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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일 듯 날 팼던 박 중사에게 "사과해야 하지 않겠냐" 물었더니

[5·18 정신적 손해배상⑪] 형무반장 인우보증 받은 박판석씨
"당시 군인도 또 다른 피해자…진실 밝히고 용서받아야"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이수민 기자 | 2022-02-05 10:00 송고
편집자주 '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4일 오후 광주 남구 한 주택에서 만난 박판석씨(66)가 1980년 5월의 기억을 떠올리며 울부짖고 있다. 박씨는 5·18 당시 상무대 영창 형무반장이었던 박춘배 중사로부터 인우보증을 받아 1991년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2022.2.5/뉴스1 이수민 기자
4일 오후 광주 남구 한 주택에서 만난 박판석씨(66)가 1980년 5월의 기억을 떠올리며 울부짖고 있다. 박씨는 5·18 당시 상무대 영창 형무반장이었던 박춘배 중사로부터 인우보증을 받아 1991년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2022.2.5/뉴스1 이수민 기자

"육군 중사가 '인우보증'을 서 준 분이에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지난달 11일 광주에서 발생한 현대산업개발 아파트 신축 공사 붕괴 사고로 3주 넘게 현장 취재를 하면서 5·18 정신적 손해배상 연재 기사를 미룬 터였다.
4일 오후 5·18구속부상자회 관계자로부터 피해자를 소개받고 차를 몰아 광주 남구 한 다세대 주택으로 향했다.

다세대 주택 4층, 벨을 누르자 박판석씨(66)가 문을 열었다. 방 3개짜리 집안 내부는 넓고 깔끔했다. 그동안 반지하와 단칸방 등에 살던 다른 5·18 유공자와는 사정이 달라 보였다.

"우리 집이 꽤 넓죠?" 기자의 시선을 의식한 듯 그가 먼저 머쓱하게 말을 꺼냈다.

"4남매와 아내를 포함해 여섯 식구가 살아요. 그렇게 보면 넓은 편도 아니죠. 지금 월세 열달을 밀려서 보증금이 거의 날아갔어요, 허허. 집주인이 사정을 알고 안 쫓아내서 고맙죠."
거실 한 가운데 놓인 소파는 군데군데 헤졌고 냉장고 겉면은 누렇게 바래 있었다. 벽면에는 5·18 민주유공자 증서가 액자에 걸려 있었다. 박씨와 소파 앞에 마주 앉았다.

"10여년 만에 그 사람을 만났어요…. '나한테 사과해야 하지 않겠냐' 물었더니 '예'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라고요. 그때 가슴 안에서 뭔가 뜨거운 게 올라오는 것 같았어요."

박씨는 '그 사람'을 만난 얘기부터 꺼냈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를 물었다.

1980년, 박씨는 군대를 제대한 지 10개월 남짓 된 스물여섯살의 평범한 청년이었다. 금남로에서 친형이 운영하던 중장비 임대일을 도왔다.

박씨는 당시 일을 하면서 광주에서 '데모'하기로 유명했던 '운동권' 선배들과 곧잘 어울렸다. 최운용, 오치갑, 강필원, 신용길 등이 그들이었다.

군 복무 시절 알게 된 고참들을 통해 전역 후 김대중의 사조직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에 가입했는데, 그 인연으로 광주의 운동권 선배들과 만나게 됐다.

아버지는 '데모는 무슨 데모냐' '운동권과 어울리지 말아라. 위험하다'며 아들을 만류했지만 박씨의 관심사는 늘 그쪽을 향해 있었다.

"당시에는 유신 종말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컸던 때죠.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관심사였어요."

그해 5월18일 오후 3시쯤, 한 선배가 허겁지겁 땀을 흘리며 달려왔다.

"신, 신용길 선배가 대검에 찔렸어…. 군인 놈들이야!"

박씨는 대인동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앞 한 병원으로 달려갔다. 당시 공용터미널은 지금의 롯데백화점 광주점 자리에 있었다.

병원에 도착해 보니 신 선배가 피를 잔뜩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선배들은 군인들이 젊은 사람을 폭행하고 무고한 학생들을 잡아갔다고 설명했다.

박씨는 그 길로 선배들과 함께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5월19일과 20일 이틀 내내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쫓고 쫓기며 시위를 벌였어요. 시위대와 계엄군의 기세가 비등비등했는데, 20일 오후 2시쯤부터는 시민들이 밀리기 시작했죠."

시민들은 전남도청에서 금남로 4가 근처 원각사 앞까지 밀렸다. 지금의 금남로 광주은행 사거리다.

바로 눈앞까지 몽둥이를 든 군인들이 들이닥쳤고 박씨는 황급히 뒤를 돌아 도망쳤다. 그 순간 '퍽'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박씨의 고개가 꺾였다. 이후 기억이 끊겼다.

정신을 차려보니 상무대 영창이었다. 옆에 있던 한 남성이 "당신이나 나나 이제 끝났다"며 허탈한 목소리로 그를 깨웠다. 뒤통수가 얼얼해 만져보니 큰 혹이 나 있었다.

5·18피해자 박판석씨가 자신의 머리에 난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2022.2.5/뉴스1 이수민 기자
5·18피해자 박판석씨가 자신의 머리에 난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2022.2.5/뉴스1 이수민 기자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됐다. 박씨는 영창에서 매일 폭행을 당했다. 이유도 알지 못했다.

"영창 형무반장, 교도소장인데, 그 사람이 박춘배 중사예요. 그 이름은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박 중사, 박 중사 그놈이…."

40년 전 상황을 담담히 얘기하던 박씨가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말을 멈췄다. 호흡이 가빠지는가 싶더니 가슴을 붙잡고 '윽' '윽' 소리를 내며 숨 막혀 했다.

"박, 박춘배…. 박 중사가 나를 죽이려고 패고…."

박씨는 한동안 꺽꺽대며 울었다. 한참을 울부짖던 그의 호흡이 점차 잦아들었다. 기자가 휴지로 눈물을 닦아주자 그는 "미안하다"며 말을 이었다.

"40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회복이 안 되네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505보안부대에서 이야기예요."

박씨는 영창에서 폭행을 당하고 나면 서구 화정동에 있던 505보안부대 지하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군인들은 끈질기게 "김대중과 무슨 사이냐" "연청에는 왜 가입했느냐" "사주한 사람의 이름을 대라"고 협박했다.

박씨는 "모른다"고 했다. 지독한 고문이 이어졌지만 박씨는 끝끝내 모른다고 했다. '피떡'이 되고 나면 상무대 영창으로 되돌려 보냈다. 며칠 뒤 박씨는 다시 505보안부대로 끌려와 같은 질문과 고문을 받았다.

"무리 중엔 나 혼자 잡혔으니 스스로 책임을 져야 했죠. 이름을 대면 동지들도 이 고통을 겪을 것 아니겠어요, 모른다고 하고 종일 매만 맞았죠."

동료들의 이름을 대지 않으니 군인들은 계속해서 몽둥이질했다. 의자를 발로 차 뒤로 넘기고 아무 데나 밟았다.

505보안부대에서 모두 7차례에 걸친 고문을 받으며 박씨의 몸과 마음은 엉망이 됐다.

놓아 버리고 싶은 마지막 정신의 끈을 겨우 붙잡고 있을 무렵 한 군인이 "이놈 말을 안 하는 걸 보니 잘못 잡아 온 것 같아, 이름만 똑같은 다른 놈 아니야?"라고 동료에게 이야기했다.

다른 군인도 박씨의 얼굴을 보며 갸우뚱했다.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지나가던 놈인가 봐."

군인들은 상부에 보고했고 박씨는 43일간의 구금 끝에 풀려났다.

출소 후 사회로 돌아왔지만 생활은 예전 같지 않았다.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시내 곳곳에 5·18의 흔적이 있어 길을 지나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원각사 앞이나 상무대 영창, 505보안부대 앞을 지날 때면 그곳을 바라보는 것만도 힘들어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5년쯤 지나자 자녀들과도 사이가 멀어졌다. 그가 악몽에 시달리며 느닷없이 고래고래 악을 쓰고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본 아이들은 어린 마음에 아빠를 무서워했다.

1990년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시행되면서 국가가 5·18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박씨는 구금된 기록은 있지만 심각한 후유증을 입증할 '다친 기록'은 없어 '증인'이 필요했다. 이른바 '인우보증'이다. 인우보증은 주위 사람이 어떤 사실을 서류로 증인을 서주거나 확인해 주는 것을 말한다.

박씨는 자신을 지독하게 괴롭혔던 상무대 영창 형무반장 박춘배 중사를 떠올렸다. 1991년 수소문 끝에 그의 소식을 알게 됐다. 전남 목포의 헌병대에 파견돼 있었다.

직접 목포에 찾아가 그의 앞에 섰다. 박 중사는 박씨를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 당신 미워하지 않아, 당신 나 기억해?"

자연스럽게 반말이 튀어나왔다. 알고 보니 나이도 같았다. 박 중사는 고개를 떨구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용서를 빌었다.

"죄송합니다, 어떤 힘이 있었겠습니까. 위에서 하라고 하니 그대로 한 것뿐입니다. 죄송합니다."

박씨는 10여년 전 자신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던 박 중사가 존댓말을 쓰며 사과하는 모습에 가슴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쾌감을 느꼈다고 했다. 지난 울분이 누그러졌다.

"박 중사를 비롯해 하급 군인들은 당연히 용서해야 하는 거예요. 헌병 중사 힘없거든요, 명령을 따르는 것이 군인이고요. 나도 군 생활을 했으니 이해해요. 명령어기면 지가 영창 가잖아요. 용서 못할 자는 따로 있는데, 이제 죽었으니 평생 용서할 수 없죠."

박 중사는 직접 박씨의 인우보증을 서줬다. 그는 국가로부터 68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돈은 고스란히 치료비 때문에 생긴 빚을 갚는 데에 썼다.

그 후로 박 중사의 소식은 끊겼다. 항간에 죽었다는 말이 들려왔다. 5·18 동지 중 한 명은 '악랄한 놈인데 잘 죽었다'고 했다. 박판석씨는 "죽은 사람이니 그러지 마, 죽기 전까지 죄를 뉘우쳤을 거야"라며 그를 만류했다.

박판석씨는 국가로부터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받으면 가족들과 함께 살 '전셋집'을 마련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 집주인은 사람이 좋아 오래 살고 있지만 수년간 이사를 20번도 넘게 했어요. 자가는 아니더라도 매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을 갖는 게 소원이에요."

또 당시 군인에 대한 트라우마 치료가 필요하다는 말도 했다. 박씨는 "군인들도 광주 시민들이 무고한 줄 알면서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들에 대한 트라우마 치료가 시급하다"고 했다.

"가해자나 피해자나 트라우마는 다 있어요. 그 사람들 욕하고 싶지 않아요. 당시 군인 여러분 훈장과 표창이 무슨 소용입니까, 반납해주세요. 그리고 진실을 고백해주세요. 그럼 우린 당신들을 용서할 겁니다."


breat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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