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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살겠다고 친구들 밀고…42년 지났지만 너무 미안해"

[5·18 정신적 손해배상㉖] 광주공원서 무기 받은 최기옥씨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이수민 기자 | 2022-05-28 10:00 송고
편집자주 '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27일 오후 광주 북구 중흥동의 한 카센터 사무실에서 만난 최기옥씨(61). 최씨는 80년 5월 당시 총기를 소지한 혐의로 군인에 잡혀가 고문을 받았다. 2022.5.28/뉴스1 © 뉴스1
27일 오후 광주 북구 중흥동의 한 카센터 사무실에서 만난 최기옥씨(61). 최씨는 80년 5월 당시 총기를 소지한 혐의로 군인에 잡혀가 고문을 받았다. 2022.5.28/뉴스1 © 뉴스1

"오라이~ 오라이~."

취재진의 차량 뒤에서 큰 목소리로 손짓하며 주차를 돕는다. '삐삐삐삐' 후진 주차 경고음이 울리니 트렁크를 '탕' 내리친다. "됐소, 내리쇼!"

27일 오후 광주 북구 중흥동의 한 카센터. 짙은 쌍꺼풀에 밝은 분홍색 셔츠를 입은, 누가 봐도 '센' 인상의 아저씨가 취재진을 맞이한다.

5·18 피해자 최기옥씨(61). 최씨는 빠른 걸음으로 카센터 2층 사무실로 안내했다.

"덥죠잉~"

최씨가 사무실 의자에 털썩 앉으며 날씨 인사를 건넨다. '센 인상'답게 호탕하고 터프한 성격이다.

잠시 안부를 묻고 42년 전 그날 얘기를 시작했다. 최씨의 얼굴이 서서히 구겨졌다.

"친구들 이름을 대란디 그걸 말 안하믄 계속 때링께… 이라다 죽겄다 싶어서 댔는디… 하이고…."

얇은 반무테 안경을 벗어 손에 들고는 '꺼이꺼이' 눈물 흘렸다.

최씨는 1961년 2월 전남 영암군에서 태어났다. 5살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 혼자 5남매를 키웠다. 아버지가 남긴 빚도 많아 온가족이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을 했다.

어렵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우러 광주에 상경했다.

"그때는 기술을 배와야 돈을 모탤 수 있었응께. 부지런히 기술 배와 숙식 해결이 가능한 공장에 취업했제라."

열아홉살 초여름이었다. 광주가 온통 시끄러웠다. 5월18일, 택시 운전을 하던 친구 신장원씨가 군인에게 두들겨 맞고 왔다.

"열아홉살잉께 얼마나 혈기왕성했겄소. 친구놈이 얻어터졌당께 열불이 나서 무작정 거리로 나간 거제라. 그때는 친구랑 주위 사람들 내가 지켜야겄다는 생각밖에 안 들드라고요."

거리에는 총을 들고 무장한 군인들이 시민들을 구타하고 있었다. 최씨는 맞서 싸울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난 2020년 한국일보가 공개한 5·18민주화운동 당시 미공개 사진. 5·18 당시 광주 호남동의 한 시민군이 총을 들고 있다.© News1DB
지난 2020년 한국일보가 공개한 5·18민주화운동 당시 미공개 사진. 5·18 당시 광주 호남동의 한 시민군이 총을 들고 있다.© News1DB

5월21일 오후 옛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시민을 상대로 집단 발포한 이후 한 남성이 '광주공원'으로 오라고 했다.

도착해보니 시민군들이 총과 수류탄을 나눠주고 있었다. 최씨도 줄을 서 총 4자루와 수류탄 2박스, 지프차 1대를 받았다.

"제대한 지 얼마 안된 거 가튼 느낌? 나이는 나보다 쪼까 더 묵어보였고. 그 선배들이 총 쏘는 거시고 뭐시고 다 갈쳐준거제."

그날 밤, 계엄군은 광주 외곽으로 후퇴했고, 최씨는 총 4자루를 챙겨 집으로 돌아가려다 친구 신장원씨의 집으로 향했다. 남구 월산동에 있는 신우아파트였다.

"총을 가꼬 집에 가믄 엄니가 놀라실 거고. 그랑께 친구 집으로 갔제. 거기서 장원이하고 다른 친구 한 넘한테 총 한 자루썩 주고 나머지 두 자루는 내가 가졌고."

당장 시민군으로 전투에 참여하진 않겠지만 무기를 갖고 있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2~3일간 라디오를 틀고 광주 돌아가는 소식을 들었다. 여차하면 나가서 싸울 요량이었다. 하지만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는 전혀 달랐다.

"와따메, 세상이 발칵 뒤집어져불고, 오히려 '시민'들이 총 쏘고 사람 쥑인다는 뉴스가 나오드라고요. 라디오에선 무기 얼릉 반납하락 하지, 겁은 나지. 나중에 알고 봉께 이미 언론이 장악돼서 제대로 된 뉴스를 못 보냈던 거제라우."

'무기를 반납하라'는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두려움이 커졌다. 누구를 쏘거나 시민군에 참여하지도 않았지만 괜히 무서웠다. 5월25일 통장을 찾아가 무기를 반납했다.

다음날이었다. 새벽 2시쯤 누군가 신씨의 집을 쾅쾅 두드렸다. 문을 열고 나가 보니 군인 20여명이 최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구 임동 BBS(광주불교방송) 방송국 지하에 마련된 고문실로 끌려갔다. 캄캄한 방에 빨간 조명 하나, 좁은 사무실 안에 형사와 군인들이 우글우글했다. 통장이 최씨에게 총 2자루를 받았다고 신고한 것이었다.

형사와 군인은 "누구에게 총을 받았는지 이름을 대라"고 했다. 최씨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곧바로 몽둥이질과 군홧발이 날아왔다.

"나 살자고 딴 사람을 팔아묵을 수는 없응께 버텼지라우. 근디…."

계속해서 입을 다물자 폭행은 더 거세졌다. 몽둥이로 어깨와 머리를 마구 맞았다. 귀 뒤로 피가 흘렀다.

"군인넘들이 메칠동안 잠도 못자게 허고. 죽겄드마요. 잠을 못 잔께 살짝 졸 수도 있자나요? 내가 깜빡 졸다가 살짝 꺄우뚱하면 곧바로 군홧발로 차고 패고…. 걱써 얼마나 있었는지 기억도 안나요."

그 사이 최씨에게 총을 줬던 시민군 중 한 명이 잡혀왔다. 그는 '총 4자루'를 줬다고 했다.

군인들은 반납한 2자루 외에 나머지 총기 2자루의 행방을 물었다. 고문은 더욱 심해졌다.

최기옥씨가 친구를 밀고하게 된 사연을 설명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22.5.28/뉴스1 © 뉴스1
최기옥씨가 친구를 밀고하게 된 사연을 설명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22.5.28/뉴스1 © 뉴스1

"근디… 우짤 수 읎이 칭구들 이름을 댄 거죠. 내가 죽을꺼 같응께. 근디… 그거시 평생 부끄랍고 죄스런 거지라우."

최씨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친구들이 잡혀 온 뒤에도 폭행은 계속됐다. 서로 다른 방에 가둔 뒤 증언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구타가 이어졌다.

"칭구 장원이는 총 받은 뒤로 그대로 세탁기에다 너놨단 말이요. 총 받은 것도 잊어뿔고 살었는디 무담시 나땜에 휘말려서 뒤지게 맞고 폭행당항께…."

42년 전 자신의 '밀고'로 고문받았던 친구들에 대한 죄책감. 최씨는 서럽게 울었다.

"나 살자고, XX…. 나가 그런 나쁜 XX요. 아이고, 하…."

이들은 5·18민주화운동이 끝난 후 서부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졌다. 총기만 받았을 뿐 별다른 활동 이력이 없어 며칠 뒤 풀려났다.

그날 이후 최씨는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트라우마에 휩싸였다. 죄책감에 친했던 친구들을 피했다. 20대 초반부터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한쪽 귀 청력도 잃었다.

"언제까, 옆으로 누워 잠을 잔디 누가 나를 불름시롱 깨웠닥해. 근디 나는 안들리는 거여. 병원에 가서 봉께 귀 고막에 구멍이 뚫려 들을 수 없닥 하드라고요. 그때 맞음시롱 피났는디 그것 땜에 안들리게 된 거제."

1999년, IMF 위기 후 다니던 공장이 부도가 나 대구와 부산을 오가며 인테리어 철거 일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포고령 법'에 의해 5·18 때 잡혀갔던 사람들은 '전과'가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타지역 사람들은 최씨를 '간첩'이라고 불렀다. 최씨는 흘러나오는 전라도 사투리를 숨기기 위해 애썼다. 부끄럽고 다른 사람들 만나기가 무서워졌다. 그럴 때마다 귀울림과 두통, 가슴 두근거림 등 증상이 심해졌다.

고통이 심해지자 편한 사람들에게 못되게 굴기 시작했다. 말수도 적어지고 가족들에게 난폭해졌다. 버럭 화를 내고 언성을 높여 심한 말을 시작하면 멈출 수 없었다.

참다못한 아내와 아이들이 정신과 진료를 권유했다. 우울증약을 먹으면 잠시 진정되는 듯 했지만 근본적 치료는 되지 않았다.

"어디 가서 5·18 야그는 하기도 싫고 총을 갖꼬만 있었을 뿐인디 간첩으로 몰링께 억울하고. 지금도 말하기 싫어라우."

1990년에 국가가 보상금을 준다고 했다. 최씨는 엮이기도, 증언하기도 싫어서 신청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가서 신청해보라고 했다. 10여년을 안하겠다고 우기다가 2017년 마지막 보상 지급 때 신청했다. 기타 1급을 받고 800만원을 받아 생활비에 썼다.

최씨는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받으면 이번에도 '생활비'에 쓰겠다고 했다. 집다운 집에 살고 싶다고 했다. 취재진을 집 대신 사무실로 부른 것도 이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80년 당시 자신에게 총을 줬던 선배와 친구들을 모아 술을 한잔하고 싶다는 소망도 내비쳤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서 태어나 쌔빠지게 고생하고 부지런히 살었는디. 벼락같은 일이 일어난 거제라. 근디 아직도 그 칭구들한테 넘 미안허고. 아직도 죄책감이 살고 있제라. 그 칭구들, 지금은 잘 있는가, 만나믄 사과허고 싶어라우."


breat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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