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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타고 가는데 '탕탕탕' 갑자기 총알 날아와"

[5·18 정신적 손해배상⑭] 해남 우슬재 총격전 겪은 이병수씨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이수민 기자 | 2022-02-26 10:00 송고
편집자주 '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25일 오후 광주 북구 양산동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이병수씨(66). 이씨는 80년 5월 당시 전남 해남 옥천면에서 '우슬재 전투'를 겪은 당사자다. 2022.02.26/뉴스1 © 뉴스1
25일 오후 광주 북구 양산동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이병수씨(66). 이씨는 80년 5월 당시 전남 해남 옥천면에서 '우슬재 전투'를 겪은 당사자다. 2022.02.26/뉴스1 © 뉴스1

"버스에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탕, 탕, 탕' 소리가 나더라고. 옆 사람이 막 총 맞아서 넘어가고. 말 그대로 혼비백산했는데, 눈이 헤까닥 돌드라고."

광주 북구 양산동의 한 아파트에 사는 이병수씨(66).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 해남 옥천면 '우슬재 전투'를 겪은 당사자다. 우슬재 전투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해남에서 일어난 '5·18민주화운동'이다. 
25일 오후 자택에서 만난 이씨는 눈을 크게 뜨고 손짓발짓을 더해가며 그날의 상황을 전했다. 4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선명히 기억난다고 했다.

이씨는 대화 도중 자주 왼쪽 허벅지를 주무르거나 주먹으로 가볍게 톡톡 쳤다. 붕대가 감긴 왼쪽 발에는 치료기기가 매달려 있었다.

다리가 불편하시냐고 물었더니 '에잇, 참' 혀 차는 소리를 내며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보였다. 다리 곳곳에 얼룩덜룩한 상처가 나 있었다.
"이거 다 5·18 때 두들겨 맞아서 그런 거여. 맞아서 가슴도 튀어나오고, 머리도 터져서 종양도 있어. 아따, 또 그 생각항께 확 끓어오르네."

80년 당시 스물네 살이던 그는 육 남매 중 장남으로 해남 매일시장에서 과일 노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5월21일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오후 2시30분쯤 광주에서 시위대가 타고 온 버스와 화물차가 해남읍 광장에 도착했다.

30~40명의 시위대가 차량에서 다섯 구의 시신을 내렸다. 시신 중 한 명은 이씨도 아는 사람이었다. 해남 계곡면 출신으로 공부를 잘해 전남대에 진학했던 동네 형 A씨였다.

A씨의 어머니는 그대로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른 해남군민들도 시신을 확인하고 곡소리를 냈다. 시위대는 광주에서 군인들이 무차별 살상했다고 참상을 알렸다.

"그때 당시 그 부모들은 얼마나 기가 막히겄어. 해남서는 광주로 대학 갔다면 현수막 걸고 엄청 자랑해. 근디 다 키운 아들을 글케 보냈으니 어쨌겄어. 아짐(아주머니)이 정신 돈 거를 봉께 나도 뭐라도 해야겄더라고."

해남청년회의소 회원들과 함께 30분쯤 뒤 해남교육청 앞 광장(현재의 군민광장)에서 성토대회를 열었다. 3000여명의 군민이 몰렸다. 군민들은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철폐!" 등의 구호를 외쳤다. 군민들은 시위대에게 김밥과 물을 나눠주며 응원했다.

오후 5시쯤 또 다른 시위 차량이 해남에 추가로 내려와 광주의 계엄군 발포 소식을 전했다. 시위 열기는 더욱 고조됐다.

이씨를 비롯한 해남 청년들은 시위대에 동참했다. 이씨는 완도와 해남을 오가는 버스에 올라타 군민들에게 참상을 알리고 무기를 찾기로 했다. 버스는 광주의 한 운수회사에 다니는 박충렬씨가 몰았다. 박씨는 "광주에서 보니 무기가 없어 싸우지를 못하더라"며 "무기를 찾자"고 설득했다.

22일 이씨를 비롯한 시위대는 해남읍, 마산면, 황산면, 문내면, 화원면을 돌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 도중 계곡지서·옥천지서·화산지서·월송지서·월안지서·우수영지서 등 6개 경찰지서에서 무기를 획득했다. 오후 5시30분 무렵에는 해남경찰서 무기고에서 무기를 얻었다.

이씨가 탄 차량 시위대가 해남 백야리를 지날 때였다. 시위대는 당시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버스와 마주쳤다. 시위대 버스는 두 대였지만 군인 버스는 60대가 넘었다. 버스 앞엔 상사 계급장을 단 군인이 중앙에 서 있고 방위병들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 하늘에선 헬기가 빙빙 돌고 있었다.

군인들은 발포 명령을 명분으로 해산을 요구했다. 한 군인이 이씨가 탄 시위대의 버스 안을 보더니 "수류탄만 있는 게 아니고 박격포에 총까지 챙겼냐. 다룰 줄도 모르는 민간인에게 어떻게 이걸 주겠냐. 내 놓으라"며 해산하라고 타일렀다.

몇 시간의 대치 끝에 시위대는 발포 명령 연기를 조건으로 무기 일부를 반납하고 해산을 약속했다. 하지만 시위대 중 상당수는 구호 만을 외치는 '평화 시위'를 조건으로 해산하지 않고 시위를 이어갔다.

23일 새벽 1시쯤, 며칠간의 시위로 지친 청년들은 이동하는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탕, 탕, 탕' 큰 소리와 함께 버스 안으로 총알이 날아왔다. 바깥을 보니 옥천면 우슬재 쯤이었다.

군인들이 매복해있다가 버스가 지날 때 맞춰 총을 쏜 듯했다.

이씨를 비롯해 시위대는 반사적으로 총을 챙겼다. 밖을 바라보며 조준 사격하거나 내릴 수도 없었다. 무작정 창밖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버스에서 나도 졸고 있었제. 갑자기 총소리가 막 난께 우리도 정신없이 창밖으로 총을 쏴제끼고, 운전하는 박충렬이는 핸들을 요리조리 돌림시롱 빠져 나갔제."

버스는 군인들을 피해 먼 곳으로 도망쳤다. 숨을 돌리고 보니 버스에 피투성이가 된 동지들이 몇몇 보였다. 시위대 지도부에 속했던 형들이 시신을 정리했다. 당시 31사단 2대대장은 사망자를 2명이라고 밝혔으나 이씨는 4명이라고 말했다.

24일 이씨를 비롯한 청년들은 시위를 처음 시작한 해남 읍내로 돌아왔다. 해남중학교 앞, 군부대장과 읍장은 "더이상 죽지 말아라. 살아야 나중에 후손들한테 사실을 알릴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설득했다. 시위대는 대화를 통해 남은 무기를 전부 자진 반납하고 운동을 종료했다.

5·18이 끝나고 이씨는 다시 생업으로 돌아왔다. 몇 년간 노점을 하며 모은 돈으로 매일시장 안에 가게를 얻어 '청과가게'를 열었다.

7월12일이었다. 이씨는 며칠간 경남 진주와 의령에 있는 수박밭으로 물건을 떼러 다녀왔다가 어머니로부터 해남경찰서 정보과 경찰들이 가게를 뒤졌다는 말을 들었다.

이씨의 어머니는 "형사들이 '조서'만 받으면 된다고 했다. 네가 시위대에 참여했다는 걸 다 알고 있더라"며 "얼른 자수해라. 조서만 받으면 내보내 주겠다고 했으니 성가시니까 빨리 다녀와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걱정과 권유에 이씨는 곧장 경찰서로 향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이씨와 어머니는 경찰의 회유였다는 걸 몰랐다.

이씨가 정보과를 찾아 "제가 이병순디요"라고 하자 경찰들은 곧장 그를 연행해 광주 상무대 영창으로 끌고 가 구속수감했다. 이씨를 비롯해 차를 운전했던 박충렬 등 12명이 해남 시위 주동자로 몰려 끌려갔다.  

25일 오후 광주 북구 양산동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이병수씨(66)의 다리에 상처가 남아있다. 이씨는 80년 5월 당시 전남 해남 옥천면에서 '우슬재 전투'를 겪은 당사자다. 2022.02.26/뉴스1 © 뉴스1
25일 오후 광주 북구 양산동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이병수씨(66)의 다리에 상처가 남아있다. 이씨는 80년 5월 당시 전남 해남 옥천면에서 '우슬재 전투'를 겪은 당사자다. 2022.02.26/뉴스1 © 뉴스1

"광주도 처음 갔고, 상무대는 어딘지도 몰랐제. 그냥 가자고 항께 기동대 차 타고 간겨거지. 가게는 어찌 될랑가, 엄니랑 동상들은 어쩔란가 막막하드라고."

상무대 영창엔 400명 정도가 잡혀 와 있었다. 이씨는 매일같이 고문을 받았다. 군인들은 입고 온 옷을 전부 벗긴 뒤 하얀 러닝셔츠와 군복 바지를 하나 나눠줬다. 허리께엔 칫솔을 하나 꿰매줬다. 맨발로 걸어 다니다 보니 발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군인들은 이씨와 함께 해남서 올라온 시위대를 모아놓고 "광주에서 내려왔던 시위대가 간첩이었다"며 "간첩과 내통한 니들도 간첩이다"고 협박했다. 계엄법 위반과 총기 탈취 등 죄목이 씌워졌고 폭언과 전신 폭행, 고문이 계속됐다.

조서를 받던 중 한 조사관이 "너 버스 타고 있을 때 절도했으니까 절도죄도 추가한다"고 말했다. 이씨가 "저 절도한 적은 없는데요?" 했더니 "너 버스비 냈어?"라고 물었다.

이씨가 "차장이 없으니 안 냈죠"라고 대답했더니 검사관은 "버스비 안 냈으니까 절도죄야, 이 새끼야. 이 강도새끼"하고 절도죄를 죄명으로 붙였다.

따질 수도 없었다. 왜냐고 대들었더니 곤봉이 날아왔고 머리에선 피가 흘렀다. 이때의 상처로 이씨는 나중에 뇌종양에 걸렸다고 했다.

이씨가 구금 기간 중 가장 괴로웠던 것은 폭행보다도 군인들의 농락이라고 했다. 군인들은 시위대를 장난감 다루듯 괴롭혔다.

"일렬로 세워 놓고 눈을 감으라고 한 뒤 아무 이유 없이 두들겨 패는 거지. 총구를 갖다 대고 겁을 주기도 하고. 고등학생 하나는 총구를 머리에 댕께 겁이 나 오줌을 지리기도 했제. 모두 눈을 감겼을 때 실눈으로 떠서 봉께 군인들이 낄낄 처 웃고 있드라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니 몸은 날로 쇠약해졌다. 끔찍한 120일간의 시간이 지나고 이씨는 80년 말 군 법정 재판을 통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고 출소했다.

"출소하던 날 헌병대가 '여그서 있었던 일은 절대 말하지 말어라. 발설하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분다'고 협박하드라고. 알겠다고 고개만 끄덕했는디, 하도 오래 고문받고 협박 받은께 완전 바보가 된 것 같드라고."

과일가게가 있던 매일시장으로 돌아왔지만 간판은 없었다. 이씨가 구금된 사이 돈이 없자 어머니는 헐값에 차량과 가게를 다 내놓았다. 처음에는 어머니를 원망했지만 이내 차라리 잘됐다고 이씨는 생각했다.

고문 후유증은 생각보다 깊었다. 목뼈와 가슴뼈가 파열돼 있었고 곤봉으로 수차례 맞았던 머리에는 뇌종양이 생겼다. 몸 곳곳에 신경이 마비돼 기능을 잃었다. 신장이식 수술까지 받았다.

"몸도 성하지 않고, 병원비는 필요하니 다 팔아 버린 게 낫다고 생각한 거지. 그땐 꿈도 희망도 없었어."

돈을 벌 수조차 없었다. 몸이 성하지 않으니 써주는 곳은 없었고 '폭도' '간첩'이라는 손가락질과 요시찰이 붙어 남들 시선도 두려웠다. 쓰레기 차를 청소하는 곳에 취직하려고 찾아갔지만 그곳에서도 거절당했다.

배운 게 과일 파는 것이었으니 다시 그 일을 해야만 했다. 이씨는 노점부터 다시 시작했다. 8년간 고생 끝에 서른두 살 때쯤 돈벌이가 나아지면서 결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생활도 쉽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행복감을 주지 못했다.

"평생 술 담배를 한번도 입에 댄 적도 없는데 늘 골골거렸어. 몸이 아픈께 가족들에게 화도 자주 내고 짜증도 많아졌지. 밥 한 끼 안 묵었어도 약이 너무 많응께 약 묵다 보믄 배가 불렀고 애들 외식 한번 제대로 시켜주지도 못했제."

아이들이 중학생 때쯤 아내와 이혼하고 이씨는 혼자가 됐다. 아직까지도 혼자 지내지만 하루 4시간씩 활동 보조사가 집을 찾을 때면 조금은 덜 외롭다고 했다.

지난 세월을 털어놓던 이씨가 자녀들 이야기를 하다가 말을 멈췄다.

그는 1990년에 장애 14등급을 받고 국가로부터 38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병원비와 약값을 보태느라 자식들에겐 뭐 하나 해준 것이 없어 미안함이 크다고 했다.

"우리 아들이 88년생인디 아직 결혼을 안했어, 정신적 손해배상 받으면 아들 결혼 시키는 데 일조를 하고 싶은디. 그때까지 살 수나 있을랑가 몰것네."

안방 TV에서 대선 관련 뉴스가 나왔다.

"대통령 되겠다고, 국회의원 되겠다고 5·18묘지 참배했던 인간 중에 우리한테 뭣 하나 해준 놈 없어. 근데 웃긴 게 그놈들 가고 나면 국민들은 우리만 욕해."


breat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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