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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은 폭도가 아냐…이름 모를 그들에게 사과하고 싶어"

[5·18 정신적 손해배상⑳] 광주시청 양정계장 손천만씨
구타와 강압에 의해 자술서에 '폭도'로 적어…40년 죄책감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이수민 기자 | 2022-04-16 10:00 송고
편집자주 '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15일 오후 광주 북구의 한 주간보호센터에서 만난 손천만씨(89)가 80년 5월 당시 자신이 썼던 출고증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광주시청 양정계장이던 그는 시민군에게 쌀을 내줬다가 계엄사령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2022.4.16/뉴스1
15일 오후 광주 북구의 한 주간보호센터에서 만난 손천만씨(89)가 80년 5월 당시 자신이 썼던 출고증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광주시청 양정계장이던 그는 시민군에게 쌀을 내줬다가 계엄사령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2022.4.16/뉴스1

"평범한 시민이고 학생인디…, 나도 하도 맞응께 어쩔 수 없이 '폭도'라고 한 거제. 다 까묵기 전에 사과해야 한디…."
15일 오후 광주 북구의 한 주간보호센터에서 만난 손천만씨(89). 백발에 허리가 반쯤 굽은 그는 '깜빡깜빡'했다. 정신 말짱하게 얘기하다가도 어느 순간 기억이 사라지는 듯했다.

취재진의 손을 잡고 인사하던 그는 "어쩐 일로 오셨냐"고 물었다. 이틀 전 전화 통화로 인터뷰 약속을 잡고 불과 3시간 전 확인 전화까지 한 터였다.

인터뷰 날짜를 착각했나 싶어 휴대전화로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살짝 당황한 취재진의 모습을 본 활동 보호사가 "아이고 아버님"하며 멋쩍은 탄식과 함께 손씨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손씨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결례가 많소. 자꾸 이랬다저랬다 깜빡하요. 더 까묵기 전에 사과해야 한디. 나도 원래 나랏일 했던 사람이요."

손씨가 방에서 주섬주섬 서류를 꺼냈다.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차곡차곡 모아둔 서류였다.

그제야 센터 곳곳에 붙은 '치매 노인 전문 주간보호센터'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1980년 5월, 손씨는 광주시청에서 양정계장으로 일했다. 양정계는 정부 쌀 유통을 관리하는 부서다.

1962년 광주시 소속 공무원으로 임용해 18년 만에 유망부서인 산업국 양정계에서 일한다는 게 손씨에겐 큰 자부심이었다.

그해 봄은 전국이 시끄러웠다. 밥상머리에선 늘 정치 이야기가 화두였다. 거리엔 시위대의 구호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럴 때마다 손씨는 '공무원'이라는 신분과 의무를 되새기며 중립을 지키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5월18일부터 시작된 '항쟁'이 9일 차에 접어들던 26일 오전 11시, 광주시청 산업국에 '탕, 탕'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국장은 자리에 없었고, 부서에서 가장 고참인 손씨가 사무실 복도로 나갔다.

복도엔 총을 맨 학생 5명이 서 있었다. 며칠을 굶었는지 볼이 쑥 패여 초췌한 몰골에 신발조차 신지 않은 맨발 차림이었다. 그들은 다짜고짜 총부리를 겨누며 손씨에게 쌀을 달라고 했다.

학생들은 "시위에 참여하며 밥을 먹지 못하고 있다"며 "시내에 집결한 학생들이 먹을 쌀을 정부미로 공급해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광주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일주일 넘게 고립된 상황이라 광주가 집이 아닌 자취생이나 외지에서 온 학생은 끼니 때우기도 쉽지 않았다.

초췌한 모습에 학생들의 지친 표정이 손씨의 눈에 밟혔다.

그는 직원들을 시켜 예비군 훈련 때 신으려고 사무실에 뒀던 농구화를 학생들에게 건네줬다.

때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일단 밥이나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고 달래 학생들을 시청 앞 식당으로 데려갔다. 학생들은 밥 몇 그릇을 가볍게 비워냈다.

쌀이 얼마나 필요하냐고 물었다. 100가마를 요구했다. 나중에 시위가 끝나면 갚겠다고 했다.

"'쌀 100가마'는 지금 생각해도 황당허제. 그래도 학생들 상태를 보니 불쌍허더라고."

손씨는 "한꺼번에 100가마를 어떻게 주겠느냐. 갖다 놓을 데도 없지 않느냐"며 "하루에 5가마씩 매일 줄 테니 차라리 오늘 가고 내일 또 오라"고 설득했다.

당시는 시청 양정계장이 써준 출고증이 있어야만 광천동에 있는 양곡창고에서 쌀을 받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

손씨는 사무실에 들어와 A4용지에 이날 우선 5가마를 내달라는 출고증을 써서 학생들에게 줬다.

예산 보고서를 올려야 했지만 항쟁 기간이라 정상 업무가 이뤄지지 않았다. 정상적인 절차로는 쌀을 줄 수 없었지만 급한 불을 끄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매일 5가마씩 주기로 했던 쌀은 다음날인 5월27일 새벽 시민군과 계엄군 간의 최후의 항전이 벌어지면서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됐다.

손씨는 "학생들이 그날 쌀을 받아 갔지만 워낙 상황이 긴박했던 터라 먹기나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80년 5월26일 손천만씨가 학생들에게 써준 출고증의 사본. 출고증을 포함한 손씨 관련 서류들은 현재 광주 동구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보관돼 있다. 2022.4.16/뉴스1
80년 5월26일 손천만씨가 학생들에게 써준 출고증의 사본. 출고증을 포함한 손씨 관련 서류들은 현재 광주 동구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보관돼 있다. 2022.4.16/뉴스1

한 달쯤 지난 6월25일. 손씨는 북구 매곡동에 있는 공무원교육원에서 진급 교육을 받고 있었다.

갑자기 계엄사령부 군인이 교육장에 들어와 "광주시청 행정계장이 어떤 놈이냐"고 소리쳤다.

교육장에 구청 소속 직원들은 많았지만 시청 소속 직원은 손씨 한 명뿐이었다.

손씨는 "시청에는 '양정'계장이랑 '시정'계장은 있는데 '행정'계장은 없다"고 답변했다.

군인은 손씨의 이름을 묻곤 다음에 다시 오겠다며 되돌아갔다. 다음날, 군인이 다시 교육장에 찾아왔다.

"'양정계장 손천만씨 나오시오!' 하더라고. 허허, 고제야 '아, 쌀 갖고 간 것이 문제가 됐고만' 혔지."

손씨는 서구에 있는 계엄사령부 조사계로 끌려갔다. 조사계 입구까지만 해도 "계장님"이라고 부르던 군인들은 복도 끝 조사실 문이 닫히자마자 욕을 내뱉으며 무차별 폭행했다.

몽둥이로 손씨의 얼굴과 머리, 허리를 내려쳤다. 손씨가 쓰러지자 허리를 밟고 올라서 무릎 뒤쪽을 때리기도 했다.

"뒈지게 팬 거제. 진짜 그 말 말고는 표현할 것이 없어, 죽는 줄 알았제. 근디, 맞는 것보다 아프고 화나는 게 따로 있었어."

계엄군은 몇 시간의 고문 후 손씨를 의자에 앉힌 뒤 쌀을 주게 된 경위 등을 자술서에 쓰라고 했다.

손씨는 자술서에 가감 없이 솔직히 쓰려고 했다. '학생들이 쌀을 달라고 했다'고 쓰자 갑자기 오른쪽 귀 쪽으로 다시 한번 몽둥이가 날아왔다.

"군인들이 '야, 이 XX놈아, 폭도XX들이 학생이냐? 폭도라고 써'하면서 흠씬 두들겨 패고…. 나중에는 뒤에서 내용을 불러준께 '폭도'라고 쓸 수밖에 없었제."

손씨는 자술서 작성 후에도 3일간 조사실에 구금됐다. 구금 기간에 군인들은 "그 쌀이 국가 쌀이지, 니 쌀이냐. 왜 간첩에게 주냐"며 손씨를 괴롭혔다.

3일 뒤 풀려나 집에 도착하자 아내는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하필 손씨가 교육을 받다 잡혀간 것이라 가족과 시청 직원들 모두 그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손씨는 허리와 머리, 귀 이명과 청력 감퇴 등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후유증은 '자술서'였다.

손씨는 학생들에게 쌀을 준 사건으로 불이익을 받진 않았다. 손씨가 계엄사령부에 끌려다녀온 것을 안 광주시장과 부시장이 발 벗고 나섰고 예산도 후기로 집행했다.

시청 직원들 사이에선 '의로운 일을 하고 계엄군에 끌려간 공무원'이라는 칭찬과 입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죄책감과 부채의식은 손씨가 1992년 광주 북구청 기획감사실장(사무관)으로 퇴임할 때까지도 계속됐다.

물론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 계엄군의 명령을 거부할 경우 목숨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던 터라 모두들 이해하겠지만 손씨에게는 꺼내기 부끄러운 과거였다.

2011년 5·18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뒤에는 죄책감이 더욱 커졌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폭도'라는 단어가 적힌 손씨의 자술서가 전시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죽을 만큼 괴로웠다고 했다.

그해 손씨는 국가기록원에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당시 자신이 써준 출고증과 정부양곡피해현황보고, 자술서 등을 확보했다.

이 가운데 자술서는 집안 깊숙한 곳에 넣어뒀다. 손씨는 '이를 갖고 평생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자, 그들을 찾아서 사과하자'고 마음먹었다.

당시 찾아왔던 학생들이 식사 중에 순천농업전문대에 다녔다는 말을 했음을 기억해냈다.

직접 사과하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생사 여부나 이름도 알아내지 못했다.

공무원 일을 하며 알게 된 기자들에게도 사연을 털어놨다. 2012년 5월 한 지역 일간지 기자가 손씨의 사연을 소개했다.

손씨는 당시 기사를 통해 "5년이나 10년 후, 또는 100년 후에 5·18 주역들과 그들의 자손이 잘못된 이 기록물을 볼 것을 생각하면 아찔하다"며 "비록 본의가 아니라 강요에 의한 것이지만 정말 미안하고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여태까지도 학생들을 찾지 못했다. '얼굴 보고 사과하고 싶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이름이라도 알고 싶다'던 손씨의 머릿속에도 어느새 그들이 흐릿해졌다.

"미안하지, 그냥 미안혀. 그게 전부야. 목숨 내놓고 싸운 학생들인디 내가 감히 '폭도'라고 썼으니…. 꼭 사과하고 싶어, 살아만 있어주믄 좋겠어. 죽었다면 더 서러울 것 같어. 내가 이름을 더럽힌 거잖아. 근디 내가 까먹을까봐 그게 더 무서워."

손씨는 2002년 5·18 유공자로 인정받아 약 10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당시는 치매도 없었고 허리나 귀통증도 참을만했다. 지금은 치매를 앓아 보호센터에서 지내는 데다 보청기나 허리띠 없인 생활이 어렵다.

그는 "나이가 구십이면 건강한 사람도 깜빡깜빡할 텐데 치매라면 얼마나 심하겠느냐"며 "사과 없이 그들을 잊을까 봐 매일 다시 그날을 회상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생의 끝자락. 손씨가 사라져 가는 기억의 끈을 부여잡고 그날의 이야기를 다시 꺼낸 이유는 사과를 하고 싶어서다.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받으면 사과하는 데 쓰고 싶다고 했다.

"우리 정년 때는 퇴직금이라는 것이 특별히 없었어. 그래서 모은 것도 없지만 이 상태로 있다가 치매가 더 심해질까 봐, 그게 제일 염려스러워. 손해배상금 받으면 내 정신도 고치고 꼭 그 학생들한테도 미안하다고, 폭도라고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데에 쓰고 싶어. 폭도라고 손가락질받으면 그 학생들이 얼마나 더 힘들겠어."


breat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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