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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함께했던 '황금동 유흥가 여인들' 찾고 싶어"

[5·18 정신적 손해배상⑥] 간첩으로 몰린 주부 이영자씨
"남자들과 똑같이 고문…경찰이 조서 고쳐줘 간첩 혐의 모면"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이수민 기자 | 2021-12-11 10:00 송고
편집자주 '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10일 오후 광주 남구 한 아파트에서 만난 이영자씨(78)가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고 있다. 이씨는 1980년 5월 당시 평범한 주부로 항쟁 마지막날 5·18의 실상을 알리다가 간첩으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2021.12.11/뉴스1
10일 오후 광주 남구 한 아파트에서 만난 이영자씨(78)가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고 있다. 이씨는 1980년 5월 당시 평범한 주부로 항쟁 마지막날 5·18의 실상을 알리다가 간첩으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2021.12.11/뉴스1

"수사본부에 딱 붙잡혀서 가니 여인네들은 한 20명 정도 되더라고. 가두방송했던 고등학생부터 황금동 술집 여자들, 나까지…. 우리도 남자들이랑 똑같이 맞고 고문당하고 했지."

10일 오후 광주 남구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이영자씨(78). 전용면적 26㎡(약 8평) 단칸방에 양반다리 자세로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41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이씨는 신군부에 의해 ‘간첩’으로 몰렸던 주부다. 그는 4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거의 틀리지 않고 날짜와 시간대별로 그날을 기억해냈다.
3시간가량 진행한 인터뷰 중간중간 그는 주먹으로 자신의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날이 흐리고 추워지니 고문 후유증으로 무릎이 아프다고 했다. 그래도 손님이라고 취재진에게 커피 한 잔 내오겠다며 일어설 때는 벽을 짚으며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냈다.

80년 당시 이씨는 36세의 주부였다. 남편과 성격 차이로 이혼한 뒤 동구 불로동 전남도청 근처에서 친오빠의 식당 일을 도우며 딸을 키우고 있었다.

친오빠에게는 조카가 한 명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두뇌가 명석해 서울대 약대에 진학했다. 조카가 가끔씩 광주에 와 전해주는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이씨는 재미있게 들었다.
그해 2월쯤. 조카가 와서 “나라 돌아가는 꼴이 심상치 않다”고 했다. 박정희 시해 후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풀어 국민들의 입을 막고 대통령이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조카는 “호남은 김대중의 고향이므로 더 계획적으로 죽이려 들 것”이라며 나라가 아무리 시끄러워져도 참견하지 말고 집안에만 꼭 붙어있으라고 신신당부했다.

시간이 흘러 5월이 됐지만 이씨는 조카의 말이 떠올라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나도 가게 일에만 집중했다고 한다. 창밖으로 군인들이 시민에게 총, 칼을 겨누는 모습을 봤을 때도 눈을 질끈 감고 모른 체했다.

5월21일, 금남로 전남도청 앞으로 시민들이 몰려나왔고 버스와 택시까지 줄을 섰다. 이씨도 가게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후 1시 정각이 되자 도청 옥상의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시민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순간 수백 발의 총성이 금남로를 뒤덮었다. 이씨의 눈앞에서 임신한 한 여인이 총에 맞아 고꾸라졌다.

10분 뒤 메가폰으로 '사격 중지 명령'이 내려지자 총소리는 잦아들었다. 시민이 가득했던 거리는 핏물이 흥건했고 부상자들의 신음이 금남로를 울렸다.

군인들이 거리를 걷다가 쓰러진 임산부를 발견했다. 이씨는 '혹시 살려줄까? 병원에 데려다주겠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수부대원은 오른 다리를 번쩍 들어 임산부의 얼굴을 짓이겼다. 가게에서 이 모습을 본 이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물도 안 나와, 그때는….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니까 눈물도 안 나오고 막 시뻘게진 눈으로 이 악물고 있는 거여. 애기들도 다 나와서 산 사람은 하나같이 수습하기 바빴제."

이씨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힘을 모아 계엄군을 몰아내고 '우리들의 광주'를 지키자고 마음먹었다. 곧바로 금남로로 나가 시신을 관에 담는 일을 도왔다.

22일부터 26일까지 총알을 맞아 옷이 다 해진 시신에 새 옷을 입히고 관에 눕혀 이를 상무관으로 옮겼다. 부상자는 병원으로 보냈고 오후에는 병원에 가 헌혈을 했다.

27일 새벽 2시쯤.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전남도청 스피커를 타고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광주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도청을 침범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집 밖으로 나오십쇼. 우리가 전부 다 나오면 계엄군은 우리를 죽이지 못할 것입니다."

이씨는 방송을 듣고 금남로로 나갔다.

"사지가 바들바들 떨리는데 그 방송을 듣고 나갔어. 목소리를 들으니 나보다 앳돼 보이더라고. 쟤는 얼마나 무서울까 싶어서 나간 거지."

새벽 5시쯤 되자 계엄군이 헬기로 '삐라(전단)'을 뿌렸다. 삐라에는 '도청에 있는 폭도들은 나와라. 총을 버리고 나오면 살려주겠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씨는 그 전단을 보고 기가 막혔다고 한다. 일방적으로 공수부대원들이 난동부리고 시민을 제압하는 것을 봤는데 일반 시민을 폭도로 몰아가는 것이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소. 내가 그렇게 사실을 분명하니 봤는데, 내가 그렇게 난동부리는 것을 봤는데! 우리 보고 폭도라고? 눈이 뒤집히지. 잠도 안 오고 화가 나서 밥도 안 먹어져."

오전 8시 이씨는 남구 양림동 학강국민학교 앞 큰길로 나섰다. 50대 여성들이 삼삼오오 모여 밤사이 일을 이야기하며 '오메, 오메'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이씨가 그들 앞에 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이렇게 보고만 있으면 되겠습니까. 우리 여자들은 정치도 모르고 데모도 안하지 않았습니까. 본대로 증언이라도 해줍시다. 폭도가 아니라는 것 증언만 해주면 어떱니까. 우리가 똑똑히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까."

모여 있던 아줌마들 다섯은 '너무 무섭다'며 겁을 내고 도망쳤다. 이씨는 더 많은 사람이 모인 곳으로 찾아가 그동안 조카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시작했다.

"입이 트인 거지, 계엄군이 우리한테 '폭도'라고 하는 그 염병하는 소리를 듣고 눈이 뒤집힌 거야. 그때 입이 완전 트여가지고 조카한테 여태 들었던 말을 내가 다 하고 다녔어."

'전두환과 노태우가 정권을 잡으려고 한다', '이번 사태의 주모자는 군인이고 우리를 다 죽이려고 한다' 등 이야길 하자 금세 이씨 앞에 40~50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10일 오후 광주 남구 한 아파트에서 만난 이영자씨(78)가
10일 오후 광주 남구 한 아파트에서 만난 이영자씨(78)가 "군인들이 갑자기 이리로 와보라더니 간첩이라고 끌고 갔어"라며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고 있다. 이씨는 1980년 5월 당시 평범한 주부로 항쟁 마지막날 5·18의 실상을 알리다가 간첩으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2021.12.11/뉴스1

오후 4시쯤 되자 지프차 한 대가 이씨 앞에 섰다. 헌병 4명이 차에서 내려 "아줌마 이리로 와봐요" 하더니 이씨가 다가가자 팔을 뒤로 젖혀 수갑을 채웠다. "밀고가 들어왔어요, 아줌마 간첩이라고. 차에 타요."

지프차가 향한 곳은 광주경찰서 113 수사본부였다. 113 수사본부, 간첩 잡는 대공 기관이었다. 경찰서 안은 경찰 하나 없이 계엄군만 가득했다.

30명의 계엄군이 가득한 그곳에 이씨가 들어서자 시선이 집중됐다. 한 군인이 고발장을 꺼내 들었다. 종이에는 몇 시간 동안 이씨가 시민들 앞에 했던 말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험상궂게 생긴 군인이 이씨의 머리를 야구 방망이로 두어 대 때렸다. "야 이 X아, 누가 이런 말을 하라고 했어? 너 뒤에 조종하는 사람이 있지? 누가 이딴 소릴 가르쳤어?"

조카한테 들었다고 감히 말을 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이씨는 눈을 꾹 감고 폭행을 견뎠다. 책과 서류들이 몸으로 쏟아졌고야무차별 야구 방망이질이 시작됐다. 이씨는 그대로 쓰러졌다.

정신을 깨고 보니 조그마한 지하실에 있었다고 한다. 40대쯤 돼 보이는 경찰 한 명이 이씨를 깨웠다.

경찰은 수갑을 풀어주며 물을 한 컵 건넸다. 그는 여태껏 계엄군과 작성한 조서, 고발장을 읽더니 "아야. 너 이런 말이 나오디야?"라고 물었다. 맞을까 무서워 대답하지 않았더니 그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이씨를 바라봤다.

"영자야, 나도 너 같은 동생이 둘이 있는 디야…. 지금은 계엄 시기여야. 지금은 재판도 안 하고 죽여 버려. 우리 다 파리 목숨이야. 이번에 살려 줄 테니 조용히 살아라."

그 경찰은 조서와 고발장을 찢고 새롭게 조서 내용을 꾸몄다. 계엄군이 들어와 식당에 장사가 안됐고, 그래서 군인이 싫다는 실없는 소리를 했다가 잡혀 왔다는 내용이었다.

5월28일, 경찰이 고쳐준 조서를 들고 31사단으로 갔다. 끌려온 시민군 남성들과 함께 엮여 자며 바닥에서 3일째 두들겨 맞으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가두방송을 했던 박영순, 전춘심, 차명숙을 비롯해 여성들도 하나둘 보였다. 여성이 10명 이상이 되자 광산경찰서로 옮겨졌다.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한 조아라와 녹두서점 안주인 정현애 등 22명의 여성이 광산경찰서 유치장에 모였다고 했다.

이씨는 이후 7월에 돼서야 '내란음모 선동죄' 혐의를 벗고 출소하게 됐다. 온몸은 만신창이었고 위궤양이 생겨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출소 후 시선도 두려웠다. 빨갱이 소리를 자주 들었고 간첩 혐의로 감방에 있었다고 하니 여자인 자신을 보는 시선도 싸늘해졌다. 당시 7살이었던 딸도 시어머니에게 보냈고 그 후 소식이 끊겼다. 요시찰로 인해 오빠의 식당 일을 돕기도 미안해졌다고 했다.

되새기고 싶지 않을 40년 전 그날의 기억을 증언하던 이씨가 잠시 말을 멈췄다.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나 싶더니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31사단으로 끌려갔을 때 그때 한 스물대여섯쯤 먹었을까. 황금동 유흥가 아가씨들도 5명 정도 들어왔었거든."

그는 눈을 감고 신중히 그때를 다시 한번 기억해냈다.

"걔들 중에 하나가 나이트클럽 아가씨였어. 걔들이 시신에 입힐 옷을 만들어 염을 해서 보냈다가 잡혔다고 하더라고."

41년간 황금동 유흥가 여인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유공자와 부상자 모임 등을 찾아봐도 그들은 없었다.

자신의 조서를 고쳐 준 경찰도 찾고 싶다고 했다. 이씨는 출소하고 난 후 몇 달 뒤. 광주 광주경찰서 113수사본부를 찾아갔다.

“이름도 모르는 경찰이지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려고 찾아갔지만 그 사람을 못 찾았어. 아마 파면된 건 아닌가 싶더라고.”

이씨는 1990년 국가에서 보상금을 준다고 할 때쯤 함께했던 동지들을 찾았다. 하지만 그중 20% 정도는 이미 극단적 선택을 한 뒤였다.

이씨는 1993년 국가로부터 4000만원을 보상금으로 받았다. 무릎이 아프고 정신적 치료가 필요해 그 돈은 고스란히 병원비로 나갔다.

2000년대 들어서는 삶의 의지도 전부 사라졌다고 했다. 오랜 세월 요시찰과 미행을 당하다 보니 누가 자신 옆을 지나기만 해도 미행으로 의심해 흠칫 놀랐다. 생계도 막혀 버렸다.

"도대체 살 의지가 안 생기니까 한번은 자살하려고 했어. 그때도 우리 여성 동지 중 하나가 나한테 전화해서 살렸지. 5·18 이후 여러 가지로 나는 인생이 바뀌었지. 그날 이후로 가족이란 게 없었어, 그나마 여성 동지인 박영순이 전춘심이를 자주 봤고… 전춘심이는 세상을 떴잖아. 이제는 몇 없어. 그때 그 황금동 갸들이라도 보면 참 좋을 텐데 이름이 기억이 안나. 보고 싶지."

이씨는 현재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돼 생계비 50만원과 기초연금 등으로 살아가고 있다. 치료비가 부족해 정신적 치료는 받지 못했고 그날의 기억이 마치 어제처럼 생생히 떠오른다고 했다.

5·18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받으면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고 했다. 당시 고초를 겪었지만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한 무명열사인 황금동 여인들을 찾고 그들과 함께 트라우마 치료를 받고 싶다고 했다.

"유공자 중에는 나보다 어려운 사람 많아, 게다가 이름도 못 올린 황금동 갸들도 있잖아. 보상금을 받으면 내 남은 생 동안에 그 애들을 꼭 찾아서 도와주고 싶어. 지난 세월 이야기도 해보고 싶네…. 나는 그때도 어른이었고 지금도 나이가 많으니 괜찮아."


breat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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