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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지킨 기동타격대원의 '악몽'…"5·18은 죽어야만 끝날 고통"

[5·18 정신적 손해배상⑦] 김공휴 전 구속부상자회 부회장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이수민 기자 | 2021-12-18 10:00 송고
편집자주 '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17일 오후 광주 서구 화정동의 한 단칸방에서 만난 김공휴 전 5·18구속부상자회 부회장의 모습. 김씨가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2021.12.18/뉴스1
17일 오후 광주 서구 화정동의 한 단칸방에서 만난 김공휴 전 5·18구속부상자회 부회장의 모습. 김씨가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2021.12.18/뉴스1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요, 조용히 죽을 수 있는 방법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 인생을 찢어버리고 싶다니까요."

그 누구보다 트라우마 치유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그다. 5·18구속부상자회 전 부회장 김공휴씨(61). 5·18이나 국가공권력에 의해 피해 입은 이들이 도움받기를 바라며 트라우마센터 건립에 앞장서 온 주인공이다.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야 치유가 가능하다며 피해자들의 집단상담을 주도했다. 그런 그가 "죽고 싶다"고 했다.

17일 오후 광주 서구 화정동의 한 단칸방에서 만난 김씨. 취재진이 과거 인터뷰 기사를 보여주자 한참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김씨는 2013년 광주 트라우마센터 설립 후 동료들과 1기로 심리치료를 받았다. 당시 언론과 인터뷰에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고 밝혔다.

"그때 인터뷰한 건 다 거짓말이에요. 어떻게 마음이 편해지겠어요. 순간 좀 나아질 뿐이지. 고통은 잊힐 수가 없는데. 이 고통은 죽어야만 끝납니다."

'죽어야 끝나는 고통'은 41년 전 역사의 회오리에 휘말리면서 시작됐다. 1980년 5월, 김씨는 나전칠기공으로 일하며 월산동에서 친구 박모씨와 자취를 했다.

5월18일, 일요일이었다. 쉬는 날, 박씨와 술 한잔하려고 시내로 나갔다. 금남로 수창국민학교(초등학교) 앞을 지나는 길, 시민과 계엄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시민들 사이에 섞여 대치상황을 구경했다.  

그때 갑자기 군인들이 김씨와 친구의 멱살을 잡아챘다. 워커 발로 차고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폭행했다.

"얼마나 맞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들이 '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도 안 하고, 이 빨갱이 XX들'이라고 하더라고요. 학생이 아니라고, 살려달라고 몇 번을 울고 애원했는데도 구타는 계속됐어요. 그러다 군인들이 잠시 한눈판 사이에 도망쳤죠."

군중들 틈에 끼어 골목으로 뛰었다. 숨을 곳이 없었다. 그때 한 아주머니가 대문을 열고 "학생 이리 들어와"라며 김씨와 친구 박씨의 몸을 숨겨줬다.

늦은 오후까지 그 집에 숨어있다가 해가 지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보니 온몸은 욱신거렸고 머리와 얼굴에는 보라색 피멍이 잔뜩 들었다.

김씨는 "내가 왜 군인에게 맞아야 했는지 납득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5월21일, 바깥 상황이 궁금해 금남로로 나갔다. 시내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김씨는 광주YMCA 앞에서 상황을 지켜봤다. 군인들은 전남도청을 막고 있었고 시민들은 "전두환 정권 물러가라"며 시위를 하고 있었다.

태극기를 든 시민 한 명을 태운 장갑차가 도청 쪽으로 돌진했다. '타앙! 탕, 탕!' 먼 곳에서 총소리가 났다.

장갑차가 되돌아왔을 때 그 시민은 뒤로 고꾸라져 있었다. 차량은 피로 물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한쪽 얼굴이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무차별적 폭행에 대한 분노와 자괴감이 들었다. 김씨는 시민군에 합류했다. 평범한 '나전칠기공'이 목숨을 건 '투사'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1980년 5월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했던 김공휴씨의 모습. (김공휴씨 제공) 2021.12.18/뉴스1
1980년 5월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했던 김공휴씨의 모습. (김공휴씨 제공) 2021.12.18/뉴스1

"무기를 들 수밖에 없었죠. 내 목숨과 주변 사람들 목숨을 지켜야 했으니까. 광주를 지켜야 했죠."

김씨는 시내 순찰 업무를 맡았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응원했다. 김씨는 '우리'를 지키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 벅찼다.

5월26일, 계엄군이 진압하러 들어온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항쟁지도부는 기동타격대 대원을 모집했다. 김씨는 기꺼이 지원했다.

27일 새벽, 김씨는 기동타격대 4조에 속해 도청을 지켰다.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계엄군이 진입했다. 그는 총을 들고 몇 번이나 군인들과 마주쳤지만 피하기만 할 뿐 한 번도 쏘지 못했다.

"제가 봤던 사람들은 다 제 또래였어요. 나랑 닮았던 청년들…. 어머니가 제 호적을 좀 늦게 올려서 남들보다 어리게 살았는데, 만일 호적을 제대로 올렸으면 저도 저 중에 끼어있었겠다 싶어서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죠."

도청에 숨어있다가 붙잡혔다. 삐삐선(야전전화선)에 두 손을 묶인 채 버스에 실려 끌려갔다. 상무대 영창이었다. '기동 타격대원'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는 모진 고문을 받았다.

계엄군은 시민군에게 악한 간첩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가짜 혐의를 추가하려고 했다. 김씨에겐 방화, 탈취, 강도, 강간 혐의를 덮어씌우려고 했다.

그는 총기 휴대와 내란 혐의는 어쩔 수 없이 인정했으나 강도와 강간 혐의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야구 방망이로 맞아 몇 번을 쓰러지고 혼절하면서도 가짜 혐의를 인정하지 않자 군인들은 '개미 고문'을 했다.

상무대 울타리에 있던 포플러 나무에 군용 사각팬티만 입힌 채 발을 묶고 뒤로 수갑을 채워 나무에 묶었다. 수사관은 나무 밑에 있는 개미굴을 지휘봉으로 들쑤셨다.

왕개미 수천 마리가 김씨의 코와 귀, 입으로 들어가 스멀스멀 기어 다녔다. 영창 안에 함께 있던 교수나 신부는 만신창이가 돼 돌아오는 김씨에게 어느 정도 시인하라고 했다. 경찰 수사와 검찰 조사가 다를 수 있다고. 도저히 참을 수 없던 김씨는 결국 그들이 요구한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김씨는 광주교도소로 이감됐다가 5개월간의 수감생활을 끝내고 같은 해 10월30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몸을 추스르고 이전에 해왔던 나전칠기 가공 일을 했다. 그러나 몸은 이미 전과 같지 않았다. '특A급'이라는 폭도 누명 때문에 다른 일자리도 구할 수 없었다.

고문과 구타의 후유증으로 젊은 나이에 허리를 제대로 펼 수도 없었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인분과 견분을 먹기도 했다. 결혼을 했으나 온전한 삶을 살지 못했다.

40여 년이 지났지만 김씨의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개미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악몽이 아직까지도 괴롭힌다. 계속되는 악몽과 정신적 트라우마 때문에 짧았던 부부의 연도 끝났다고 했다.

"악몽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깨기 일쑤였어요. 새벽에 눈을 떴는데 아내가 쌕쌕 숨을 쉬며 곤히 잠들어 있더라고요. 사람이 정신적으로 미치니까 이 사람 잘못이 아닌데도 그게 너무 미운 거예요. 서로 예민해서 다투길 반복하다 헤어졌죠."

1990년 정부는 김씨를 비롯한 5·18피해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 김씨는 7000만원을 받았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허리와 관절 등 병원 치료비가 만만치 않았다.

2013년 트라우마센터에서 집단상담을 받으며 '치유'의 꿈을 꿨지만 '편안해짐'은 그때뿐이었다.

2018년 차량에 번개탄 8장을 피우고 누웠다. 그러나 죽음도 쉽지 않았다. 다른 5월 동지들이 그를 발견했다. 고압 산소 치료를 두 번이나 받은 뒤 극적으로 깨어났다. 그는 자살을 선택한 순간보다 '살아난 것이 불행'이라고 말했다.

"나도 나름 힘들게 자살을 선택한 건데, 왜 자살하려는 나를 살린 거냐고, 제발 가만히 두라고 화를 냈죠. 눈뜬 나를 보면서 동지들은 울고불고 다행이라고 하는데 나는 끔찍한 삶이 다시 시작됐다고 느꼈어요."

김씨는 번개탄 가스 중독 후유증으로 2019년 뇌경색 판정을 받았다. 그 이후 신경과 약과 당뇨약, 고혈압약, 근육 이완제, 혈액 종양약 등 하루에도 30알이 넘는 약을 먹고 있다.

김씨의 손발은 약독으로 퉁퉁 부어 있다. 주먹조차 쥐어지지 않는다. 항상 속도 쓰리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수시로 물을 마시고 계속해서 마른 침을 삼켰다.

김씨는 창밖으로 펑펑 내리는 눈과 매서워진 겨울바람에도 외롭지 않다고 했다. 짧은 결혼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보다 혼자가 편하다고 했다.

"정신적 손해배상금이요? 받아서 뭘 해요, 조용히 죽는 데에나 쓰고 싶네. 그런 약 없을까요. 먹으면 한방에 딱 죽는…."

김씨는 취재진이 이전까지 만난 다른 피해자들과는 달랐다. 그는 희망과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인생을 헛살았죠. 피 끓는 청춘에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그곳에 있었는데, 그 무서운 고문을 참았는데! 여전히 우리를 인정하지 못하고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내 정신은 그때 그 개미굴에 머물러 있거든요. 더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저는 불쌍한 놈이에요. 죽는 것도 복이 없어서 자살을 두 번이나 실패했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 길, 배웅을 나온 김씨에게 취재진은 내년 5월이 되면 다시 한번 찾아오겠다고, 그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인사했다.

코끝이 붉어진 김씨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에휴, 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아마 이 세상에 없을 테니…."


breat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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