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본문 바로가기 회사정보 바로가기

[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스페인독감과 천재 화가의 죽음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2019-12-05 12:00 송고 | 2019-12-05 20:06 최종수정
 유럽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스페인독감 환자들 모습이다. 위키미디어 제공
 유럽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스페인독감 환자들 모습이다. 위키미디어 제공

'F/W 우리의원 첫 독감 확진 환자'

페이스북 친구인 내과의사가 최근 사진과 함께 올린 문장이다.

독감 시즌이 또다시 돌아왔다. 건강한 사람에게도 독감은 때때로 치명적이다. 하물며 연로한 부모님을 모신 가정에서는 독감은 공포의 대상이다. 해마다 초겨울이 되면 병원이나 동네 의원은 독감예방 접종을 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독감 주사를 맞으면 이틀은 왼쪽 어깨가 뻐근하게 아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독감 주사를 맞는다.
 
2500만명 목숨 앗아간 독감

독감 하면, 우리가 자동 연상하는 것이 '스페인 독감'(Spanish influenza)이다. 두산백과사전에 따르면 스페인독감은 이렇게 기술된다.
 
'1918년에 처음 발생해 2년 동안 전 세계에서 2500만~5000만명의 목숨을 앗아 간 독감을 말한다. 14세기 중기 페스트가 유럽 전역을 휩쓸었을 때보다도 훨씬 많은 사망자가 발생해 지금까지도 인류 최대의 재앙으로 불린다.'
 
첫 번째 독감 환자가 발생한 곳은 프랑스 주둔 미군 병영이었다. 이어 스페인독감은 프랑스에서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 병사들이 본국으로 귀향하면서 스페인독감은 대서양 건너 미국에 상륙했고, 다시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미국 서부까지 확산됐다. 스페인독감은 다시 드넓은 태평양을 건넜다. 지구적 재앙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전염병은 대규모 전쟁이 끝나는 무렵에 창궐하는 경우가 많았다. 스페인독감의 첫 환자가 발생한 것은 1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가던 1918년 늦봄이었다. 주로 고령자들이 독감의 희생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스페인독감이 노약자들 사이에서 잠깐 유행하다 끝나는 것인 줄 알았다.

1813년 10월, 독일 작센주 라이프치히 인근 들판에서 저 유명한 라이프치히 전투가 일어났다. 나폴레옹 연합군과 반(反)나폴레옹 연합군이 맞붙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10월 16일~19일 동안 양측에서 8만~11만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전사자들의 시신은 들판에 그대로 버려져 썩어갔다. 얼마 뒤 라이프치히에 수인성(水因性) 전염병인 장티푸스가 창궐해 라이프치히를 초토화했다.

스페인 독감을 인류 최대의 재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희생자의 규모 때문이다. 2500만~5000만명. 그러나 이 엄청난 숫자는 어떤 페이소스(pathos)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나 인플루엔자 쓰나미가 일본 열도와 한반도에도 들이닥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느낌은 사뭇 달라진다. 한반도에서만 740만명이 감염되어 그중 14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염병은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공간에서 시작된다. 교통수단을 따라 이동하는 게 전염병의 속성이다. 1차 세계대전 중 유럽 주요 도시에는 세계 각처에서 온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고, 또 다양한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도 있었다.
 
에곤 쉴레의 '자화상'
에곤 쉴레의 '자화상'

에곤 쉴레 부부와 태아를 앗아가다
 
합스부르크 천년 제국의 수도 빈(Wien)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에 먹장구름이 드리워졌지만 더 치명적인 것은 1918년 9월에 찾아왔다.

스페인 독감의 2차 파도가 밀어닥친 것이다. 2차 파도는 1차 때와는 확연히 다른 특징이 있었다. 2차 파도는 고령자가 아닌 20~35세의 젊은 층을 강타했다는 사실이다.

스페인 독감이 다시 유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빈 시민들은 긴박하게 대응했다. 결혼한 지 3년 된 화가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화가 에곤 쉴레(1890~1918)와 부인 에디트 쉴레. 에곤 쉴레는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가 총애한 제자였다. 클림트는 일찍이 쉴레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그를 아들처럼 생각해 아낌없이 후원했다. 그런 클림트가 2월 6일,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했다.

그해 여름, 쉴레는 비로소 빈 화단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6월, 49회 분리파 전시회에서 쉴레는 성공의 신호탄을 쏘았다. 상류층으로부터 초상화 의뢰가 들어왔고 그림 값은 하루가 다르게 상승했다. 목돈이 들어오자 쉴레 부부는 답답한 아파트를 떠나 정원과 아틀리에 달린 단독주택으로 이사했다. 잡무 처리를 위해 비서도 고용했다. 쉴레의 성공시대가 열리는 듯했다.

바로 이즈음 2차 파도가 빈을 덮쳤다. 에곤은 아내가 아이를 갖고 있어 독감 바이러스를 피하려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다. 모든 약속을 취소했고, 식료품을 사는 일이 아니면 절대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집안에서도 마스크를 쓴 채 생활했다.  

그러나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다. 에디트가 먼저 스페인 독감에 걸렸다. 의사가 마스크를 쓴 채 왕진해 약을 처방했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에곤은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극진하게 간호했다. 이때 에곤은 어머니에게 짤막한 편지를 쓴다.

에곤 쉴레의 '가족'
에곤 쉴레의 '가족'

'9일 전 에디트가 에스파냐 독감을 앓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임신 6개월인데, 상태는 아주 절망적이며 목숨은 위태롭습니다. 저는 지금 최악의 상태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고통에 겨운 가쁜 호흡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에디트는 10월 27일 눈을 감았다. 남편은 배 속의 아이와 함께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아내의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검정 초크로 아내를 스케치했다. 이것이 에곤의 유작(遺作)이 되었다.    

10월 30일, 이번에는 쉴레가 인풀루엔자에 감염되었다. 쉴레는 장모에게 병간호를 부탁하며 처가로 갔다. 그러나 쉴레는 독감에 걸린 지 하루만인 10월 31일 눈을 감는다. 28년 4개월로 천재 화가의 생애가 끝났다. 스페인독감은 불과 나흘 만에 세 생명을 앗아갔다.

에곤 쉴레의 대표작 중 하나가 '가족'이다. 49회 분리파 전시회에 걸린 작품이다. 어린아이가 있고, 그 뒤에 벌거벗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차례대로 있다. 가족이다. 곧 아빠가 되는 에곤은 아내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기다리며, 곧 태어날 아이를 그림에 그려 넣었다. 그림과 같은 가족을 꾸리고 싶었다.  

에곤 쉴레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세계 미술사가 다시 쓰였을 것이다. 천재 화가는 그렇게 스페인독감에 허무하게 스러졌다.           

사망 직후의 에곤 쉴레
사망 직후의 에곤 쉴레



author@naver.com

이런 일&저런 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