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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봉 맞고 피투성이 된 다음 날 입덧…내 탓 같아 미안해"

[5·18 정신적 손해배상⑫] 계엄군에 폭행당한 임신부 김영애씨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이수민 기자 | 2022-02-12 10:00 송고
편집자주 '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지난 11일 오후 5시 광주 남구 한 아파트에서 만난 김영애씨(71·여). 김씨는 1980년 5월 계엄군에게 곤봉으로 구타 당했다. 당시 그는 임신부였다. 2022.2.12/뉴스1
지난 11일 오후 5시 광주 남구 한 아파트에서 만난 김영애씨(71·여). 김씨는 1980년 5월 계엄군에게 곤봉으로 구타 당했다. 당시 그는 임신부였다. 2022.2.12/뉴스1

"곤봉 맞고 피투성이 된 다음 날 입덧을 했어, 배 속에 애가 있었던 거여. 안 떨어진 게 신기하제. 막내딸이 넘보다 말도 잘못하고 셈도 잘 틀린디 평생 내 탓이란 죄책감으로 키웠어."

딸 얘기부터 꺼냈다. 잊지 못할 그 날의 악몽. 42년 시간을 함께해 온 막내딸을 보며 그는 평생을 자책하고 있었다.

지난 11일 오후 5시 광주 남구 한 아파트에서 만난 김영애씨(71·여)와 정공수씨(75) 부부. 다리를 저는 아내 대신 남편인 정씨가 현관까지 나와 취재진을 맞았다.

평소 낮에는 아내 혼자 집에 있지만 손님이 온다고 해 남편 정씨가 출근을 미루고 함께 기자를 기다렸다고 했다.

"혹시나 남성분들만 올까 싶어서. '그날' 이후로 젊은 남자들만 보믄 이 사람이 힘들어항께…. 그래도 여자분이 계싱께 좀 안심이구마."

방바닥에 앉아 여기자를 본 김씨가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기자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아이고, 오는데 추웠지? 똑똑해 보이고 이뻐서…. 우리 막내도 이라고 어렸을 때가 있었는디. 평생을 밉게, 못되게 굴었지만 애기를 보니까 막내 생각이 나네."

애써 눈물을 참는 듯 먹먹한 얼굴, 김씨의 코끝이 빨개졌다. 그가 42년 전 '그날'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1980년 5월 부부는 남구 월산동의 한 골목 집에서 7살, 5살 두 딸과 함께 오손도손 가정을 꾸리며 살았다. 남편인 정씨는 목공소 일을 하고 서른 살 김씨는 집안일을 했다.

"그때는, 난 집에서 남편 밥만 해주고 산께 뭘 몰랐지. 무서운지도 몰르고…."

19일 오후 3시 김씨는 장을 보기 위해 아랫집에 살던 아줌마와 동구 대인동에 있는 대인시장으로 향했다.

군인들이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때리고 잡아간다는 흉흉한 소문이 있었지만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걱정은 없었다. '몸빼바지'를 입고 보따리를 들었다.

시내에 도착하니 헬기가 하늘을 날며 큰 스피커로 "시민 여러분 자중하고 집으로 돌아가세요"라는 선무 방송을 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젊은 청년들이 가득했다.

"김대중을 석방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청년들은 어깨동무를 한 채 구호를 외쳤다. 상인들도 시장 입구에서 "석방하라, 석방하라, 석방하라!" 구호를 연호했다.

군인들은 시위대를 주시했다. 청년들은 그 앞에서 '독재 타도'가 적힌 현수막을 펼쳤다. 김씨는 처음 보는 시위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랫집 아줌마도 시위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고 했다. 그가 무섭다며 '집에 가자'고 김씨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김씨는 이상하게도 시위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우두커니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갑자기 '펑, 펑' 소리와 함께 거리에 최루탄이 쏟아졌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 사이 아랫집 아줌마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지만 보이지 않았다.

군인들이 곤봉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김씨는 사람들이 도망치는 방향으로 함께 뛰었다. 다급하게 달리다 넘어졌다. 끝없이 밀려드는 인파에 일어나 달리지 못했다.

그때 험상궂은 인상의 군인 한 명이 김씨의 머리를 곤봉으로 내리쳤다. 김씨는 '악'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뺨 위로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옆에 있던 한 시민이 군인을 밀치고 김씨를 일으켜 손을 잡고 달렸다. 정신없이 그에게 끌려 한 병원에 도착했다. 김씨는 병원 앞에서 기절했다.

"아줌마, 정신 좀 차려요. 이름하고 주소 좀 불러 보세요."

눈을 떠보니 병원 침대 위였다. 피가 얼마나 났는지 몸이 차가웠다가 뜨거웠다가 오락가락했다.

"간호사가 신상 정보를 대라는디 머리가 어떻게 된 것마냥 이름도, 주소도 떠오르지 않더라고. 손으로 머리를 만져봉께 모자 쓴 것맨치로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어.“

장 보려던 돈을 전부 병원비로 냈다. 몇 시간을 누워 있다가 정신이 들어 가까스로 병원 밖으로 나왔다. 붕대를 칭칭 감은 김씨의 모습을 본 한 택시기사가 동네까지 그를 태워줬다.

집 앞에는 동네 아줌마들이 몰려 있었다. 아랫집 아줌마도 그 틈에 있었다. 자신은 무서워서 진작 빠져나왔다며 김씨를 걱정했다.

"집에서 거울을 봉께 앞니는 반쯤 깨져 있고 허리는 온통 시퍼렇드라고. 혼날까 봐 남편한테는 말도 못 했지."

김씨는 새벽에 몰래 화장실로 가 머리에 두른 붕대를 풀었다. 꿰맨 틈으로 피가 새고 있었다. 검붉게 피로 물든 옷을 울면서 빨았다.

지난 11일 오후 5시 광주 남구 한 아파트에서 만난 정공수씨(75). 정씨의 아내인 김영애씨는 1980년 5월 당시 임신한 상태에서 계엄군에게 곤봉으로 구타 당했다. 2022.2.12/뉴스1
지난 11일 오후 5시 광주 남구 한 아파트에서 만난 정공수씨(75). 정씨의 아내인 김영애씨는 1980년 5월 당시 임신한 상태에서 계엄군에게 곤봉으로 구타 당했다. 2022.2.12/뉴스1

다음 날 아침 남편이 깜짝 놀라 김씨를 깨웠다. "자기 뭔 일이당가, 어제 뭣했어?"

아침에 눈을 떠 화장실 세숫대야를 보는데 핏물이 잔뜩 묻어 있어 놀랐다고 했다. 남편은 아내가 시내에서 다친 건 알았지만 시위대에 얽혔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했다.

김씨는 전날 있었던 일을 남편에게 설명했다. 남편 정씨는 함께 있어 주지 못한 마음에 미안해했다. 붕대를 풀어보니 머리에 난 꿰맨 자국이 12바늘이었다.

"우웁, 욱! 욱!"

그때 김씨가 헛구역질을 했다. 처음엔 전날 머리를 다친 상처 때문에 '멀미'를 하는 것일까 생각했다. 그러나 멀미와는 달랐다. 첫애와 둘째를 가졌을 때처럼 아랫배도 묵직했다.

며칠 뒤 예정된 월경일엔 소식이 없었다. 그제야 김씨는 자신이 임신 상태였다는 걸 알았다.

"병원을 찾아갔는데 다행히 애 건강에는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고. 근디 막내딸을 낳고 봉께 하나둘 문제가 생겼제. 뭔가 큰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닌디 늘 넘들보다 한나씩 모지랬제.“

막내는 어릴 때부터 또래보다 키가 한참 작았다. 42살이 된 지금도 멀리서 보면 중학생으로 보일 만큼 작다고 했다.

말도, 셈도 많이 느렸다. 가끔은 어린 애처럼 고집을 부려 달래기도 힘들었다. 기술이라도 배우라고 여상에 보냈지만 거기서도 배움이 느렸다. 현재는 마사지 숍을 운영하고 있는데 돈 계산을 못해 손님들이 답답해 직접 계산을 할 정도라고 했다.

"미안허지, 그냥 미안헌 거여. 내가 엎어지고 처맞고 했응께 그 부작용으로 애가 바보된 거지. 근데 나도 정신병이 생겨서 무뚝뚝해지고 애들한테 난폭하게 굴었어…."

김씨는 아이들을 키우며 엄마로서 제 역할을 못 했다고 했다. 아이들이 말을 걸면 귀찮아했고 만사에 정신이 예민해져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갑자기 벽을 보고 말을 하거나 이유 없이 우는 날도 많았다.

낮에는 두려워 집에만 있었고 저녁엔 잠을 못 자 눈이 퀭해졌다. 자다가도 갑자기 욕을 하고 옆에 누운 남편에게 악을 쓰고 달려들었다.

가장 큰 트라우마는 젊은 남자들을 보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남성들만 보면 계엄군으로 오해해 몸이 덜덜 떨렸다.

하루는 TV 속 전쟁 영화를 보던 김씨가 화면에 대고 무릎 꿇고 '살려 달라'며 빌었다. 그날은 악몽이 다른 어느 날보다도 심했다.

"꿈만 꾸믄 누가 잡으러 와. 잠이 들면 벼락같이 악을 쓰고 그래. 꿈에서 마귀같이 나쁜 군인들이 나를 몽둥이 들고 쫓아 와. 그 XX 놈들을 죽여야지 내가 살아."

마흔쯤 되자 허리에서 두둑 소리가 나 병원을 찾았다. 협착증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해야 했다. 치아도 그쯤 흔들거리더니 어느새 다 빠졌다.

남들보다 젊은 나이에 '할머니' 마냥 성한 곳 없는 몸을 가지게 된 김씨의 정신착란은 더욱 심해졌다.

남편 정씨는 아내를 전남 나주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기도 했다. 1~2년간 입원과 퇴원을 수십차례 반복했다. 하지만 그곳에 계속 아내를 둘 순 없었다.

"하루는 면회를 갔는디, 사람이 바보가 된 거여. 흐리멍텅해가꼬 나를 못 알아보드랑께. 목숨만 붙어있는 나무통같이. 사람을 여기다 두믄 안 되겄다 싶어 델꼬 나왔제."

정씨는 그날 이후로 아내를 보살피는 데에 모든 시간을 다 썼다. 돈을 번다는 '핑계'로 아내가 가장 힘들었던 그날 함께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됐다고 했다.

김씨는 1990년 국가에서 5·18 보상금을 주겠다고 할 때도 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다. '혹시나' 나섰다가 간첩이나 폭도로 몰릴까 무서웠다.

그러나 가정 형편상 병원 치료를 받으려면 나설 수밖에 없었다. 1998년, 남들보다 한참 늦게 유공자 신청을 했다. 그날 김씨와 시장에 함께 갔던 아랫집 아줌마와 동네 사람들 일곱이 함께 증인석에 섰다.

처음 '기타 1급'으로 등록돼 1200만원을 받았다. 치료비로 턱없이 부족했다. 다른 유공자와 달리 '구금' 기록이 없어 보상금이 적었다.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데 장애등급은 인정받지 못했다.

"우리 부부가 강진 옴천면서 중매로 결혼했는디, 배움이 짧아 조서를 잘 못 적어 보상금이 적다냐 싶었지. 아무 이유 없이 다쳤는데 보상 못 받는 것도 억울했고."

변호사를 사 행정소송을 냈다. 12년간의 소송 끝에 2010년에야 장애 12급으로 상향됐다. 3500만원의 보상금을 뒤늦게 받았지만 변호사비와 빚을 갚고 나니 남는 건 없었다.

"남은 거 없어도 그래도 기뻐. 우리 아내가 잘못 없이 다친 거, 그거 사람들이 인정해준 거니까. 내가 계속 (소송)하자고 했었거든."

정씨의 전화기가 계속 울려댔다. 더는 출근을 미룰 수 없어 가야 한다고 했다. 정씨는 매일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12시간 경비 일을 하고 있다.

정씨는 "주위에서 이제는 나이가 많아 일을 그만두라고도 하는데 아내와 함께 제대로 된 생활을 하려면, 해준 것도 없는 자녀들에게 손 벌리지 않으려면 계속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부는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받게 되면 온전히 함께 시간을 보내며 여유롭게 지내고 싶다고 했다. 80년 그날도 일을 나가 함께 있어 주지 못했고, 지금도 일하러 가야해 정신이 아픈 아내를 혼자 둬야 하기 때문이다. 부부는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김씨가 말했다.
"내가 미안해, 거길 왜 갔디야. 나는 반성혀. 거기 나간 것이 잘못이여, 나간 것이. 군인 아들도 잘못인데, 나온 것이 잘못이제."

정씨가 손사래를 쳤다.
"아녀. 짝꿍 하나 못 지킨 내가 잘못이지. 이제는 좀 우리 안사람이랑 한 시도 안 떨어지고 지켜주믄서 살고 싶어."


breat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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