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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되지 않는 상흔"…41년 간 48명 '극단적 선택'

[5·18 정신적 손해배상⑧] '자살의 계보학'
90년대 '집단행동적' 자살→2세대 등에 트라우마 확대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이수민 기자 | 2021-12-25 10:00 송고 | 2021-12-25 15:31 최종수정
편집자주 '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1980년 5.18 당시 옛 전남도청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 News1DB
1980년 5.18 당시 옛 전남도청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 News1DB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요. 이 고통은 죽어야만 끝납니다."(김공휴씨)
"오로지 통증에 시달리다 결국은 내가 지고 떠나감이다."(고 이광영씨 유서)

80년 5월 전남도청을 지킨 기동타격대원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앞장서 온 5·18구속부상자회 전 부회장 김공휴씨(61)는 '조용히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된 채 평생을 후유증에 시달려 온 이광영씨는 5·18 광주학살 최고 책임자인 전두환이 사망한 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41년 전 한반도 서남권의 중심도시 광주에서 발생한 한국 현대사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5·18민주화운동 이후 피해자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진행된 국가폭력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 고문과 학대, 구금, 감시가 계속되며 피해자들은 심각한 신체적·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고통을 견디기 위해 알코올에 의존하거나, 트라우마로 대인관계는 실패하고 실직해 경제적으로 빈곤해지며 가정이 파탄 나는 경우도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이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도 많았다.

5·18을 직접 목격하고 살아남은 '광의의 피해자'들도 커다란 죄책감과 정신적 상흔을 안고 살아야 했다.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5·18에 대한 왜곡과 폄훼가 조직적으로 진행되면서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호소하기도 했다.

5·18과 관련한 자살 사례는 정확하지 않다. 김명희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가 지난해 발표한 '5·18 자살의 계보학-치유되지 않은 5월' 연구 자료를 보면 80년 이후 지난해 2월까지 확인된 5·18 참가자 자살자 수는 46명으로 집계된다.

정수만 5·18민주유공자유족회 전 회장이 제공한 실명 자료와 2000~2010년대 언론보도 등을 수집·대조·종합해 파악한 수치다.

이후 지난해 9월과 올해 11월 각각 1명의 자살자가 발생해 지난 41년간 최소 48명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기록되지 않은 자살자를 비롯해 관련 단체와 교류가 없거나 단체에 파악되지 않는 5·18 참가자가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수치보다 훨씬 더 많은 자살자가 있을 것으로 5월 단체는 보고 있다.

5·18과 관련한 자살은 '숙명적 자살'과 '저항적 자살'로 나눌 수 있다.

김 교수 자료를 보면 연도별로는 1980년대 25명이 자살한 데 이어 1990년대 4명, 2000년대 12명, 2010년대 4명, 2020년대 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5·18 직후 10년간인 1980년대에 가장 높은 자살자가 발생했다. 이때는 계엄군의 무차별 구타와 진압에 의해 부상이나 총상을 입은 후 정신질환을 앓거나 육체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에 이르는 '숙명적 자살'이 상당수다.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저항적 형태의 자살도 이 기간에 나온다. 이른바 '열사'들의 자살이다. 80년 5월을 직접 목격한 목격자이자 생존자였던 김의기, 김태훈, 홍기일, 표정두 열사 등은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집단행동으로 분신이나 투신을 선택했다.

자살률은 1990년대에는 하락 추세를 보이지만 2000년대에 이르면 2004년 한해에만 7명이 자살하는 등 빈도가 높아진다.

김 교수는 2000년대 자살자의 유서에는 1980년대 경험했던 신군부의 폭력에 대한 공포와 수치심, 절망과 비관, 가족에 대한 죄책감 등이 드러난다고 분석했다.

2000년대 5·18 피해자의 연쇄 자살은 90년대 산재보상을 적용한 정부의 호프만식 보상 정책이 한 원인으로 분석된다.

1990년 7월 당시 여당이던 민주자유당은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피해자 등급에 따른 정부의 차별화된 보상은 유족과 부상자, 구속자를 중심으로 형성됐던 5·18 저항공동체 내부에 균열을 가져왔다. 공식 인정을 받은 부류와 그렇지 않은 부류, 유공자 등급 등에 따라 비관하며 자살하기도 했다.  

또 법안이 여러 차례 보상금을 나누어 지급하면서 그릇된 이미지를 형성했다.

5·18 피해자 단체들이 수차례에 걸쳐 지급된 보상금으로 이미 정부로부터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피해자들에 대한 동정은 사라져갔다.

더 이상의 권리 주장은 이기적 탐욕으로, 집단의 편협한 이기심의 발로로 간주됐다.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친 일시적 보상은 실질적 보상의 효력도 갖지 못했다. 오히려 보상금을 둘러싼 가족 내부의 갈등이나 보상 사기, 사업 실패 등으로 경제적 위기와 스트레스를 가중시켰다. 가족관계 단절과 훼손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면서 자살 피해자의 대부분은 실패자, 영구적 빈곤자로 전락했다.

김명희 교수는 "광주의 과거 청산 국면에서 발생한 자살 피해는 켜켜이 누적된 국가폭력의 트라우마와 경제적 강제의 압력, 사회적 지지의 축소로 인한 관계의 위기가 중첩돼 발생한 숙명론적 자살의 한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40년간 직접 당사자에 불과했던 5·18 정신적 트라우마 피해자가 점점 더욱 큰 규모의 '사회'로 확대되고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김 교수는 "가족의 피해를 고스란히 간접 경험한 세대와 외상적 사건을 목격하고 생존 죄책감을 느끼는 '목격자', 광주라는 지역 특성으로 차별과 편견을 경험하는 지역민들로 트라우마가 전승되고 있다"며 "당시 고통을 치유받지 못한 당사자들에 대한 구체적 대책을 비롯해 국가범죄로 하여금 발발된 정신적 트라우마를 사회적 자원에서 청산하려는 기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breat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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