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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의 욜로은퇴] 아버지의 세발자전거

(서울=뉴스1) 김경록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 | 2019-02-15 15:01 송고 | 2019-02-15 15:06 최종수정
편집자주 100세 시대, 누구나 그리는 행복한 노후! 베이비 부머들을 위한 욜로은퇴 노하우를 전합니다
김경록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 © 뉴스1
부모님의 앨범에는 1933년에 찍은 사진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카메라 앵글을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좋은 자전거를 하나 얻었음에도 표정이 밝지 않습니다. 사진의 주인공은 네 살 때의 아버지입니다. 

여기에는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는 아들 딸 각 넷의 8남매를 두셨는데 동생이 자식이 없어서 막내인 아버지를 양자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할아버지 두루마기만 잡고 따라 다니기에 급기야 두루마기를 걸어 놓은 채 살짝 도망을 치셨습니다. 뒤에 할아버지가 없어진 사실을 깨달은 아버지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양 부모님께서 자전거를 사주신 것입니다.
이 사진은 행복에 대해 많은 걸 생각하게 해 줍니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이 대부분 밝게 마련이지만 이 사진은 그렇지 못합니다. 세발자전거는 생겼지만 부모님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편안함의 고향은 어머니입니다. 아기는 아무리 난리통에서도 엄마의 품이나 등에 업혀 있으면 행복합니다. 엄마가 사라지면 아무리 좋은 장난감을 줘도 울고 난리입니다. 나무에 비유하자면 어머니는 수맥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무 뿌리는 가뭄에 수맥을 찾아서 치열하게 뻗어갑니다. 그러다 수맥에 도달하면 살았다는 안도감을 갖는다고 합니다. 나무는 뿌리가 수맥에 닿지 않고는 편안하지 못합니다. 사람도 수맥에 닿아 있어야 편안함을 느낍니다. 사람의 수맥은 보다 근원적인 데 있습니다. 여행을 가거나 맛있는 걸 먹으면서 수다를 떨면 행복하지만 어릴 때의 엄마 품 같은 근원적인 만족감은 얻지 못합니다. 근원적인 만족감은 정체성을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인간은 어려움에 처하면 본능적으로 정체성을 찾고 근원을 찾게 됩니다. 우리 민족은 일제 강점기에 정체성을 찾는 노력이 활발했습니다. 우리의 것이 아닌 일본의 정체성이 강요되자 이질감과 함께 본능적인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최근 개봉한 <말모이> 영화를 보면 사전편찬을 통해 우리의 글을 살리기 위한 몸부림을 볼 수 있습니다. 나철은 1909년에 단군을 섬기고 삼신일체설(三神一體設)을 믿는 대종교를 창시했습니다. 그는 29세에 장원 급제한 뒤 승정원을 거쳐 33세에 징세서장이라는 벼슬을 하던 중에 관직을 물러 나와 대종교를 창시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자신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토라(모세가 지었다는 다섯 경전)를 열심히 읽게 된 게 BC 605년~539년의 70년 동안 바빌론에 포로로 있던 때였습니다. 포로로 있다 보니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부득불, 이를 대신하여, 기도, 찬송, 경전 읽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토라는 이때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1970년대에 자메이카 혼성 그룹 ‘보니 엠(Boney M)’이 불렀던 디스코 음악 “바빌론 강가에서(Rivers of Babylon)”는,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 강가에서 조국 시온을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성경의 시편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후 2천 년에 걸친 유대인들의 오랜 방랑 생활에도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시켜 준 모태(토라, 기도, 회당, 찬송)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수맥이 없었으면 이스라엘의 현재는 없었을 겁니다.

사람의 정체성과 수맥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의 설계도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우리 설계도에는 신의 형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가에서도 사람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어서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사상은 이슬람이나 인도 땅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양에서도 맹자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 도덕적 능력인 사단(四端)을 갖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이라는 설계도에는 신의 형상, 불성, 사단 등의 근원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체성이자 수맥입니다. 행복은 바로 이러한 수맥을 발견하고 이에 우리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다양한 것에서 행복감을 느낍니다. 작게 행복할 일도 많습니다. 자녀를 키우고 새로운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거든요. 그래서, 행복에 관한 많은 책 들은 행복을 얻는 방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행을 가고, 낯선 곳을 찾아 가고, 친한 친구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노년에 이르게 되면 이들이 가져다 주는 행복감이 떨어집니다. 금방 허전함이 밀려 옵니다. 소설 제목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보다는 오히려 “떡볶이 먹고 돌아서면 또 우울해”가 되는 겁니다. 왜일까요?

노년에는 죽음이라는 실존적 위기가 가까이 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을 때 비해 나이가 들어갈수록 본능적으로 정체성을 찾고 근원을 찾게 됩니다. 안도감을 갖고 싶어 합니다. 집단의 정체성보다는 ‘나’라는 개체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유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신의 형상이나 불성을 찾아 보려 합니다. 나이 50대 들어서 갑자기 두꺼운 책을 읽고, 5000년 전의 고대 근동 문학 작품을 읽고, <바가바드 기타> 같은 책을 사는 걸 봅니다.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종교를 찾지만 정작 교리에는 ‘행복론’ 책처럼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이 없습니다. 종교는 인간이 신이라는 수맥에 닿으면 행복은 따라온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곤고함에 이르는 노년에는 행복 찾기도 젊을 때와 달라져야 합니다. 아기가 엄마 품을 찾아 가듯 근원적인 수맥을 찾아가야 합니다. 웰다잉의 문제도, 죽음의 문제도 수맥에 닿으면 해결됩니다. 근원인 수맥을 찾지 않고 해결하려는 것은 마치 뿌리는 수맥에 닿지 않은 큰 참나무에 바가지로 물을 뿌려 주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가 어릴 때 자전거를 타고 찍은 사진 모습과 같을 따름입니다. 노년의 행복은 우리의 근원적 수맥을 찾아 여기에 뿌리를 내리는 노력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노년이 갖는 특권이기도 합니다.

※ 이 글은 뉴스1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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