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본문 바로가기 회사정보 바로가기

[최보기의 책보기] 이름이 사람을 규정한다

김대현의 '당신의 징표'

(서울=뉴스1)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 2018-11-17 09:00 송고
김대현의 '당신의 징표' 책표지.

오십 대 이상 장년층에게 기억에 남는 코미디언을 대라면 십중팔구 모두 고인이 된 배삼룡, 구봉서, 서영춘, 이기동 님 등의 이름을 댈 것이다. '웃으면 복이 와요'란 프로그램에서 아버지 배삼룡이 주변 사람들 의견에 휘둘려 막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배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 …'로 길게 지어가는 연기는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이 이야기의 원형은 일본을 거쳐 들어온 중국의 민담인데 알고 보면 우물에 빠진 아이의 이름이 너무 길어 이름 부르는 사이에 아이가 죽었다는 블랙 코미디다.

그래서 이름은 잘 지어야 한다. 필자 역시 이름에 얽힌 사연은 원고지 천 매도 부족하다. '보기'라는 이름은 유연성과 확장성이 뛰어났다. 어렸을 때 친구들은 주로 '돋보기'라 불렀다. 성인이 돼 주택건설회사에 입사했을 때는 '집보기'와 '땅보기'로 불렸다. 정보통신회사로 옮겼을 때는 '컴보기', '텔보기'로 불렸고, 철강회사에서는 '철보기'로 불렸다. 그나마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기 플레이어'라고 이름값을 좀 쳐줬다. 풍부한 확장성으로 인해 필자 이름의 극적인 역전은 결국 '책보기'에서 홈런(?)을 쳤다.
한자의 조합으로 이름을 지었던 우리의 경우 성과 이름 각 글자의 획수와 성질 등을 정밀하게 따지는 작명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성과 이름이 신분사회의 위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인데 그런 이유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거처하는 곳의 이름을 딴 당호(신사임당)나 출신지역을 딴 택호(수원댁)가 본명을 대신했다. 사임당의 본명은 인선, 허난설헌의 본명은 초희였다.

이런 차별은 유럽이라고 다르지 않아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했던 바, 조선 시대 문장으로 이름을 남긴 여성들은 스스로 경제활동을 하는 기생이거나 '자기만의 방'을 가진 여성들이었다. 헤리엇 비쳐 스토우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 등장하는 흑인 노예 '톰 아저씨' 역시 차별의 아픔이 깊이 배어있다. 톰(Tom)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도마(Thomas)의 애칭으로 전형적인 백인의 이름이다. 흑인 노예 톰은 백인들의 '아량을 기대하며' 독실한 기독교인이 돼 자신의 이름도 아프리카의 정체성 대신 아메리카를 택해야 했던 것이다.

노예제가 폐지된 지금도 이름은 여전히 차별에 저항하고 정체성을 지향한다. 인종차별에 항의해 올림픽 금메달을 강물에 던져버렸다는 미국 복서 무하마드 알리의 본명은 캐시어스 클레이였으나 인권운동가 맬컴 엑스의 영향을 받아 '캐시어스 액스'로 개명, 흑인의 정체성을 찾는다. 이후 이슬람에 귀의하면서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했다. 같은 성씨라도 본과 파까지 따지는 우리 선조들이 일제로부터 '정체성을 포기하라'는 창씨개명을 요구당했을 때의 고통을 이제 좀 짐작할 것 같다.
한편 세계는 이름을 짓는 문화 역시 다양했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아이의 미래에 바라는 희망을 내포하는 경우가 많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첫인상이나 이미지'를 반영한다. 1990년 발표됐던 '늑대와 춤을'이란 영화 제목이 백인 남자 주인공에게 원주민들이 붙여준 이름이었다. 당시 원주민들의 이름은 '주먹 쥐고 일어나', '발로 차는 새', '머릿속의 바람' 같은 식이었다. 그런 작명 문화는 우리에게도 있었는데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의 이름 주몽(朱蒙)은 '활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다.

미래의 희망이든 첫인상이든 정체성이든 남들이 불러야 하는 이름은 잘 지어야 한다. 순우리말로 지어진 '슬기, 초롱, 샛별' 같은 이름들은 아이 때는 좋지만 성인이 되면 불편한 경우도 생긴다. 사 씨 성을 가진 남자의 이름이 '진기'여서 개명신청을 했다는 기록도 보았다. 이름은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부담이 없어야 한다. 청각적으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불평등이 없어야 한다. '당신의 징표'는 동서고금 이름과 성에 얽힌 정치, 사회, 문화의 함수관계를 가볍고 재미있게 풀어낸, 매우 독특한 책이다. 그나저나 '박차고나온… …' 그 분은 지금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당신의 징표 / 김대현 지음 / 북멘토 펴냄 / 2만 2000원


이런 일&저런 일

    더보기