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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 모두 광주 시민에게 빚을 졌어요"

[5·18 정신적 손해배상⑬] 5·18 피해자 찾은 송봉은씨 가족
80년 간첩으로 몰린 이영자 할머니 찾아 세종시에서 광주로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이수민 기자 | 2022-02-19 10:00 송고
편집자주 '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18일 오후 광주 남구 한 아파트에서 5·18 당시 간첩으로 몰렸던 주부 이영자(79) 할머니와 세종시에서 온 박정숙씨(57·여)가 포옹하고 있다. 2022.02.19/뉴스1
18일 오후 광주 남구 한 아파트에서 5·18 당시 간첩으로 몰렸던 주부 이영자(79) 할머니와 세종시에서 온 박정숙씨(57·여)가 포옹하고 있다. 2022.02.19/뉴스1

"뵙고 싶어서 왔어요.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60대 중년 부부와 20대 두 딸이 처음 만난 70대 할머니 앞에 큰절을 올렸다. 할머니는 쑥스러워하며 손사래를 치면서도 덩달아 고개를 깊숙이 숙여 맞절을 했다.
"아이고, 무슨 절을 혀.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디…."

18일 오후 5시 광주 남구의 한 아파트.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간첩으로 몰렸던 주부 이영자(79) 할머니 집에 낯선 방문객이 찾아왔다.

세종시에 사는 송봉은씨(62) 가족. 송씨는 아내 박정숙씨(57), 스물아홉살과 스물여덟살 등 두 딸과 함께 이영자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200㎞를 달려 광주에 도착했다.
18일 오후 광주 남구 한 아파트에서 5·18 당시 간첩으로 몰렸던 주부 이영자(79) 할머니에게 세종시에서 온 송봉은씨(62) 가족이 큰절을 올리고 있다. 2022.02.19/뉴스1
18일 오후 광주 남구 한 아파트에서 5·18 당시 간첩으로 몰렸던 주부 이영자(79) 할머니에게 세종시에서 온 송봉은씨(62) 가족이 큰절을 올리고 있다. 2022.02.19/뉴스1

이날 만남은 이메일 한 통이 계기였다. 전날 오후 기자의 이메일 계정으로 메일 한 통이 전달됐다. 송씨가 보낸 메일이었다.

지난해 뉴스1이 보도한 <"80년 5월, 함께했던 '황금동 유흥가 여인들' 찾고 싶어">라는 제목의 이영자 할머니 관련 기사를 보고 온 가족이 광주를 찾았다는 내용이었다. 가족들은 할머니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기자가 송씨와 이 할머니에게 연락했고 흔쾌히 만남은 이뤄졌다. 
지난 17일 기자에게 온 이메일 캡처. 세종시에 살고 있는 송봉은씨(62) 가족이 이영자 할머니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2022.02.19/뉴스1
지난 17일 기자에게 온 이메일 캡처. 세종시에 살고 있는 송봉은씨(62) 가족이 이영자 할머니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2022.02.19/뉴스1

송씨 가족과 이 할머니가 전용면적 26㎡(약 8평)의 작은 방에 둘러앉았다.

이 할머니는 집이 좁은 데도 40여 년간 혼자 살다 보니 늘 허전하고 휑하다고 했다. 그는 "웬일로 북적이니 사람 사는 집 같다"며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가 싶다. 마음이 기특하다"고 송씨 가족을 반겼다.

송씨는 할머니 관련 기사를 읽은 뒤 직접 만나고 싶어 가족들과 2박3일 일정으로 광주 여행을 왔다고 했다. 5·18 당시 최후항전지인 옛 전남도청과 5·18 흔적이 남은 전남 화순까지 둘러봤다고 했다.

이 할머니가 지난 40년간의 한 많은 세월을 풀어냈다.

"80년 그날보다 이후로 살아온 세월이 더 힘들었어. 쉬쉬하고 살았제, 이보게 '나 유공자요' 하지도 못혀. '간첩'이라고 소문날까 봐, 사람들이 날 경계할까 봐 움츠려 살았제."

80년 5월 광주의 상황부터 여전히 비난받고 소외된 삶을 사는 현재까지, 이씨의 생생한 얘기가 쏟아졌다. 송씨 가족은 할머니의 증언에 놀란 표정으로 '어머' '어떡해' 하며 안타까워했다.

이 할머니가 대공 기관인 광주경찰서 113 수사본부에 끌려가 야구 방망이로 두들겨 맞았던 기억을 설명할 때는 송씨 가족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둘째딸은 마치 자신이 맞는 것처럼 '으' 소리를 내며 움츠러들었다.

이 할머니는 조명 하나 켜지 않은 캄캄한 방에서 매일 우두커니 벽을 보고 혼자 지낸다고 했다. 80년대 5·6공화국 때는 오월학살의 최고책임자인 '그들'의 얼굴이 나올까 봐 TV 전원 한번 켜지 못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 할머니는 5·18로 인한 신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트라우마가 더욱 심하다고 몇 번을 강조했다.

이 할머니는 "당시 무차별적인 폭행으로 청력을 잃고 하반신 통증도 심하다"며 "하지만 몇십년 째 반복되는 악몽과 계속되는 동지들의 자살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었다"고 말했다.

18일 오후 광주 남구 한 아파트에서 5·18 당시 간첩으로 몰렸던 주부 이영자(79) 할머니가 세종시에서 온 송봉은씨(62) 가족에게 당시 기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2022.02.19/뉴스1
18일 오후 광주 남구 한 아파트에서 5·18 당시 간첩으로 몰렸던 주부 이영자(79) 할머니가 세종시에서 온 송봉은씨(62) 가족에게 당시 기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2022.02.19/뉴스1

2시간여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아파트 창가가 어둑어둑해졌다. 송씨와 가족들이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씨가 겉옷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금액은 밝히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후원금을 담았다고 했다.

송씨가 할머니의 손에 쥐여주자 할머니는 또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부끄럽게 뭐 이런 걸 준다냐. 됐어, 주지 말어. 그냥 넣어둬."

봉투를 받지 않겠다는 이영자 할머니의 손을 송씨가 꼬옥 붙잡았다.

"선생님, 뭐가 부끄러우세요, 당당하게 사셨잖아요.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광주 시민에게 빚을 졌어요."

송씨의 말에 "고맙다"던 이 할머니의 목소리가 잠겼다.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할머니는 '하이고' 소리를 내며 울음을 삼켰다.

송씨와 아내 박씨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혔다. 아내 박씨가 콧물을 훌쩍이며 할머니를 안았다.

"선생님, 아니, 어머니…. 우리 또 올게요. 그때까지 오래 사세요.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면서 한 다 푸셔야 해요."

집 밖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 송씨와 가족들이 멀리 할머니의 집 창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송씨는 "당시 광주 사람들은 민주화의 뿌리다. 그런 그들이 있었기에 이렇게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는 것인데 힘들고 외롭게 사시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며 "이영자 할머니 같은 분들을 국가에서 제대로 보상해주고, 정신적 고통을 보듬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는 아내 박정숙씨는 "80년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때 간첩이 투입돼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켰다고 배웠다. 그런데 몇년 뒤 광주에서 전학 온 친구가 이야기해줘서 실상을 알았다"고 말했다.

이어 "여전히 간첩 소행이라고 속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느냐"며 "그런 사람들이 어르신들에게 두 번의 정신적 고통을 주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송씨의 두 딸은 감회가 남달랐다고 했다.

큰딸 송나은씨는 "영화 택시 운전사와 화려한 휴가를 감명 깊게 봤는데 오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으니 얼마나 힘드셨을지 더 가깝게 체감이 된다"며 "개인이 아닌 국가가 외롭지 않게 챙겨드리면 좋겠다. 이제 하루라도 편히 주무실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영자 할머니는 1980년 당시 36세 주부로 항쟁 마지막 날인 5월27일 "전두환과 노태우가 정권을 잡으려고 무고한 시민을 죽이고 있다"며 5·18의 실상을 알리다가 간첩으로 몰렸다.

그는 광주경찰서 113 수사본부와 31사단 등에서 숱한 고문을 당한 뒤 2개월여 뒤에야 '내란음모 선동죄' 혐의를 벗고 출소했다.

그러나 출소 후 후유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됐고 빨갱이 딱지를 뗄 수 없었다. 간첩 혐의로 감방에 있었다고 하니 사람들의 시선도 싸늘했다. 당시 7살이었던 딸도 시댁에 빼앗겨 40년 넘게 만날 수 없었다.

이영자 할머니는 1990년 국가로부터 겨우 40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현재는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돼 생계비 50만원과 기초연금 등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할머니의 꿈은 5·18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받아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5·18 정신적 손해배상을 향한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다. 1990년대 제정·시행된 법률은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희생'에 대한 '금전적 보상'에 중심을 둬 피해자들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트라우마에 대한 배상은 포함하지 않았다.

또 법에 의해 한번 보상금을 받으면 재판상 화해 효력이 생기는 것으로 간주하도록 해 추후 국가를 상대로 추가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낼 수 없도록 했다.

지난해 5월27일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기존 5·18보상법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피해자들은 3개월째 특별 입법을 통해 트라우마에 대한 추가적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소송을 준비 중이다.


breat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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