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본문 바로가기 회사정보 바로가기

"눈 감으면 총 맞은 젊은이 참혹한 시신 떠올라…어떻게 잊겠어요"

[5·18 정신적 손해배상⑱] 담양 화물차 운전사 최귀연씨
80년 5월 담양서 광주까지 경찰 수송…상무관서 시신 목격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이수민 기자 | 2022-03-26 10:00 송고
편집자주 '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지난 25일 오후 광주 북구 신안동의 한 빌라에서 만난 최귀연씨(68)가 80년 5월 광주를 회상하고 있다. 최씨는 당시 전남 담양에서 화물차 운전사로 일하며 광주까지 경찰을 수송했다. 2022.03.26/뉴스1
지난 25일 오후 광주 북구 신안동의 한 빌라에서 만난 최귀연씨(68)가 80년 5월 광주를 회상하고 있다. 최씨는 당시 전남 담양에서 화물차 운전사로 일하며 광주까지 경찰을 수송했다. 2022.03.26/뉴스1

"눈을 감으면 총에 맞은 젊은 남성과 참혹하게 죽은 여성의 시신 모습이 떠올라요. 마치 방금 일처럼 생생해요."
25일 오후 광주 북구 신안동의 한 빌라에서 만난 최귀연씨(68)가 콧잔등을 타고 내려오는 안경을 고쳐쓰며 말했다. 안경알 틈으로 최씨의 오른쪽 눈이 인위적이고 어색하게 보였다.

"눈에 장애가 있어요. 그때 맞아서 생긴 거죠."

최씨는 40여년 전 그날 이후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며 차별 어린 시선 때문에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삶이 변하니까 더 미치죠. 전 8사단 최강부대 수색대에서 군 생활을 했었어요. 키 크고, 체력 좋고, 잘 달리고…. 늘 남들에게 주목받았는데."
80년 5월 스물여섯 살이던 최씨는 전남 담양 객사리에 살며 마을에 있는 담양화물에서 화물차 운전사로 일하고 있었다.

1년 전 전역한 그는 군 생활 중 사단 자체에서 특급 병사로 뽑혀 청와대 경호 일을 하기도 한 에이스였다. 그 시절 180㎝가 넘는 큰 키에 수도권에서 군 생활을 하고 왔다는 그는 마을에서 잘생긴 청년으로 통하며 자신감이 넘쳤다.

화물차 운전 일은 단순했다. 가끔 담양 특산물인 대나무를 싣고 타지역에 배송하는 일을 빼고는 마을 내에서 이삿짐이나 소를 실어다 주는 일을 했다.

최씨는 월급으로 매달 7만5000원 가량을 받았고 이를 고스란히 가족들의 생활비로 보탰다. 그해 5월도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날들의 반복이었다. 역사적인 사건이 터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5월16일 오전이었다. 담양화물 사무실로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발신자는 담양경찰서 경무계였다. 경찰들을 싣고 광주로 왕복을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최씨는 바로 화물차를 몰고 경찰서 앞으로 갔다. 평소 친하게 지냈던 한 경찰은 "광주에 데모가 심해 지원 나간다"며 "경찰서 관용차가 고장 나 화물차로 이동해야 한다"고 했다.

최씨는 경찰 수십명을 싣고 광주로 향했다. 광주 동구 전남도청 앞에 도착하니 수많은 학생들이 금남로를 에워싸고 군인과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었다.

최씨는 차를 도청 안 주차장에 주차하고 건물 안 민원실에서 그 모습을 빤히 지켜봤다.

경찰들은 도청 쪽으로 학생들이 더는 진입할 수 없게 최루탄을 쏘고 방패로 막았다. 민원실 안으로도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새어 들어왔다.

"최루탄 가스를 지겹게도 맡았어요. 난 다시 담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경찰 지시가 떨어질 때까지 갈 수 없었죠. 온종일 민원실에 죽치고 있었어요."

5월20일, 며칠을 민원실에서 지내던 최씨에게 경찰 측의 새로운 주문이 들어왔다. 담양으로 돌아가 먹거리와 투구, 방패 등 장비를 챙겨와 달라는 주문이었다.

담양에 도착해 점심을 먹고 난 뒤 오후 3시쯤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지휘관급 경찰에게 장비를 전부 넘겨준 뒤 다시 민원실에 앉아있는데 가까운 곳에서 "악" 비명과 함께 곡소리가 들렸다.

최씨가 도청 건물 밖으로 나가자 바로 맞은편 상무관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 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도청 민원실 소속 공무원은 "데모했던 학생들이 죽은 것 같다"며 황급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최씨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상무관 안쪽으로 들어갔다. 리어카에 대여섯 구의 시신이 실려 있었고 시민들이 일일이 관에 안치하고 있었다.

관에서 피가 새어 나와 상무관 바닥을 적시자 한 어린 학생이 비닐을 가지고 와 관을 칭칭 감았다. 이후 한 노인이 태극기를 관 위에 덮었다.

"그 중엔 총에 맞은 젊은 남자 시신이 있었어요. 사람 머릿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때 처음 본 거예요. 참혹하게 죽은 젊은 여자도…"

너무도 처참한 광경에 최씨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다리가 덜덜 떨리고 구역질이 나왔다.

5‧18 당시 상무관 희생자의 관위에 놓인 태극기와 광주시민들.(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뉴스1DB
5‧18 당시 상무관 희생자의 관위에 놓인 태극기와 광주시민들.(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뉴스1DB

그때 건물 밖에서 다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최씨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군용 차량이 건물 앞에 있던 시민들을 연행하고 있었다.

총과 칼을 든 군인이 최씨에게도 달려들었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최씨도 속수무책으로 맞았다. 이유도 설명하지 않았다. 군홧발로 차고 각목으로 머리를 쳤다. 그 짧은 순간에 부모와 형제들 생각이 났다.

그때 도청 안으로 들어갔던 민원실 소속 공무원이 급하게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는 군인들 향해 "이 사람은 도청 직원이에요! 데려가지 마세요!"라고 외쳤다.

"최근 며칠 동안 도청에서 오고 가며 많이 봤으니 도움을 준 거죠. 게다가 내가 운동한 게 아니란 걸 그 사람은 아니까. 난 실컷 맞았는데 계엄군들은 그대로 떠났어요."

최씨는 건물 옆 조그만 화단 터에 1시간쯤 쓰러져있다가 도청 화장실로 들어갔다. 씻으려고 거울을 봤을 땐 이미 얼굴이고 옷이고 전부 피가 낭자했다.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오른쪽 눈이 흐릿했다.

해가 질 무렵 담양경찰서에서도 최씨가 다친 사실을 알게 됐다. 경찰은 "네가 다치기도 했고 상황이 장기화되니 담양으로 차를 갖고 돌아가라. 나중에 필요하면 다시 회사로 연락할 테니 그때 오라"고 했다.

경찰들은 최씨가 안전하게 광주를 벗어날 수 있도록 계엄군 측과 무전을 주고받으며 인솔해줬다.

담양으로 돌아와 회사에 차를 대고 집으로 걷고 있을 때였다.

동네서 유명한 한 한의사가 최씨를 보고 "자네 모습이 왜 그런가"라고 물었다. 최씨는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참혹한 시신의 모습도 전했다.

이튿날이었다. 회사에서 오전 일찍부터 집으로 전화가 왔다.

몸이 퍼져 일어나기조차 힘들었다. 최씨는 출근이 어려울 것 같다고 했지만 회사에서는 "누가 찾으러 왔다"며 얼른 나오라고 했다.

누구냐고 묻자 국보위(국가 보위비상대책위원회)와 국군기무사령부 방첩대라고 했다. 최씨가 전날 말한 끔찍한 시신 이야기가 퍼져 난리가 난 것이었다.

어머니는 최씨에게 "뉴스에서는 시체가 하나도 없다고 하더라.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은 '유언비어'라고 그런 소문을 내는 사람은 다 간첩이라고 했는데 네가 그런 말을 하고 다녀서 난리가 난 것 같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겁에 질린 최씨는 평소 창고로 쓰는 회사 제 2사무실에 있는 차를 하나 훔쳐 도망쳤다. 군 생활을 했던 위쪽으로 올라가 서울과 수원, 양주 등에서 한 달여간 도피했다.

다시 담양에 돌아왔을 때 군인이나 경찰은 없었다. 차를 돌려놓으러 간 사무실도 조용했다. 그러나 집안은 쑥대밭이 돼 있었다.

"국보위랑 방첩대가 나 잡으러 와서 새벽 5시부터 밤늦게까지 온 가족한테 '어디 가느냐'고 하고 집 통로를 막고, 장도 못 보게 하고. 동생들에게 해코지하거나 집을 부수기도 한 거예요."

가족들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느냐"며 "나가버리라"고 소리쳤다. 젊은 최씨도 아무 잘못도 없는 자신에게 탓을 하고 이해해주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화가 나 집을 떠났다.

젊고 두려움이 없었으니 집 나와서도 살길은 있었다. 화물차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취직도 쉬웠다.

그러나 그날부로 최씨의 오른쪽 눈은 점점 더 빨갛게 충혈되고 초점이 희미해졌다.  

몇 달 뒤 광주 동구 대인동에 있는 박안과에 갔다. 병원에서는 "왜 이제야 왔냐"고 최씨를 나무랐다. 다치고 난 뒤 1달간 도피 생활을 하며 치료를 받지 못한 데다가 그 이후로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병원에 갔기 때문에 시력은 이미 많이 감퇴한 상태였다.

안개 낀 것처럼 흐렸던 최씨의 오른쪽 눈은 어느 날 갑자기 아예 보이지 않게 됐다. 한쪽 눈이 안 보이니 운전도 할 수 없게 됐고 그때부터 장애인이란 시선도 견뎌야 했다.

"사람을 첫 대면 하면 제일 먼저 눈을 보잖아요. 그러면은 내 자신이 참…. 소외감을 느끼죠. 대화하다 보면 눈 때문에 나를 한단계 낮춰보는, 깔고 보는, 자기보다 밑이라고 여기니 반말하고…. 그런 수치심? 참 억울하고 그렇죠."

군인들에게 폭행당한 후유증은 눈뿐만이 아니었다. 근골격 질환과 요추부 강직 진단을 받고 3번의 허리 수술을 받아야 했다. 당시 파상풍도 걸려서 고된 치료가 이어졌다. 72㎏쯤 나가던 최씨의 몸무게가 48㎏까지 빠지기도 했다.

지난 25일 만난 5·18 피해자 최귀연씨가 자신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호소하고 있다. 2022.03.26/뉴스1
지난 25일 만난 5·18 피해자 최귀연씨가 자신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호소하고 있다. 2022.03.26/뉴스1

정신적 고통은 더했다. 최씨는 삶의 모든 순간 중 그날 시체를 봤던 그 짧은 순간이 가장 강렬했다고 말했다.

"5·18 관련된 사진이나 다큐멘터리 보면 끔찍한 장면 많잖아요. 그걸 난 실제로 본 거예요. 충격이 어마어마하죠. 눈 감으면 떠오르고, 악몽 꾸고."

가족들과의 관계도 트라우마다. 그날 집을 나간 이후로 현재까지 남으로 지내고 있다. 평생을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생계유지에 도움을 줬던 착실한 아들은 가족들에게 있어 '천덕꾸러기'로 남아 버렸다.

1990년 국가에서 5·18 피해자들을 찾아 보상을 해주겠다고 나섰다. 최씨 역시 당시 피해 보상을 받기 위해 신청서를 작성했지만 '반려'됐다.

최씨는 '상무관에 시체가 들어오자마자 시민들이 태극기를 덮어줬다'고 증언했는데 기록에는 '나중에 시체들이 쌓이고 나서 그때부터 태극기를 덮었다'고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군인이 폭도를 죽였는데 태극기를 덮어줬겠냐'는 일부 세력의 의견도 있었다.

최씨는 억울한 마음에 신문 광고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기억을 생생하게 가진 목격자를 찾지는 못했다.

이후 광주시청 선양과에 있던 한 계장급 공무원이 그날 상무관에 있던 사람을 소개해줬다. 강천수 상무관 관장이었다.

다행히 강 관장은 최씨의 진술이 맞다고 사실을 확인해줬다. 1960년부터 상무관 관장을 해온 강 관장은 누군가 관을 가져와 시체를 넣고 태극기를 덮었고 자신이 촛불과 방석을 갖다 놓았다고 증언해줬다.

최씨는 그 덕분에 2010년 3월이 돼서야 유공자로 인정 받을 수 있었고 기타 1급 수준으로 보상금 1200만원을 받았다.

부모·형제와 연을 끊고 평생을 외롭게 지낸 최씨에게 남은 하나의 희망은 8~90년대생의 어린 자녀들과 아내뿐이다.

그는 "눈도 안 보이고 정신과 치료도 받는 나를 집사람이 먹여 살려줬다"며 "저 사람이 아니었으면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정신적 보상금을 받으면 가족을 위해 쓰고 싶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소망은 억울하게 5·18 피해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동지들을 구제하는 것이다.

"제가 눈을 다쳐서 안과를 갔잖아요. 나중에 보상금 받을 때 증빙서류 내려고 갔더니 의사가 죽어서 폐업을 했더라고요.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병원들이 문을 많이 닫았죠, 관계 당국에서 확인을 해줄 수 있는 법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같이 다치고, 힘들고, 트라우마 있는 사람들끼리 그걸 좀 도와야죠."


breath@news1.kr

이런 일&저런 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