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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얘기하고 싶지 않아…분신자살 시도했지만 죽음도 날 버려"

[5·18 정신적 손해배상⑮] 두차례 구속·수감된 이무헌씨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이수민 기자 | 2022-03-05 10:00 송고
편집자주 '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지난 4일 오후 광주 서구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이무헌씨(66)가 자신의 40여년 전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이씨는 80년 5월 당시 시위에 참여했고 이후 두차례나 구속·수감됐다. 2022.03.05/뉴스1
지난 4일 오후 광주 서구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이무헌씨(66)가 자신의 40여년 전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이씨는 80년 5월 당시 시위에 참여했고 이후 두차례나 구속·수감됐다. 2022.03.05/뉴스1

'띵동, 띵동'

4일 오후 광주 서구의 한 주공아파트. '민주 유공자의 집' 문패가 붙어있는 현관 앞에서 벨을 눌렀다. 인기척이 없었다. 수초가 지나서야 안에서 "네~"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문은 한동안 열리지 않았다. 다시 벨을 눌렀다. 다시 수초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현관문이 열렸다.
5·18유공자 이무헌씨(66). 다리가 불편한 듯 조금씩 절며 취재진을 맞았다. 무뚝뚝한 얼굴,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다리가 많이 불편하셨구나."

거실에 앉으며 일부러 말을 건넸다. 벨을 '두 번'이나 누른 게 순간 미안하기도 했다.

"다리 저는 건 심한 것도 아니에요. 골반이랑 허벅지가 더 아프지. 화상 흉터도 심하고."
이씨는 자신의 상의를 걷어 흉터를 보여줬다.

"아니, 어쩌다 이렇게 화상을 입으셨어요?"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 물었지만 이씨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5·18 얘기는 안하고 싶어요. 유일하게 5·18로 두 번 수감됐고 가슴에 묻어두고 살기로 했어. 말해봤자 앞에서는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뒤돌아서면 간첩, 폭도 새끼라고 하니까."

이씨는 자신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을 만한 사람에게만 '그날'의 기억을 털어놓는다고 했다.

간첩과 폭도라는 시선, 전과자라는 오명으로 얻은 오랜 대인기피증 때문에 색안경을 끼는 사람에겐 애초에 말조차 꺼내지 않는다고 했다.

취재진이 인터뷰 취지와 지난해 11월부터 4개월여간 만난 5·18 피해자의 사연 등을 설명하며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를 사람으로 치유할 수 있게 돕겠다고 설득했다.

그제야 이씨는 서랍 한쪽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놓으며 40여년 전 그날의 기억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오라이, 오라이'하는 버스 안내원이었어요. 그땐 남들이랑 잘 지냈죠. 승객한테 먼저 인사도 하고, 돌아다니는 것 좋아하고."

80년 5월, 스물네 살이던 이씨는 버스 운수회사인 광전교통에서 버스 안내원으로 일했다. 버스 안내원은 대부분이 여성이고 회사에서 이씨는 몇 없는 남성 버스 안내원이었다.

평상시는 일반 승객이 타는 시내버스에서 일했다. 하지만 그해 5월18일은 검찰청에 차량을 대절한 특별한 날이었다. 검찰 부부 야유회가 있어 오전 4시쯤 운전기사와 함께 관광버스를 타고 전남 여수로 향했다.

여수 바다 여행을 마치고 오후 8시쯤 광주에 도착했다. 광주 톨게이트를 지나 시내로 들어서려는 순간 군인들이 차량을 통제했다.

계엄령이 떨어졌다고 했다. 이씨는 어리둥절했다. 그때 검찰 한 명이 버스에서 직접 내려 신분증을 보여줬고 군인들은 몇 분간의 토의 끝에 길을 터줬다.

광주 시내는 조용했다. 차량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검찰 관계자는 버스 운전사와 이씨에게 지프차 한 대를 내어주며 "우리 때문에 늦게 온 것이니 이 차를 이용해 집으로 가라"고 했다.

남구 백운동 집에 오니 부모가 낮 상황을 설명해줬다. 어머니는 계엄령이 내려져 군인들이 청년들을 때리고 잡아간다며 절대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다.

"어머니는 걱정하시며 나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나는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기더라고요. 19일 새벽 2시쯤 담을 넘고 전봇대를 타고 내려가 시내로 갔어요."

시내 광주천 근처 옛 현대극장 앞에는 대학생들이 열댓명 모여 있었다. 그들은 국민학교만 나온 '배우지 못한' 이씨에게 전두환이 누구이고 왜 광주를 점령했는지 등 현 시국을 설명해줬다. 날이 밝자 골목에는 500명 넘는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대학생들의 얘길 듣고 시위에 동참했어요. 19일 낮부터 21일까지 사흘간 시위를 했는데, 전남대 앞과 충장로, 도청, 백운동까지 데모하면서 군인들과 쫓고 쫓겼죠."

20일 오후 7시쯤 이씨는 충장로 한미제과 앞에서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치다 계엄군 10여명에게 붙들렸다. 곤봉으로 머리를 맞아 잔뜩 피를 쏟았다. 다행히 함께 있던 대학생들이 그를 데리고 도망친 뒤 응급조치를 해준 덕에 끌려가진 않았다.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집단발포하면서 수많은 시민이 희생됐다. 이씨는 그날 오후부터 활동 반경을 넓혔다. 광주의 상황을 알리고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태창운수의 시내버스를 몰고 목포와 영광, 함평 등을 돌아다녔다.

목포와 무안경찰서에서는 총과 화약을 챙길 수 있었지만, 영광과 함평서에서는 아무것도 구하지 못했다. 이들은 나주 화약고로 향했다.

"무기를 챙겨야 하는데 충분히 구하지 못했으니까 화약고로 간 거죠. 그런데 역시나 그곳에도 아무것도 없어서 허탕을 쳤어요. 어쩔 수 없이 다시 광주로 돌아왔죠."

광주에 돌아온 뒤 이씨는 집으로 귀가했다. 계속해서 시위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계엄군 앞에서 시민군은 무력했고 죽어가는 시민군들을 보며 두려웠다고 한다. 며칠 뒤 열흘간의 5·18민주화운동은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이씨는 모든 걸 잊고 다시 버스 안내원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되돌아갈 수 없었다.

동네 곳곳에 '이번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모두 잡아내 가택 수색하고 엄벌에 가한다'는 전단이 붙었다. 소문에는 자수하면 감형을 해주지만 끝까지 버티다 잡히면 사형이 선고된다고 했다.

이씨는 29일 광주천 건너에 있던 한일극장 공중전화로 경찰서에 전화해 자수했다. 경찰차 두대가 오더니 이씨 손목을 밧줄로 묶고 505보안부대로 연행했다.

이씨는 505보안부대에서 모진 고문과 수사를 받고 내란음모죄 혐의를 받았다. 6월9일 전투병과 교육사령부(상무대) 헌병대 영창에서 최종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상무대에서의 구금 생활은 끔찍했다.

"내무반에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군인들이 불침번을 서다가 '심심하다'고 폭행하고, 담배를 피우다 걸려 곡괭이로 30여대를 맞기도 했어요. 계속되는 폭행으로 골반에 이상이 왔고 부동자세로 앉아있기도 어려워졌죠."

81년 4월3일, 이씨는 주동자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돼 석방됐다. 구속된 지 10개월 만이었다.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됐지만 이씨는 다시 평범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이씨 측이 <뉴스1>에 공개한 1994년 국가로부터 지급받은 보상금 산출내역 일부. 두차례에 걸친 이씨의 수형 기간이 총 '340일'로 표기돼 있다. 2022.03.05/뉴스1
이씨 측이 <뉴스1>에 공개한 1994년 국가로부터 지급받은 보상금 산출내역 일부. 두차례에 걸친 이씨의 수형 기간이 총 '340일'로 표기돼 있다. 2022.03.05/뉴스1

출감 후 이씨는 버스 안내원 일을 다시 했다. 몇 개월 뒤 경찰이 운수회사로 찾아와 느닷없이 이씨를 연행했다.

당시 함께 전남에 다녀왔던 동지(공범)들이 늦게 자수하면서 총기, 화약 탈취 혐의가 추가됐다는 이유였다.

연행된 시점은 이씨의 기억과 서류상 기록이 조금 다르다. 이씨는 81년 11월부터 12월이라고 얘기했으나, 수형 기록에는 82년 1월22일부터 3월3일까지로 적혀 있다.

이씨는 "시간이 오래 흐른 데다, 고문 후유증으로 기억력이 나빠져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씨는 다시 구속됐다. 혐의는 소요죄와 특수 절도였다. 2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5·18과 관련해 두번이나 구속된 건 이씨가 유일했다.

"분명 나주 화약고에서 아무것도 챙긴 게 없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내가 무기를 훔쳤다는 거예요. 정말 아무것도 없었는데…. 게다가 뭔가 있다고 한들 당시는 어쩔 수 없이 부모, 형제들을 지키기 위해서 탈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다시 들어간 감방 생활은 이전보다 더 가혹했다. 두 번째 수감이라는 이유로 군인들은 이씨를 흉악범 다루듯 했다.

"삽을 들고 '모가지를 자르겠다'고 협박했고, 다른 공범들과 말을 맞추게 해선 안된다며 가장 좁은 독방에 갇혀 한 달간 살았죠."

한 달여간의 구금 끝에 이씨는 가석방됐다. 전두환은 취임 1주년과 삼일절 특사에 따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5·18 관련자 등 시국사범을 포함해 2863명을 사면·가석방했다.

"유일하게 5·18 문제로 두번이나 교도소에 잡혀간 사람이 나예요. 한번 다녀온 사람들도 죽겠다고 그러죠? 나는 두 번인데 얼마나 심했겠어요. 세상만사가 억울하고 사람들이 다 싫고 그래요."

고문과 상처 등으로 이씨는 정신 분열과 기억력 감퇴 등 후유증을 겪었다. 귀에선 매일 누군가 속삭이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환청을 없애 달라며 울다 지쳐 잠드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82년 8월 이씨는 가족들의 조언으로 인근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첫 입원 때는 금방 병세가 나아져 3개월 만에 퇴원했다. 하지만 이후로 84년 3~7월, 86년 7~8월, 86년 9월~87년 4월까지 정신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하는 주기가 점점 짧아졌다. 86년 세 번째 입원부터는 자해를 할 수 있다며 수갑을 채웠다.  

이씨가 자신의 몸에 남은 화상 흉터를 보여주고 있다. 2022.03.05/뉴스1
이씨가 자신의 몸에 남은 화상 흉터를 보여주고 있다. 2022.03.05/뉴스1

85년 8월25일 무더운 여름, 정신병원에서 잠시 퇴원했을 때 분신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이런 세상에서 못 살겠어서요. 요시찰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요. 하루는 동 밖을 나왔는데 백운동 파출소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나 어디 갔냐고.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죽는 게 낫겠다 싶어서 기름을 샀죠."

자신을 이렇게 만든 그들에게 대항하고 싶었다고 했다. 5·18 최후 항전지인 도청 앞 전일빌딩에 섰다. 주유소에서 사 온 기름을 몸에 들이붓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화르르' 뜨거운 기운이 온몸을 감쌌고 어질한 기름 냄새와 타는 냄새가 동시에 났다. 시민들의 "어떡해" "죽으려나 봐" 등의 목소리가 마지막 기억으로 남았다. 이씨는 그대로 쓰러졌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부모님의 울고 있는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이씨는 눈물을 흘렸다.

"부모에 대한 미안함, 후회보다는 죽는 것마저도 실패한 것과 죽음마저도 나를 버린 것에 눈물이 난 거죠.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자살할 것 같아 주유소 직원이 '석유'를 줬대요."

휘발유나 시너였으면 이씨는 죽었겠지만 석유는 불이 잘 타지 않았다.

얼굴에 1도, 몸통에 3도의 화상을 입었고 즉시 수술을 해 살아 남았다. 하지만 흉터와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후로 약 40년간 정신과 약과 외상, 화상약을 매일 복용했다. 고통이 심할 땐 하루의 10알의 진통제를 먹어야 했다.

1994년 국가로부터 1억70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두 번의 구속에 총 구금 일수가 340일이라 보상금이 다른 피해자들보다 많았다.

하지만 두 번의 이혼으로 합의금을 전부 쏟아내야만 했다. 남과 어울리지 못하고 대인기피로 가정생활이 평탄치 않았다.

지금 이씨의 곁에 남은 건 96세의 아버지와 92세의 어머니뿐이라고 했다.

"정신적 손해배상을 위한 싸움을 하고 있잖아요. 혹시나 보상금을 받으면…. 부모를 두고 먼저 죽으려고 했던, 못난 아들을 평생 응원해주신 우리 부모님 건강에 쓰고 싶어요."


breat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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