔지만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조사 과정 중에 어깨를 많이 맞아 오른쪽 인대가 끊어졌다. 다리도 절게 됐디.

하지만 병원에 갈 수 없었다. 계엄군이 병원을 지키고 있어 병원 진료를 받았다간 다시 군인들에게 잡혀간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동네 약방에서 약을 지어 먹으며 겨우 버텼다.

그동안 해온 건축 일도 다시 할 수 없었다. 몸을 쓰는 직업이었지만 몸을 다치면서 전처럼 일할 수 없었고, 영창에 다녀온 '전력' 때문에 일을 주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고문으로 인한 신체적 후유증은 물론 정신적 트라우마도 계속됐다.

문씨는 1990년 국가가 5·18 피해자들을 보상할 때 기타 등급으로 9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이마저도 치료비와 월세방을 얻는 데 쓰고 나니 남는 것이 없었다.

"나중에 보훈병원 정신과를 10년 넘게 다녔지만 달라지지 않았어요. 잠을 못 이루는 건 일상이고, 5·18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했어요. 빨갱이라는데 어딜 취직하고 누굴 만나겠어요. 철저하게 고립된 거죠."

문씨는 5·18 피해자들과 단체를 꾸려 권리 찾기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6년 11월10일, 100여명의 피해자들은 공법단체 전환과 의료 보험 혜택을 요구하며 상경했다. 국가보훈처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이틀째 시위를 했다.

"보훈처장은 만나주지도 않았어요. 계속해서 손가락질만 받느니 내 몸 하나 태워 회원들을 잘살게 해주고 싶었어요."

시너와 휘발유 6통을 사서 가방 안에 넣었다. 분신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너무 두려워 소주 한 병을 들이켰다.

잠시 뒤 몸에 시너를 붓고 양말 밑에 숨겨놨던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구호를 외쳤다. "정부와 국가보훈처는 우리 회원들의 아픔을 알아달라."

뜨거운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는 느낌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었다. 문씨는 13일 뒤 깨어났다. 회원들에게 물어보니 불을 붙인 후 구호를 외치고 몇 초도 되지 않아 앞으로 쓰러졌다고 했다.

병원에서 '전신 3도 화상' 판정을 받았고 피부 이식과 인공 성대 삽입술 등 수술이 이어졌다.

"저는 중졸이에요. 무식하니까 이렇게라도 한 거죠. 너무 아팠는데 후회는 않아요. 우리가 2006년에 바랐던 공법단체가 얼마 전에 이뤄졌잖아요? 늦게라도 이뤄졌으니 후회 안 해요."

문씨는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받으면 회원들을 위해 기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몸을 태우면서 공법단체 전환 등을 이뤄냈지만 여전히 5월 유공자에 대한 복지와 대우가 부족하다는 이유다.

그는 5·18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몸에 불을 붙이겠다고 했다.  

"현재 부상자회 부회장을 맡고 있어요. 회원들 사정을 속속 알게 됐는데 기초생활수급자가 태반이에요. 생활고에 쫓겨서 자살한 동지들도 20명이 넘어요. 보수 단체는 우리가 매달 연금을 받는다고 말하죠. 연금 받는 사람 한 명도 없어요. 실상을 알리고, 권리를 찾아야죠. 그게 이뤄지지 않는다면 전 또 다시 제 몸에 불을 붙일 수 있습니다."


breat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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