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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임종헌·양승태·유해용…그들만의 '신기루'

(서울=뉴스1) 윤지원 기자 | 2019-03-12 17:41 송고 | 2019-03-15 19:10 최종수정
© 뉴스1
사법농단 의혹이 불거진 양승태 대법원의 '행동대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첫 공판에서 작심 발언을 했다. 국가 재난 성격의 미세먼지 사태를 빗대, "(사법농단 수사는) 검찰발 미세먼지가 만들어낸 신기루"라고 주장했다. 시적인데다 시의성까지 갖춘 이 문장은 기사 헤드라인으로 만점이었다. 그러나 정작 기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무죄를 호소하기 위해 예술을 빌린 바로 그다음 대목이다. 

임 전 차장은 성화 <시몬과 페로>(페테르 파울 루벤스作 원제 로마의자비)를 언급했다. 피골이 상접한 옥중 노인과 그의 입에 자신의 젖을 물리는 젊은 여인. 그 충격적인 대조가 압권인 이 그림은 수많은 사람의 성적인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아사형에 처한 아비를 살리려는 딸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한 것으로, 임 전 차장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란 메시지를 전하고자 이 성화를 소개했다. 

그림의 원작은 고대 로마 작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 저서 '로마의 기념할 만한 업적과 기록들'에 나오는 기록으로 알려졌다. 당시 로마는 아사형을 집행하면서도 죄수의 가족이 젖을 물리는 것을 예외적으로 허용했다고 전해졌다. 이에 바로크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루벤스도 이 그림의 제목을 '로마의 자비'라고 명명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이야기를 사랑했다. 루벤스도 같은 이야기로 여러 버전의 그림을 그렸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는 18세기 화가 장 밥티스트 그뢰즈의 그림과 16세기 조각가 장 구종의 조각이 있다. 이처럼 많은 예술가들이 <시몬과 페로>에 자신의 재능을 헌정한 것은 '외설'이 '효성'으로 뒤집히는 일종의 반전 드라마가 지닌 매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반전은 타인을 향한 성급한 판단오류를 우아하고 근엄한 방식으로 꼬집는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作 원제 로마의자비(시몬과 페로)© 뉴스1

임 전 차장도 <시몬과 페로>를 언급한 뒤 직접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그게 틀린 건 아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임 전 차장은 그 말을 하기 전에는 양승태 사법부를 가리켜 "저들에게도 뭔가 사법부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선의가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사법농단' 이니 '직권남용'이니 아무리 검찰과 언론이 떠들어도 그것은 선의이며 그것이야말로 진실이라 항변한 셈이다.

임 전 차장과 나란히 재판을 받게 된 양승태 전 원장과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선임재판연구관도 기소된 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는 식의 공개 메시지를 남겼다. 

유해용 전 연구관은 페이스북을 통해 "검찰이 흘린 일방적인 정보를 그대로 받아쓰기 하는 언론보도"를 탓하며 죄없음을 주장했다. 양 전 원장은 자신의 보석심문 기일에서 "흡사 조물주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검찰이) 공소장을 만들어냈다"는 검찰 창조설을 제기했다. 

이제 1회 공판과 함께 재판이 본격 시작했으니 향후 공판에서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다른 증언과 증거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설마 <시몬과 페로> 속 '효성'이 양승태 대법원장을 향한 '충성'을 의미한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세 사람의 항변에도 아직까진 재판에 부당 개입하고, 자신의 역점 사업에 반대한 판사를 뒷조사하며, 헌법재판소 위상 흠집내기 등 온갖 혐의에 숨겨진 숭고한 진실 혹은 선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무지 감이 안온다. 그것이 알고 싶다.


yj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